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시
회경은 궁녀에게 차를 내오라 한 뒤, 쌀쌀맞으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 대인이 무슨 일로 본 공주를 찾는 건가.”
“소직의 사촌 동생이 회원에 급제하였으나 그는 운록서원 출신이라 그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허칠안은 간곡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마마께서 무슨 좋은 계책이 있으신지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똑똑한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합리적으로 모든 호구를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장공주에게 생각이 없으면 그는 위연에게 물어보러 갈 것이다.
회경은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바로 허칠안의 뜻을 이해했다. 허신년에게 ‘환관의 도당’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길 바라는 것이었다.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나 파 놓는다고 하지 않는가. 똑똑한 자는 절대로 판돈을 전부 한 곳에 걸지 않는다.
‘허칠안은 무사임에도 총명하기 그지없구나…….’
회경은 웃었다.
“자네 청주에 간 적이 있지? 청주를 얼마나 아는가?”
“관리의 품행과 치적이 깨끗합니다. 자양거사께서 청주를 정연한 체계로 잘 다스리시니…….”
허칠안은 여기까지 말을 하던 중 갑자기 회경의 의미를 이해했다. 청주는 현재 자양거사의 일언당(一言堂)이다. 그는 청주에서 주재하며 진두지휘하고 있다. 만약 운록서원의 서생이 청주로 부임한다면, 틀림없이 억눌리지 않고 활개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청주가 바로 운록서원의 유가 서생들이 개척한 정토(淨土) 아닌가.”
장공주는 뜸을 들이지 않았다.
‘그건……. 나한테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일한 남동생이라고. 그가 청주로 가는 건 섭섭하단 말이야. 남동생이 먼 길을 떠나면 형은 걱정되는 법!’
허칠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직 이해했습니다.”
‘됐다. 우선 신년이 경성에서 유임하게 만든 뒤에 후속 조치는 다시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어쩌면 그 스스로 빽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참, 마마께서 화본이나 소설에 흥미가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허칠안은 본심을 드러냈다.
“본 공주는 여태껏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없네.”
회경공주의 거만한 말투를 들으면, 마치 박사가 ‘인터넷 소설? 허, 나는 지금껏 그딴 걸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직이 좋은 책을 한 권 찾았습니다. 마마께서 별일 없이 적적하실 때 한번 보십시오……. 아, 꼭 소직의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허칠안은 품속에서《위엄 넘치는 여장군이 사랑에 빠지다》를 꺼내 탁자 위에 두었다.
회경은 보지도 않고 그저 의례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허칠안을 배웅한 후, 막 궁녀에게 소설을 치우라고 분부하려고 하다가 스스로 처리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런데 표지를 훑어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멍해졌다.
‘위엄 가득한 여장군이 사랑에 빠졌다고……? 여장군?! 이렇게 대역무도한 책 이름이라니…….’
회경은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어차피 지금 별다른 일이 없어서 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앉아서 이 대역무도한 이름의 소설을 펼쳤다.
* * *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계에 잘못 들어온 선비로, 그는 재능이 남다르고, 뛰어난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마계의 주민은 선비를 없애려고 기름이 펄펄 끓는 솥을 놓아 그를 튀길 작정이었다.
이때 여장군이 나타났다. 여장군은 마계의 유일한 지식인으로 아주 뛰어난 지혜와 문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서생을 구해 그를 자신의 내궁에서 살게 했다. 두 사람은 상대가 되어 시를 읊고, 역사와 오늘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여장군은 자신의 포스와 냉혹함을 충분히 드러냈지만, 마음속으로 그 서생을 아주 신경 썼다. 다만 표현하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말버릇은 <남자여, 불장난하고 있나?>였다.
회경은 지금껏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본 적이 없었다. 심도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고, 더욱이 지식을 배울 수도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런 난해한 고서들과는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분명히 생활 속의 자질구레한 일들이고 지루한 대화들일 뿐인데 특별한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회경은 여장군의 여러…… 과시욕을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맞다, 바로 과시욕이다.
