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액운
한밤중, 곤히 잠들었던 허칠안은 갑자기 ‘콰당’하는 묵직한 소리를 들었고, 그다음으로는 어느 재수 없는 여인의 끙끙대는 신음을 들었다.
그는 순간 깜짝 놀라서 깼고, 무의식적으로 침상 곁의 패도를 손으로 눌렀다.
“미안하네, 자빠졌네…….”
종리가 통증을 참으며 말했다.
‘이렇게도 넘어질 수 있다고? 좌우지간 5품 술사잖아…….’
허칠안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탁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이 역시 액운의 일부인가요?”
“이건 그나마 괜찮은 편이네. 만약 자네가 곁에 없었다면 나는 아마 넘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졌을지도 모르네.”
감정의 다섯 번째 제자는 단조로운 말투로 눈물겨운 말을 내뱉었다.
“별일 아니네. 어쨌든 나도 이제는 익숙해졌네.”
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일어나 입구로 걸어갔다.
“나는 밖에서 좌선하겠네. 자네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겠어.”
“…….”
허칠안은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문을 닫았다.
그가 몸을 뒤척이고 계속해서 잠을 청하려 하는데 곧 문이 다시 열리고 종리가 돌아왔다.
“잉?”
허칠안은 의아해하며 자신의 당혹스러움과 불만을 나타냈다.
종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어떤 몰상식한 자인지 모르겠지만 귤껍질을 복도에 버려두었더군. 내가 실수로 밟고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쳤네. 아무래도 방 안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네.”
‘귤껍질에도 미끄러질 수 있다고? 정말 처참하다…….’
허칠안은 문득 동정심이 가득 들었다.
* * *
이튿날, 동트기 전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허부. 숙모는 다크서클을 이고 허신년의 붓․먹․종이․벼루 등의 시험 물품과 시험장에서 먹을 떡, 만두, 육포, 물을 손수 챙겨 주었다.
“어머니, 먹을 거 이렇게 많이 챙길 필요 없어요. 하루에 시험을 하나만 치르니까 해질 무렵이면 나와요.”
허신년은 끊임없이 음식을 쑤셔 넣는 모친을 보더니 황급히 저지했다.
회시는 세 차례 시험을 보는데 하루에 한 과목만 시험 보고, 한 과목당 3일의 간격을 두고 9일에 걸쳐서 진행된다.
허평지는 적절하게 준비를 마친 뒤 아내와 딸 그리고 조카를 데리고 허신년을 공원(貢院)에 데려다주러 함께 나왔다.
허칠안과 허평지는 초롱불을 들고 앞뒤로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가족이 공원(貢院)에 도착했다. 공원(貢院) 밖은 시험에 응하는 서생들로 가득했고, 거리 양쪽에는 수십 명의 관병이 횃불을 높이 든 채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년, 이건 형이 지은 시니 읽어 본 뒤에 바로 태우거라.”
허칠안은 종잇조각 두 장을 건넸다.
허신년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서 아무렇지 않게 펼치고, 한참을 봤는데 하마터면 이해하지 못할 뻔했다……. 큰형이 쓴 글자, 더욱이 작은 글자는 남다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좋은 시다!’
하지만 허신년은 여전히 마음속으로 찬탄했다.
만약 정말 문제를 맞힐 수 있다면, 그도 장차 크게 빛을 발할 것이다.
허신년은 기억한 뒤 종잇조각을 찢어버렸다. 그가 가족들과 막 작별을 고하려는데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불호(佛號)를 읊는 소리가 들렸다.
허신년이 고개를 돌려 보니, 몸집이 크고 훤칠한 대머리가 양손을 합장하고 그를 향해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나 저 사람 알아……?’
허신년은 마음속에 의구심이 스쳤지만, 의례적인 미소로 답했다.
대머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떠났다.
* * *
숙모와 영월은 신년이 줄을 서서 공원(貢院)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저택에 돌아가서 잠을 보충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허영음은 계월루에 가서 아침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허영음의 제안은 모두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허칠안은 저택에 종리가 있음을 염두했다. 그는 좀 늦게 돌아갔다가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까 봐 두려웠다.
