346화. 이목을 끌며 입장하다 (1)
‘안전 통로’를 지나와 온 가족이 눈을 들어 멀리 내다보니 아주 큰 광장에 차양막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문관, 무장, 훈귀가 질서정연하고도 뚜렷한 경계로 구분되어 각자의 구역에 앉아 있었다.
이밖에도 많은 귀부인과 귀한 집 여식들이 가족을 거느리고 두법을 보러 왔다.
이런 귀족의 안식구들에게 있어 대봉의 체면은 부차적이었다. 구경거리를 보는 거야말로 가장 중요했다.
허평지는 휙 둘러보면서 처자식을 데리고 야경꾼 관아 소재의 구역으로 갔다. 주인석에는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에 청의를 입은 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양쪽으로는 온통 금라였고, 금라 뒤로는 은라가 있었다. 동라는 보초로 배치되어 차양막 안에 머물며 구경할 자격이 없었다.
허평지는 처자식을 데리고 가까이 다가가 공수하더니 재빠르게 처자식과 낯선 부인을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명성이 자자한 위연과 금라들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이에 허평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투명 인간 취급받는 게 좋았다.
아줌마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투명 인간 취급받는 건 정말 좋았다.
* * *
이 차양막 중에 가장 호화스럽게 지어진 건 노란색 비단으로 감싼 휴식대로 차양막 아래에는 탁자가 주르륵 놓여 있고, 황실, 종실 구성원들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내궁에서 하마터면 싸우다가 머리가 터질 뻔했던 황후와 진비 역시 와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늘 화목했던 자매처럼 어떠한 의견 충돌도 없었다.
이윽고 네 분의 공주가 모두 도착했다. 회경이 가장 앞자리에 앉고 임안은 그녀 옆에 앉았다.
황자 중에 태자는 여전히 감금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나머지 황자들은 모두 왔다.
황실에서 이번 두법은 한 차례 구경거리이면서, 조정의 체면과 황실의 체면이 걸려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허칠안은 어디 있는 거야? 왜 나오지 않는 거지? 중놈들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중놈들은 어떻게 두법할 작정이지……?”
임안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생기가 도는 도화안을 여기저기 굴렸지만, 그녀의 개자식이 보이지 않자 갑자기 맥이 빠졌다.
“불길해!”
칠황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허칠안은 무사인데 어떻게 불문과 두법하겠니? 게다가 그의 보잘것없는 수련 경지로 정말 상대할 수 있다고?”
삼황자가 웃으며 덧붙였다.
“불문과 그가 시사를 겨루지 않는 이상 말이다.”
두 공주와 황자들이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임안은 분노하며 무시무시한 얼굴로 황자와 여동생들을 훑어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지면 아주 기쁘겠네? 본 공주가 너희 모두에게 불상 하나씩 주조해 줄까?”
삼공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희는 그저 얘기한 것뿐이에요. 임안 언니, 뭐하는 거예요?”
다른 황자들도 잇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복비 사건 후, 임안은 성미가 거칠어졌다. 형제자매들에게 조금도 예의를 갖추지 않고 말은 점점 더 독해졌다.
회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도문 두법이라면 누가 강하고 누가 이길 건지는 당연한 이치죠. 다른 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불문은 달라요. 불문이 중시하는 건 깨달음, 불심(佛心), 선기(禪機)입니다. 허칠안은 확실히 7품 무사일 뿐이고, 그보다 강한 수련 경지는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수련 경지가 높은들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리 높아도 도액 나한만큼 높을 수 있나요?”
회경은 언제나 말문이 막히게 만든다. 반박할 수가 없다.
황자, 공주들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종실의 차양막 바로 옆자리에서 재상 왕정문이 술을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딸의 시선이 줄곧 야경꾼 관아 소재의 구역을 향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아(慕兒)야, 무얼 보는 거니?”
왕 소저는 시선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명성이 드높은 위 공을 처음으로 봬요. 역시 기개가 남다르군요.”
그녀는 말을 마친 뒤 곁눈질로 수려하기 그지없는 외모의 어느 아우를 힐끗 쳐다봤다.
“참, 어째 폐하께서 보이지 않나요?”
왕 소저는 아무런 내색 없이 화제를 돌려 부친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왕 재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황붕(皇棚)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궁 안에서 두 분이 기세 드높게 싸우시니 폐하께서도 진절머리가 나서 내려오길 원치 않으시는 거지. 이쯤이면 아마 팔괘대에서 내려다보실 거란다.”
왕 소저는 ‘아’하더니 뒤이어 물었다.
“아버지, 서역 사절단이 이번에 경성에 왜 온 거예요? 이런 이유 없는 두법 제안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요.”
사절단이 온다고 했으니 온 것은 아닐 테다. 반드시 목표가 있다. 게다가 요 며칠 불문한테서 적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 이번 서역 사절단의 경성 방문이 선한 목적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아마도 상백 사건과 관련이 있겠지.”
왕 재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왕 소저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친의 대답을 통해 두 가지 정보를 얻었다. 첫째, 명색이 재상인 아버지 역시 잘 알지 못한다. 둘째, 상백 사건에는 더 깊은 내막이 감춰진 듯하다.
그녀가 막 캐묻고 싶었던 찰나에 왕 재상이 다소 귀찮아하며 손을 저었다.
“딸내미께서는 조정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그 뱃속의 잔꾀는 나중에 남편한테 쓰세요.”
왕 소저는 입을 삐죽거리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부친이 신경쓰지 않는 틈을 타 그녀는 다시 야경꾼 관아로 시선을 돌렸다.
‘두법이 끝나면 저택에서 문회를 개최해야겠어…….’
