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경성을 떠나다
허칠안은 향을 피우고 돌아온 뒤 내일 있을 연회의 경비로 백은 70냥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70냥은 이미 차고 넘쳤다. 보통 부유한 집에서 3년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한 저축액이자 2년간 기생집을 드나드는 데 쓰는 화대(花代)이자 지금 허칠안의 연봉이었다.
“돌아온 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아직 항원 대사의 양생당을 가지 않았군. 무의무탁자들을 도와줄 돈을 좀 보내야겠다…….”
허칠안은 네모난 궤짝에서 은 다섯 전(錢)을 들췄다. 항원의 신체 단련 공법(功法)에 저렴한 비용으로 무임승차하러 갈 계획이었다.
갑자기 침상 가장자리에 앉은 그의 머릿속에 신수 승려의 낮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경성을 떠나라.”
‘경성을 떠나라고?! 무슨 뜻이야…….’
허칠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신수 승려는 여태껏 자발적으로 그와 교류한 적이 없었다. 늘 아무 말 없이 몸속에서 깊은 잠을 잤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그에게 경성을 떠나라고 하다니.
‘경성에 큰일이 나려나? 아니면 내가 큰일 나려나?’
여러 가지 생각이 번뜩이는 가운데 그의 눈앞에 희뿌연 세계가 펼쳐졌다. 옅은 안개처럼 잿빛이 퍼지더니 오래되어 허름한 사찰이 나타났다. 사찰 입구에는 준수한 용모의 신수 대사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신비한 내력을 지닌 승려는 두 손을 합장한 채 좌선했다. 그는 갈색 눈으로 허칠안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희미하게 말했다.
“경성을 떠나게.”
* * *
허칠안은 운주에서 다시 살아 돌아오면서 공을 세웠고 자작위에 봉해져 임안과 회경과의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야경꾼 쪽에서는 위연 역시 그를 은라로 등용하기로 약속했다. 앞길, 재물운 그리고 어쩌면 애정 관계까지도 순조로웠다.
그는 몇 년만 더 지나면 공작(公爵)에 임명되고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인생의 전성기에 다다를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아주 가능성 있는 일이다.
경성은 자고로 번화하고 물자가 풍부하며 의료 수준과 사회 복지 등등 이 시대의 선두에 서 있는 곳이었다. 사람은 번화한 도시에 모이길 좋아하고 이는 허칠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해 그 역시 베이징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더랬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경성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사, 저를 난처하게 하시는 건가요……?’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사, 왜 경성을 떠나야 합니까?”
신수 승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느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방교(四方敎)가 곧 올 거란 걸 느낄 수 있네.”
‘사방교?’
허칠안은 넋을 놓고 있다가 신수 승려가 말한 게 서역의 불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맞다, 상백 사건 때 신수 대사가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고 청룡사의 반수 승려가 즉시 절을 떠나 서역으로 갔지……. 이렇게 보면 불문 사람이 와서 잘못을 따지려는 건가? 그래서 신수가 나보고 경성을 떠나라고 한 거군. 만일 신수 승려가 내 몸속에 있다는 사실을 서방의 대머리가 발견하면 나는 정말 오지산(五指山)에 오백 년 동안 억압당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손오공의 거칠고 단단한 정해신침(*定海神針: 여의봉)이 없으니 반항할 기회조차도 없다.’
“그래서 저더러 경성을 잠시 떠나 있으라고요?”
허칠안의 얼굴에는 약간 걱정이 서려 있었다.
신수 승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희는 지금 한 줄에 묶인 메뚜기니까요. 참, 대사, 불문에 신체와 정신을 단련할 필요 없이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으로 수련할 수 있는 신기한 신체 단련 법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까?”
서둘러 먼저 장점을 가로챘다.
신수 승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낱 잔혼일 뿐이네.”
‘네가 잔혼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고, 네가 공짜로 내 덕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건 알지…….’