* * *
그들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 동녘이 희미해졌다.
허칠안이 방문을 밀치자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종리가 보였다. 머리를 풀어헤쳐 이목구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여인은 어쩜 늘 머리가 산발인 거지.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겠네……. 감정의 제자는 다 이상한 것 같다. 오히려 먹보 여동생이 가장 정상적이야…….’
허칠안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숨어 있을 필요 없습니다. 가족들에게 소개해도 돼요.”
“가족들에게 액운을 가져다 줄 것이네. 큰 골칫거리는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소소하게 폐를 끼칠 걸세.”
종리가 말했다.
“액운은 시시때때로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그들이 나의 존재를 몰라야 피할 수 있네.”
그럼 됐다.
묘시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허칠안은 잠시 토납할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가슴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서 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돌아설 수 있습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알겠네.”
종리는 순순하게 돌아서서 그와 등을 진 채로 좌선했다.
‘한 사람이 늘어나니까 역시 불편해…….’
허칠안은 그때서야 지서 파편을 꺼내고, 촛불의 힘을 빌려 전서를 읽었다.
[이: 나는 경성에 갈 계획이네.]
가장 먼저 이묘진에게 대답한 건 뜻밖에도 거의 문자를 보내지 않는 금련 도사였다.
[구: 비적 토벌이 끝난 건가?]
‘비적 토벌이 끝났다고? 그럼 춘 형 일행도 돌아올 때가 되었겠군…….’
허칠안은 속으로 기뻐했다.
[이: 그렇습니다, 금련 도사. 일호, 자네 아직 나에게 인종의 젊은 제자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았네.]
처음에 그녀가 운주 사건의 정보를 가지고 일호와 교환하여 일호에게서 이 시대의 걸출한 인종의 제자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 했지만, 일호는 어찌 된 일인지 한참 동안 기별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몇 분 뒤 일호의 전서가 뜨문뜨문 왔다.
[일: 이 시대 인종의 제자는 수련 경지가 높지 않네. 가장 높은 ‘정진(淨塵)’도 7품경에 불과하지만, 딱 한 사람 있네. 젊은 세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네.]
[이: 어떤 인물인가? 수련 경지는 무엇이지?]
[일: 이자는 지식인 출신으로 원경 27년에 장원에 급제했고, 원경 29년에 갑자기 관직에서 물러나 한낱 평민이 되었네. 그는 낙옥형의 사형 영운(靈韻) 도사의 스승이자 친구네. 영운 도사에게 인종의 검법과 심경(心經)을 전수받았지.
이자는 천부적인 재능이 아주 뛰어나네. 글을 버리고 검을 수련한 지 3년 만에 검심(劍心)을 통달하는 경지에 이르렀지. 이어 금라 장개태에게 도전했다가 참패한 뒤에 방랑을 떠났는데 위연에게 경성 제일의 검객이라 칭송받네. 그는 영운 도사와 사제의 이름으로 얽혀 있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사제 관계라서 인종의 제자에 포함되는지 아닌지 모르겠네.]
‘지식인 출신으로 글을 버리고 검을 수련하여 경성 제일의 검객이 되었고, 인종 도사와 실질적으로 사제 관계라……. 이 짙은 기시감은 어떻게 된 거지?’
허칠안은 어리둥절하여 침음하다가 한 사람을 떠올렸지만 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사: 허, 나는 이미 경성에 돌아왔네.]
‘역시 그자다. 금련도사 지금 판을 키우려는 건가? 천인 양종(兩宗)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 굳이 그들을 지서 파편에 함께 끌어들이려 하다니.’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미있어졌군. 사호와 이호가 경성에 싸우러 오다니……. 잠깐, 만약 이묘진만 경성에 오는 거라면 내가 대응할 자신이 있다. 어쨌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실은 탈태환으로 설명 가능하니까. 게다가 이묘진은 나처럼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적이 있으니 서로 크게 질척거리지 않을 것이다. 사호도 경성에 온다면…….’