그녀는 남몰래 속으로 생각했다.
* * *
다른 한편, 허평지가 경성에서 여러 해 동안 벼슬에 몸을 담은 경험에 비추어 차양막을 하나씩 훑어보니 알아볼 수 있는 거물들이 보였다. 물론 그가 모르는 거물이 더 많았다.
하지만 황붕을 중심으로 거리가 가까울수록 지위가 높은 우두머리임에 틀림없었다.
‘갑자기 경성의 권력 무대에 오른 착각이 드는구먼. 게다가 이 모든 건 칠안이 가져다준 것이지……. 이번 두법에서 만약 칠안이 이기면 그는 경성에 이름을 떨치고 나아가 대봉에 이름을 떨치겠지……. 만약 지면 아마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테고 사서에 한 줄 기록된다면 그는 영원히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
허평지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착잡했다.
“나리, 저 공주마마 보세요. 그날 칠안을 조문하러 왔던 그 분 아닌가요?”
숙모 역시 현장을 둘러보다 연꽃처럼 도도하고 새하얗게 빛나는 회경공주를 알아보았다.
허평지는 ‘응’하고 소리를 내어 아내에게 대답하는 셈 쳤다.
숙모가 이어서 말했다.
“그녀 곁에 붉은 치마를 입은 저 공주마마도 아주 아름답네요. 다만…… 눈빛이 마치 사람을 꾀는 듯하여 착실해 보이지는 않네요.”
허평지는 깜짝 놀라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헛소리. 이런 장소에서 공주마마를 엉터리로 논하지 마시오. 온 집안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당하고 싶소?”
숙모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말하면 안 될 일이 뭐가 있어요? 대봉 황실에 좋은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아주머니가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는 너를 알지도 못하는데, 한쪽으로 꺼지지…….’
허신년은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허평지는 한숨을 내쉬며 그 여인을 상대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강요했고, 처자식을 훈계했다.
“이런 장소에서는 반드시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적게 말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잘못될 리가 없어……. 영음?!”
그가 ‘영음’ 두 글자를 외쳤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느새 허영음은 짧은 다리를 내디뎌 청의 환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얼굴을 높게 치켜들고 탁자 위에 있는 음식을 가리키며 동경하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아저씨, 제가 아저씨 음식을 먹어도 될까요?”
이 광경을 본 허평지는 꼬리뼈가 저려오더니 두개골까지 통증이 이어졌다.
위연 곁의 금라들은 미간을 찌푸리는 동시에 속으로 ‘어디서 온 아이가 이렇게 예의를 모를까’하고 말했다.
허칠안의 조문을 다녀왔던 장개태가 콩알이를 알아보고 얼른 말했다.
“위 공, 이 아이는 허칠안의 어린 여동생입니다.”
금라들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허영음을 훑어보더니 속으로 ‘이 아이는 숫기가 많고 담력이 세서 분명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위연은 밀전(蜜餞)을 한 덩이 집어 건넸다.
허영음은 받아서 몇 입 씹더니 다 삼켜버렸다.
“밀전은 그렇게 먹는 게 아니란다. 입속에 머금는 시간이 길수록 단맛이 더욱 오래간단다.”
위연이 웃으며 말했다.
“단맛을 다 즐기면 다른 사람들이 밀전을 다 먹어 버릴 거예요. 저는 쉴 새 없이 먹어서 계속 단 상태로 있을래요……. 아저씨, 저 더 먹을래요.”
위연은 웃으며 밀전 몇 알을 또 던져 주었다. 허영음은 잠시 먹더니 좀 미안했는지 말했다.
“아저씨는 왜 안 드세요?”
위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스스로 먹지 않는 거네요.”
허영음은 맑고 순진한 눈을 깜박이며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떠보았다.
“아저씨가 먹지 않아서 제가 다 먹어치우는 거예요.”
“먹을 수 있니?”
위연은 웃으며 허영음의 배를 쳐다봤고, 다시 탁자 가득한 과일, 밀전 그리고 일품 떡을 보았다.
“위, 위 공…….”
허평지는 눈 딱 감고 와서는 허리를 굽히고 목소리를 떨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딸아이가 짓궂습니다. 저 아이와 상종하지 마십시오.”
위연은 옷소매를 들고, 누르스름한 배를 하나 집어 허영음에게 건넸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강율중이 웃으며 말했다.
“위 공께서 아이와 대화하고 계시니 잠시 돌아가 있거라.”
허평지는 콩알이를 쳐다보고 다시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위연을 보더니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아버지, 뭐가 두려우세요? 형님이 은라고 위 공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니 영음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허신년이 말했다.
허평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사람들은 위연의 무서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산해관전역을 겪은 사람이라면 위연을 자상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점차 흘러 위연 앞의 먹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허영음의 배를 쳐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고,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눌렀다.
이어 그녀는 다시 여자아이의 몸 구석구석을 한참 살폈다.
“아쉽군.”
위연이 애석해하며 말했다.
“의부님, 무슨 일이십니까?”
양연이 물었다.
“이 아이는 기골이 남다르네. 선천적으로 그 기초가 두터워. 다만 근육과 뼈의 유연성이 너무 떨어져서 무술을 연마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네.”
위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쩐지 이렇게 잘 먹더라니. 너는 대식가지?”
남궁천유가 비웃으면서 말했다.
“퉤퉤퉤…….”
허영음은 그를 향해 침을 뱉더니 옅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말했다.
“나쁜 사람.”
그녀는 예쁜 언니를 여전히 기억했다. 예쁜 언니는 집에 와서 큰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속여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참을 울게 한 사람이다.
남궁천유는 콧방귀를 뀌더니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바짓가랑이에 튀긴 침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