허칠안이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옅은 안개가 한데 합쳐져 낡고 허름한 사찰을 감싸더니 점점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다……. 허칠안은 눈을 뜨고 방으로 돌아와 침상 머리맡에 정자세로 앉았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겠다. 서역 불문은 신수 승려 때문에 오는 것이다. 이미 한 달이 넘게 지났으니 그들은 기껏해야 권종이나 좀 보면서 사건의 경위를 알아보겠지. 경성에 아주 오래 머무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잠시 동안만 경성을 떠나 있으면 된다. 아주 금방 돌아올 수도 있다.”
허칠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그도 받아들일 수 있다. 휴가인 셈 치고 좀 쉬면 된다. 풍요로운 도시에 가서 부자들의 무미건조한 삶을 며칠 동안 살아 보자.
“오히려 휴가계를 쓰기가 어렵겠다. 아무런 이유 없이 경성을 떠난다고 하면 관아에서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위연도 나를 손에서 놓지 못하니 말이다. 세계가 이렇게 넓으니 좀 보러 가고 싶다고 하면……. 분명히 반박당할 것이다. 위 씨는 내 드립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참, 금련도사를 찾아가 상의해 봐야겠다. 그에게 아무렇게나 이유를 하나 생각해달라고 해야지. 예를 들면 지서 단체 채팅방의 어떤 놈한테 문제가 생겨 내 지원이 필요하다든가…….”
허칠안은 금련도사를 찾아가 상의할 계획이었다. 자신이 한동안 경성을 떠나고 싶은데 야경꾼 관아의 제도가 아주 엄격해서 공연히 경성을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위연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는 게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더 있다. 예를 들면 내일 술자리에 참석한다거나 옥졸에게 그 부부를 잘 감시하라고 당부해야 한다거나. 신년이 춘시 이후에 경성에 남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렸다.
그리고 또 예를 들면 진 귀비에게 어떻게 보복할 작정인지 위연을 슬쩍 떠보는 것도 있다.
복비 사건이 마무리되었으니 어렵사리 앙금이 풀린 셈이라 할 수 있었지만, 위연은 진 귀비 배후의 세력을 조사할 것이다. 틀림없이 후속 조취를 취할 터였다.
게다가 황후는 유일한 친동생을 잃었으니 아마도 더 이상은 모든 일에 담담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원경제의 내궁에는 필연코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닥치리라.
허칠안이 관심을 갖는 문제는 그녀들 사이의 전쟁의 불길이 어느 정도로 격렬해질 것인가였다. 그는 진 귀비가 죽었다거나 황후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경성에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다면 임안과 회경은 물과 기름처럼 자매 관계가 틀어질 것이다.
세 사람과 함께 대명호반을 걷는, 허 색마의 아름다운 꿈이 거의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때 하인 한 명이 문밖으로 와 소리쳤다.
“칠안, 사천감의 채미 소저가 찾아오셨습니다.”
‘그녀가 뭐 하러 온 거지?’
허칠안은 대답했다.
“알겠네. 나는 조금 이따 갈 테니 숙모에게 먼저 그녀를 응대하라고 하게.”
그는 일기, 은자 등 개인적인 물건을 지서 파편에 넣고, 경성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고선 빛을 보면 안 되는 물품을 누락하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에야 한시름 놓고 저채미를 만나러 문을 나섰다.
* * *
거실 안, 저채미는 손에 든 말굽떡을 재빨리 입으로 쑤셔 넣었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 음식을 뺏어 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참 게걸스럽게 먹었다.
확실히 누군가 그녀의 음식을 뺏어 먹긴 했다. 그녀 맞은편에 선 허영음은 손에 든 말굽떡을 재빨리 입으로 쑤셔 넣었다. 그녀가 게걸스럽게 먹는 이유는 저채미의 음식을 뺏어 먹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고여덟 가지의 떡이 놓여 있었다. 떡은 종류도 다양했고 양도 적지 않았다.
저채미는 오늘 음식 한 봉지를 들고 허부에 왔다. 그녀가 먹으면서 허칠안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조그마한 아이가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눈이 빠지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왕눈이 미인은 그녀를 기억했다. 그녀는 허칠안의 여동생으로 아주 잘 먹고 식탐이 많은 아이였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직접 가져가렴. 언니한테 많이 있으니…….”
