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깊은 내력
초원진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대로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절차탁마는 좀 재미없었네. 자네 무슨 절학이 있다면 마음껏 발휘하게.”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말했다.
“저는 한 수만 내보일 겁니다. 한 수만 보이면 저희 절차탁마는 끝인 겁니다.”
초원진이 한칼 받은 뒤에 손을 흔들며 반격했다. 그를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리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그랬다간 허칠안 병사, 방년 스무 살에 사망이다.
초원진은 침음하더니 물었다.
“절학을 펼친 뒤에 자네는 허약기로 접어드는가?”
‘……장원랑은 역시 똑똑해. 머리가 참 잘 돌아가!’
허칠안은 좀 탄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슨 절학입니까?”
원경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곁에 있는 낙옥형을 바라보았다.
낙옥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사실 알았다. 단지 그녀는 원경제에게 들들 볶이기 싫어 말을 아꼈을 뿐이었다.
원경제는 그녀의 산뜻한 자태를 보자 은근히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명색이 천자의 자리에 오른 제왕으로서 대봉의 수십만 리 강산을 소유했으며 민생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 앞에서는 내세울 만한 게 없는 황제일 뿐이었다. 그는 우위를 점한다고 할 만한 게 조금도 없었다.
원경제는 줄곧 국사와 쌍수하여 불로장생의 염원에 이르고 싶었다. 하지만 낙옥형은 매번 그가 이 생각을 내비칠 때마다 항상 무시하거나 책임을 회피했다.
이 2품 도사 앞에서 그는 마치 보잘것없는 집안의 가난뱅이가 된 듯했다. 원경제는 이에 아주 맥이 빠졌다.
* * *
쨍!
화원 안, 허칠안은 흑금장도를 거두어 칼집에 도로 넣었다.
이어 그는 한 발은 앞으로 굽히더니 다른 한 발은 뒤로 곧게 뻗은 뒤 양 무릎을 살짝 숙이고, 오른손으로는 천천히 칼자루를 쥐어 칼을 뽑을 힘을 축적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는 호흡을 안정시키고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 마치 해일이 오기 전의 해안가처럼 수축한 기기를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초원진은 신중한 기색을 보이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손짓하여 나뭇가지 한 마디를 불러와 손에 쥐었다. 나뭇가지로 검을 대신한다.
쨍……. 허칠안은 엄지손가락으로 흑금장도를 튀기는 동시에 머릿속에는 금사자 포효도를 관상했다. 그는 깊고 웅장한 포효 소리를 동반하며 칼을 뽑았다.
초원진의 귓가에 ‘우르르’ 진동 소리가 들렸다. 마치 머리 꼭대기에서 우렁찬 천둥이 치는 듯했고, 이어 그는 가느다란 선 같은 도기(刀氣)가 번쩍이더니 사라지는 걸 보았다.
장원랑은 일촉즉발의 순간에 여유롭게 손에 있는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쿵!
나뭇가지가 도기에 스치는 찰나, 난폭한 충격파가 순간 화원 전체를 휩쓸었다. 초원진 발밑의 석가산이 먼저 폭발하고 이어 뒤에 있는 정자와 기둥 4개가 소리를 내며 부러지더니 정자 꼭대기는 젖혀져 하늘로 솟구쳤다.
잔잔한 연못에 파도가 일더니 물보라를 일으켰다. 뒤에 있는 정실이 흔들리며 무너지려 하자, 낙옥형이 붉은 입술을 가볍게 움직였다.
“진정!”
난폭한 충격파가 순간 정체되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허칠안이 침울한 표정을 한 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에는 칼을 가로로 두고 있었다.
초원진의 소매는 반 마디 찢겨 근육이 보이는 힘 있는 팔뚝이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펼치는 동작을 몇 번 반복하여 통증을 완화시켰고 탄식하며 말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자네가 만약 5품의 경지라면 이 단칼로 나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네.”
‘온 힘을 다한 한 방인데 고작 적막을 베었다니…….’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치켜들고 허신년의 표정을 모방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비연 여협객과 맞붙을 수 있는 강자답습니다. 진심으로 탄복합니다.”
‘허칠안은 역시 아주 교만한 자다. 이런 오만스러운 태도는 운록서원의 지식인에 뒤지지 않아…….’
초원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제는 화원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낙옥형을 쳐다봤다. 극히 아름다운 자태의 국사는 꼼짝하지 않고 허칠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원경제는 이 모습을 지켜보다 통쾌한 미소를 보였다.