그녀는 남자를 발밑에 두고 내궁에서 키우며 포악하고 냉혹한 태도로 남자를 대했지만, 설령 이렇게 냉혹한 장군일지라도 부드러운 마음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서생은 여장군에게 아주 순종적이고, 모든 부분에 있어 그녀를 염두에 두었다. 또한 여장군과 마계 장군들이 술을 마신 일로 귀엽게 화를 내고 질투하기도 했다.
어느새 해 질 무렵이 되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이 책을 두 시진 넘게 보았다.
회경은 이 소설의 장점을 또 발견했다. 그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미가 끝이었다.
회경은 기분 좋게 다 본 뒤, 갑자기 분노의 감정이 치밀었다.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이렇게 영양가 없고 지식도 없는 책을 내가 두 시진이나 봤다고?! 생명을 낭비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시간과 정력을 이렇게 아무런 영양가 없는 물건에 낭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에 깊은 죄악감이 들었다.
“심심풀이로 읽는 책 한 권일 뿐인데 뭐…….”
회경은 하찮다는 듯 책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일어서서 회객청(會客廳)을 나갔다. 몇 분 뒤, 그녀는 다시 되돌아 와 책을 소매 속에 감추고 가져갔다.
그녀는 밤에 잠자기 전에 다시 한번 돌이켜 보려는 게 절대 아니었다. 이 책은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됐다. 규중의 비본(祕本)처럼 빛을 볼 수 없었다.
* * *
같은 시간, 소음원. 임안은《정천대성》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원래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아아, 개자식은 어떻게 본 공주한테 이런 책을 보여줄 수가 있어!”
임안은 얼굴과 귀가 빨개진 채로 침상에 누워 뒹굴거렸다. 그녀는 자하 선녀와 용오천이 침상 위를 굴러다니는 내용이 무려 5000자인 걸 보더니 소리쳤다. 싫다, 싫어!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편으로 한 글자 한 문장씩 새겨 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 후 그녀는 부끄러워 침상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동글반반한 얼굴은 잘 익은 사과 같았다. 본래도 어여쁜 도화안이 촉촉해졌다. 점점 더 요염해 보여 아주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는 구색일 뿐, 핵심은 자하 선녀와 용오천의 사랑 이야기였다.
삼분의 이는 아주 달콤한 연애 이야기고, 삼분의 일은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용오천이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뽑힌 채 윤회하여 자손 대대로 가축이 되고, 자하 선녀가 영원히 광한궁(廣寒宮)에 감금된 걸 본 임안의 베개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화를 냈다.
“다음 이야기가 어째서 없는 거야? 개자식, 왜 다음 이야기가 없냐고.”
그녀는 불공평함에 매우 분노하던 중 궁녀를 불러들이더니 말했다.
“본 공주가 목욕할 것이니 따뜻한 물을 준비하거라.”
궁녀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곧 식사하실 시간인데 목욕하시겠다니요?”
임안은 갑자기 민망하면서도 분한 마음에 성을 냈다.
“가라면 갈 것이지.”
이내 따뜻한 물을 다 끓인 궁녀는 수온을 맞춘 후 임안의 목욕을 시중들었다.
그녀는 새하얀 몸을 물속에 담갔다. 꽃잎을 둥둥 띄운 수면에 매끄러우면서도 앙상한 어깨와 정교한 쇄골이 드러났다.
“너희 말해 보거라. 내 곁의 시위 중에 누가 제일 수려하고, 제일 재능이 뛰어나면서도 제일 재미있고 본 공주에게 일편단심으로 충성하지?”
임안이 갑자기 물었다.
“모두 충심이 지극하지요. 재미와 재능에 대해 말하자면 노비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위가 아니라면 노비 마음속에 떠오르는 후보가 있지요.”
“누군데!”