허칠안의 안색이 변했다.
바로 이때, 오호도 뿅 나타났다.
[오: 참 공교롭군. 나도 내일 남강을 떠나 경성으로 가려하네. 내가 경성에 도착하면 함께 술이나 마시자고.]
“???”
‘뭐지? 왜 오호도 경성에 온다는 거야? 오호의 IQ로는 그녀가 하는 단독 행동에 사호와 이호가 틀림없이 마음이 놓이지 않을 텐데. 그때 가면 오프라인 정모 한 번 할 수밖에 없겠어. 게다가 나 역시 경성에 있고, 이묘진은 내 진짜 정체를 알고 있으니……. 안 되겠다. 이건 반드시 신년이 뒤집어써야 해!’
[일: 오호는 뭐하러 경성에 오는가?]
[오: 여행이네.]
이묘진이 놀란 감정을 억누르고 이야기에 끼었다.
[이: 오호, 고족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네. 대봉 사람들은 고족을 싫어하거든. 강호는 위험하네. 설령 자네가 곤경에 빠지더라도 관아에서 만약 자네가 고족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대부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네.]
산해관 전역이 있던 그해 남강 오랑캐와 북방 오랑캐가 동맹을 맺었고, 대봉과는 대립 진영이었다. 게다가 요 몇 년간 남강 오랑캐는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대봉의 국경을 자주 어지럽혔다.
양측 모두 쌓이고 쌓인 원한이 이미 케케묵었다고 할 만했다.
게다가 남강의 고족 역시 ‘남강 오랑캐’의 범위에 있다.
리나는 잠깐 고민해 보았는데, 자신은 독을 무서워하지 않고, 무력도 두려워하지 않아 별로 겁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호가 이렇게 열심히 일깨우니 그녀는 문자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오: 알겠네, 주의하겠네.]
이어 이묘진은 문자를 보냈다.
[이: 사호, 비록 우리가 모두 천지회의 구성원이지만 종파의 원한이 눈앞에 있으니 만나면 사정을 봐주지 않을 걸세.]
[사: 생사(生死)로서 책임질 것이네.]
‘그건…… 모두가 채팅 친구인데 이럴 필요는 없지 않나.’
허칠안은 속으로 말했다.
채팅 친구와 수다를 마친 허칠안은 지서 파편을 거두어들이고 고개를 들어 자신과 등을 지고 있는 종리를 쳐다봤다.
‘이 여인이 내게 가져다 준 액운 아니야……? 아무래도 감정을 찾아가서 반품하는 게 낫겠어…….’
* * *
어느 소원(小院) 안, 금련 도사는 지서 파편을 거두어들이고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서 단체 채팅방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복연(福緣)을 가진 자들이기에 그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손해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천인 간의 전쟁은 윗사람의 일이니 아랫사람들끼리는 생사를 가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이묘진의 고집과 사호의 기세로 봤을 때는 만약 개입하지 않는다면 정말 하나는 죽고 하나는 다칠지도 모르겠군. 나 지종은 천인의 전쟁에 개입하기 편치 않고, 육호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일호는 신분이 적당치 않으니…….
역시나 허칠안을 내세워서 적당히 구슬려 화해시켜야겠어. 그가 천인의 전쟁에 관여하게 해서 이묘진과 사호의 적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면 종파에도 설명할 건덕지가 생기고 더는 생사를 가릴 필요도 없어지니까. 하지만 그의 수련 경지가 좀 빈약해서 이묘진과 사호의 전투에 개입할 자격이 부족하단 말이지. 단기간 내에 동피철골로 들어서지 않는 이상.”
단기간 내에 동피철골에 이르기는 확실히 좀 힘들다.
금련도사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을 생각해도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날카로우면서도 가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다.
삽시간에 황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를 높이 치켜세우고 신나게 떠났다.
방 안, 금련도사는 점잖은 얼굴을 하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