“초원진은 역시 인종의 뛰어난 제자답습니다. 이 정도의 수련 경지는 얻기 어렵지요. 허칠안은 아직 멀었습니다. 그는 어쨌거나 일개 은라이지 않습니까. 아직 좀 더 노력해야 합니다.”
초원진을 치켜세우고 허칠안을 밟는 듯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보잘것없는 은라가 초원진의 소매를 잘랐다. 이런 은라는 야경꾼 관아에 없다.
낙옥형은 마지못해 웃었다.
원경제는 갑자기 더욱 통쾌해하며 웃었다.
“짐은 궁에 일이 있어 오래 머물기 어렵습니다. 국사께서 짐을 좀 배웅해 주십시오.”
낙옥형은 청하는 손짓을 했다.
이때, 뜰 안에 있던 허칠안이 갑자기 외쳤다.
“소직, 전하를 알현합니다.”
초원진 역시 예를 갖추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원경제와 낙옥형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전자는 위엄 가득한 눈빛으로 이미 승직한 은라인 허칠안을 훑어보았다. 그는 보기 드물게 정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멋진 대결이었다, 허칠안. 네 천부적인 자질은 훌륭하군. 너를 발탁한 조정을 저버리지 말거라.”
허칠안은 물 흐르듯 대답했다.
“폐하의 등용에 감사드립니다. 소직, 삼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죽을 때까지 충성하겠습니다.”
원경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낙옥형과 나란히 영보관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울뿐인 말로 칭찬하면서도 실제로는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어…….’
허칠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초원진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허 형, 잠깐만 기다리게. 옷 좀 갈아입으러 가겠네.”
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정실로 갔다.
* * *
몇 분 뒤, 정실 문이 열리더니 초원진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허 형, 들어와서 차 마시게.”
허칠안이 문턱을 넘어서자 월백색의 도포로 갈아입고 탁자에 앉은 초원진이 보였다. 소매가 잘린 청삼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엇? 초 형 어디서 난 옷입니까? 그 청의는요?”
허칠안이 능청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게는 수납 법기가 있네.”
초원진은 그에게 차를 따라 주더니 온화하게 말했다.
‘……그건, 나는 뒤이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와, 초 형 정말 대단하십니다. 소매 속의 건곤(乾坤) 법술입니까! 어쩜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다 있답니까. 퉤, 저에게는 전혀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군요. 이묘진보다도 솔직하십니다!’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더니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제게 좀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초원진은 고개를 저었다.
“내게 법보(法寶)를 선물한 선배가 일찍이 당부하였네.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주면 안 된다고 말이야.”
거절하는 사람도 정정당당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허칠안은 유감스럽게 말했다.
금련도사가 그에게 상응하는 경고를 한 적이 있다. 주목적은 지종의 도사를 방비하기 위함이다. 지종은 수천 년의 종파를 전수하고 계승하였다. 비록 여러 해 전에 분열이 생겼지만, 그 내력은 여전히 깊다.
대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초 형은 운록서원의 서생이 아니시죠?”
허칠안이 물었다.
“운록서원에서 학문을 탐구한 적이 있네. 후에 국사감으로 갔지.”
초원진은 아무런 숨김이 없었고, 한숨을 내뱉었다.
“어릴 적에는 웅대한 포부를 품고, 가진 재능으로 조정에 힘을 보태고 싶었네. 운록서원의 서생은 중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서원을 떠나 국자감에 학문을 탐구하러 갔네.”
“그럼 후에 왜 관직을 내려놓으셨습니까?”
“서생은 전혀 쓸모없기 때문이네. 학문으로는 대봉을 구할 수 없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관직에서 물러나 일개 평민이 되어 검을 쥐고 강호의 떠돌이가 되는 편이 낫지.”
초원진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아는 한 놈도 의학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더니 글을 쓰러 도망갔지…….’
허칠안은 탁자를 치며 갈채를 보냈다.
“대범하십니다!”
‘어쩐지 방금 초원진이 원경제를 만났을 때 덤덤하게 예만 갖췄을 뿐, 입을 열어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
그는 이 세세한 부분까지 주의하였다. 지금 연결 지어 보니 애당초 진정으로 초원진을 실망시킨 건 아마 수련에 넋이 나간 제왕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모두 초원진이 여러 해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얘기였다.