저채미는 자신이 이렇게 말한 걸로 기억한다.
맨 처음에 큰 먹보와 작은 먹보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음식을 먹으며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먹다 보니 저채미는 문득 이 계집애가 자기보다 빠르게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안 되겠다. 너무 손해다. 나도 좀 빨리 먹어야겠어.’
허영음이 보니 이 언니가 갑자기 빨리 먹기 시작했다.
‘내 걸 뺏어 먹으려는 거잖아. 안 돼. 너무 손해야. 좀 더 빨리 먹어야겠어.’
그들은 먹는 내내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았지만, 먹보 사이의 전쟁은 아주 빠르게 열띤 상태로 접어들었다.
전쟁의 시작부터 절정에 이르기까지 두 글자로 대략 형상화할 수 있다. 우걱, 우걱우걱, 우걱우걱우걱, 우걱우걱우걱우걱…….
허칠안은 안채에 와 이 광경을 보자 깜짝 놀라 멍해졌다.
“저기요, 그렇게 드시면 안 되죠.”
허칠안은 콩알이의 포동포동한 배를 보더니, 그녀를 한쪽으로 둘러업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숙모는?”
숙모는 안채에 없었다. 아마 내일 있을 연회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선 절대로 콩알이가 이렇게 먹게 놔둘 리 없었다.
“큰 오라버니, 큰 오라버니. 말굽떡 정말 맛있어요…….”
허영음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아주 마음이 급하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언니는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조각이나 더 먹었다.
“먹어도 안 죽어.”
허칠안은 탁자 위의 떡을 가리키더니 언짢아하며 말했다.
“얼른 집어넣으세요, 얼른……. 채미 소저, 무슨 일로 온 겁니까?”
그가 짐작하기에 저채미는 자신과 놀려고 찾아온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살아난 후에 복비 사건을 조사하느라 바빠서 그녀와 만나지 않은 지 5일이 되었다.
‘내 얼굴은 지금 전성기니, 그녀가 내 미색을 마음에 두어도 이상하지는 않지…….’
허칠안은 웃었다.
“스승님께서 너를 관성루에 손님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저채미는 말하면서 찻잔을 받쳐 들고 한 입 마셨다. 그런 다음 그녀는 남은 떡을 다시 싸서 허리춤의 사슴 가죽 소포에 넣었다.
‘감정이 나를 관성루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라…….’
허칠안은 은근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허칠안은 감정의 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감정은 그의 수가 무엇인지 환히 알고 있을 테니까.
* * *
두 사람은 허부를 함께 나와 각자 말에 올라타고 관성루로 향했다.
“그 떡들 오사저가 내게 사달라고 부탁한 건데 결국 네 여동생이 절반이나 먹어치웠어.”
저채미는 말고삐를 움켜쥐고 전방을 주시하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허칠안 네가 나한테 은자를 배상해야겠어.”
“돈 얘기를 하면 감정이 상하는 법이오. 우리 사이의 감정은 은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잖소이까.”
허칠안이 말의 배를 껴안고 말했다.
“감정 대인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이랴이랴…….”
‘말아, 빨리 좀 달려라.’
* * *
그들은 사천감에 도착했다. 허칠안은 떡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셈 치고, 저채미를 기다리는 대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주 익숙하게 건물로 들어갔다.
“잉? 오늘 사천감이 왜 이렇게 썰렁하지?”
1층 대당은 텅 비어 있었다. 의사 몇 명만이 드문드문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표정도 좀 이상했다.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괴물이 있을까 봐 두려운 듯 시시때때로 계단 입구를 쳐다봤다.
허칠안의 말을 듣자 입구의 한 백의 의사가 대답했다.
“허 공자, 그들 모두 의관(醫館)에 진료하러 갔네.”
“오늘 무슨 날인가?”
허칠안이 물었다.
백의 의사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