임안은 바로 물었다.
“허 대인입니다. 허 대인께서는 외모도 준수하고 재능이 뛰어나면서도 재치 있지요. 마마를 자주 기쁘게 해 드리지 않습니까. 그는 비록 시위가 아니지만 마마가 데리고 오신 심복이지요. 게다가 지식인이 아니라 야경꾼이니 시위라고 할 수도 있지요.”
임안이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꽃잎을 휘저었다. 그러자 꽃잎이 흩어졌다. 그녀는 출렁이는 물결에 어렴풋이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곱고 아리따운 얼굴이 좀 부끄럽다는 듯 불그스름해졌다.
* * *
황성, 왕부.
재상 왕정문의 서재의 격자무늬 창밖에 붉은 금빛 석양이 비쳤다. 쉰이 넘은 왕 재상은 접본을 확인한 후 전부 구석으로 쓸어 버렸다.
왕 재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속의 포부에 힘입어 붓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금준청주두십천, 옥반진수직만전(*金樽淸酒斗十千 玉盤珍羞直萬錢: 금항아리 맑은 술 가득하고 옥쟁반 진수성찬 가득한데).
* * *
행로난, 행로난, 다기로, 금안재.
장풍파랑회유시, 직괘운범제창해.
왕 소저는 인삼탕을 내려 두고, 다가와서 슬쩍 봤다. 그녀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자손 대대로 전해질 명작 한 수를 쓰셨네요. 이 시가 세상에 나오면 분명히 조정 전체를 뒤흔들 거예요.”
그녀는 문학청년으로서 작품을 감상하는 능력이 있었다. 왕 소저는 이 시의 기개에 탄복했다.
왕 재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인삼차를 받쳐 들고 한 입 마시더니 시원하게 숨을 내뱉었다.
“이건 내가 쓴 시가 아니란다. 새로 급제한 회원이 쓴 시지. 너 오늘 공원(貢院)에 가지 않았느냐? 보지 못했니? 그는 뛰어난 인재면서도 보기 드문 미남이라고 하더구나.”
“못 봤어요. 저는 그냥 구경하러 갔을 뿐인데요, 뭐.”
왕 소저는 한사코 부인하며 자꾸만 탁자를 쳐다봤다.
“그해 시사를 다시 과거에 편입하는 데 이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였지. 저항이 만만치 않았단다.”
왕 재상은 종이에 손가락을 대고 톡톡 치더니 후련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 이런 걸작이 나왔으니 아버지가 기를 펴겠구나. 세상의 지식인들과 선조들에게 면목이 선단다. 진귀한 보배인 시사를 완전히 몰락시키지 않았어.”
행방이 나온 후, 허신년의 이《행로난》을 열권관들이 널리 전파하였고, 듣는 이들은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며칠 더 무르익으면 이 시는 경성에 두루 퍼져 널리 불릴 것이다.
“듣자 하니 그 회원이 운록서원의 서생이라던데요.”
왕 소저는 ‘조심하지 않고’ 말했다.
왕 재상은 잠시 침음하더니 개탄하며 말했다.
“애석하구나.”
조정의 문관들은 운록서원의 지식인을 배척한다. 그는 문관의 모범이 되는 재상으로서 이 방면으로는 양보를 허용하지 않았다.
왕 재상은 허신년의 재능이 뛰어날수록 그를 더욱 경계하며 쓰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아버지!”
왕 소저는 접본 정리를 도우면서 말했다.
“저 저택에서 문회를 개최하여 경성에서 유명한 선비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아버지 명의로 소집해야 해요.”
문회 개최자는 반드시 덕과 명망이 높은 사람이어야 했다. 왕 소저는 그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택에서 아주 여러 차례 문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 참가자는 전부 왕 재상의 명의로 불러 모은 사람들이었다.
춘시가 막 끝났으니 문회를 한 차례 개최하는 건 이치에 합당했다.
왕 재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