“북방 오랑캐는 백만 인구에 불과하지만, 우리 대봉은 큰 주(州)로 천만 인구네. 하지만 천 년 동안 오랑캐는 시종일관 우리 대봉 마음속 근심이었지. 왜인지 아는가? 왜냐하면 북방 오랭캐는 먼 옛날 신마(神魔)의 혈통이기 때문이네.”
“먼 옛날 신마요?”
허칠안은 이해하지 못했다.
“듣건대 천지가 개벽할 때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고 별을 따고 달을 가져와 신마가 탄생했네. 그 후에 소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방 오랑캐는 신마의 후손으로 불리네. 결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게 아니네. 그들은 천성적으로 신체와 정신이 강하고, 솥을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네. 부족에서는 시시때때로 그 선조와 같은 형질이 나타나는 갓난아이가 탄생하곤 하는데 몸 표면에는 비늘 조각이 나 있고, 이마에는 뿔이 자라나 있고, 큰 구렁이의 거대한 꼬리가 있네. 생후 3년이면 두 장(丈)만큼 자란다지……. 각종 기이한 현상이 모두 이 견해를 입증하네.
대봉의 사관들은 이런 현상에 따라 미개한 시기를 추측해 냈네. 틀림없이 신마가 활약하던 시대가 있었을 테지. 그 시절에 인류는 개미처럼 약해서 신마에 빌붙어 생존할 수밖에 없었지. 이로써 지금의 북방 오랑캐가 생겨났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부상한 인족(人族)인 게지.”
‘아니, 신마와 인류가 설마 생식 격리를 하지 않았다고……?’
허칠안은 속으로 입씨름을 벌이며 물었다.
“저는 무슨 신마가 아니라 인간과 요족의 혼혈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어쨌거나 북방 오랑캐와 북방 요족은 연맹이지 않습니까.”
초원진은 이 문제에 관해 한참을 침음하더니 말했다.
“나는 신마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여부에 관해 한 가지 견해를 들은 적 있네. 남강 극연에 깊이 잠든 고신이 바로 상고 시대에 운 좋게 살아남은 신마이자 유일한 신마라지.”
‘고신이 먼 옛날 신마라고? 이 문제는 오호한테 가르침을 청할 수 있겠는데…….’
허칠안은 갑자기 마음이 동요하면서 연상을 펼쳤다.
“그래서 산해관전역 그해 남북의 오랑캐가 동맹을 체결한 것입니까?”
“그 사고의 방향이 옳네. 우리는 단지 남북의 오랑캐가 그래도 한결같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 알지. 틀림없이 중간에 대봉을 두고 모두 이 떡을 노리고 있을 테지. 그래서 선천적인 동맹이지만, 신마 혈통이 그들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할 가능성도 있지.”
초원진은 분발하며 말했다.
“사관이 만약 이 사고의 흐름을 안다면 분명 아주 흥분할 걸세.”
이야기는 계속됐다.
“북방 오랑캐의 지역을 넘어 북으로 더 가면 극지방이네. 그곳은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얼음이 얼 만큼 춥지. 하지만 여전히 생명이 살고 있는 흔적이 있네. 나는 일찍이 사람 머리에 물고기 몸을 한 기괴한 종족을 만난 적이 있네. 그들은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고 손짓에 의존하여 소통하네. 그들 집단은 암컷이 대다수라 수컷 하나와 여러 암컷이 짝짓기 하는 경우가 빈번하네. 그녀들을 책임지고 임신시키기 때문에 수컷은 교배 외에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지. 사냥도 암컷에게 맡기네.”
‘정말 부럽다…….’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과로한 탓에 수컷은 20년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네. 그리고 태어나는 후손은 여전히 암컷이 다수를 차지하지.”
‘이래서 남자는 순결을 지켜야 하고 자신을 잘 보호해야 해. 여인들이 몸을 탐하게 해서는 안 돼…….’
“그들은 60년마다 종족 멸망의 위기를 맞곤 하네. 왜냐하면 수컷이 모두 죽어 버려서 번식이 가능한 수컷이 더는 없기 때문이네……. 마침 그해, 내가 북방 극지방에 갔지.”
허칠안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럼 초 형께서는 암컷을 임신시키는 데 성공하셨습니까?”
“풉…….”
초원진은 허칠안의 얼굴에 차 한 모금을 내뿜었다.
“자네는 왜 이런 추측을 하는 건가?”
초원진은 손수건을 건네며 깜짝 놀라 물었다.
“……계속해서 말씀하십시오.”
허칠안은 손을 내저으며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