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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298화 (298/712)

298화. 백의 술사

허평지는 마치 인생의 절반을 걸어온 사람처럼 안뜰에서 바깥뜰로 걸어갔다. 이때의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 불안, 흥분, 망설임, 두려움……. 그는 유사한 감정을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바로 신혼 첫날밤이었다.

저 멀리 망포를 입은 태감이 뜰 가운데 서 있고, 갑옷을 입은 시위들이 양옆으로 나뉘어져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태감은 거지덩굴이 수놓인 노란색 비단의 성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쿵쿵쿵…….

허평지는 북을 치는 듯 울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성지의 주인이 다가오자 황명을 전하는 태감이 천천히 성지를 펼치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동라 허칠안은 황명을 받으시오!”

숙부는 솔선수범하여 무릎을 꿇은 뒤 허칠안을 끌어당겨 같이 무릎 꿇게 했다.

허평지는 눈을 부릅뜨고 조카를 노려보았다. 성지 앞에서도 이 자식이 떨떠름하게 무릎을 꿇다니!

“동라 허칠안 여기 있습니다.”

태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명을 받들어 황제 폐하 가라사대, 짐은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 문(文)으로써 반란을 평정하고, 무(武)로써 군을 통솔한 참된 조정의 지주다. 이 나라의 군인…… 허칠안은 연달아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고, 운주에서 반란군 이백 명의 목을 베니…….”

허칠안은 반란군 이백 명의 목을 베었다는 말을 듣자 어리둥절하며 속으로 말했다.

‘내가 수천 명의 목을 베었는데 어째 이백 명으로 둔갑한 거지?’

그러다 그는 허세를 너무 많이 떨다 보니 자신조차 그렇게 믿어 버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허칠안을 장락현자에 특별히 봉하고, 양전(良田) 30경(頃), 황금 오백 냥을 하사한다. 이상.”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허칠안은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더니 일어나서 성지를 받들었다.

“축하하네, 허 대인……. 아, 허 현자.”

망포 태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공공.”

허칠안은 성지를 받는 김에 은표 백냥 한 장을 건넸다.

허평지는 망포 태감이 시위를 데리고 가기를 기다렸다가 날쌔게 성지를 빼앗아 한참을 반복해서 보았다. 분명 몇 글자 읽지도 못하면서 아주 진지하게 보았다.

보다가 허평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봉작됐어, 봉작……. 우리 허씨 집안에 자작이 나오다니.”

그는 성지를 받쳐 들고 뒤뜰로 달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부인, 허씨 가족들에게 얼른 서신을 쓰시오. 허씨 집안에 자작이 나왔소. 3박 3일 동안 거하게 연회를 베풀어야겠소. 하하하하하…….”

허칠안은 원경제가 하사한 황금과 토지 증서 상자를 껴안고 몰래 방으로 돌아갔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숙부한테 어찌 황금보다 성지가 중요하겠는가!

* * *

허칠안이 황금을 지서 파편에 넣어둔 다음 안뜰로 돌아가니 서로 성지를 빼앗으려 하는 허평지와 신년이 보였다. 부자 둘은 하마터면 싸울 뻔했다.

허신년이 불쾌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버지께 성지를 준 줄 알겠어요.”

“꺼지거라!”

허신년이 좀 화를 냈다.

“저는 그냥 성지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 보고 싶을 뿐이라고요.”

허평지가 말했다.

“꺼져!”

허신년은 화를 내며 말했다.

“아버지, 성지 좀 한번 볼게요.”

허평지가 말했다.

“꺼지라니까.”

‘퉤, 야비한 무사 같으니라고…….’

허신년이 옷소매를 뿌리치고 공부하러 서재로 돌아갔다.

자작이 뭐라고. 그는 장원으로 급제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선 집안의 위세는 전부 형에게 다 빼앗길 게 분명했다.

“정, 정말 작위에 봉해졌니?”

숙모는 남편 품에 있는 성지를 보면서 고라파덕처럼 큰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거짓일 수 있겠소? 위에 옥새까지 찍혀 있는데 말이오. 게다가 폐하께서 황금 500냥과 양전 30경을 하사하지 않았소.”

허평지는 마치 다른 사람이 믿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황금 500냥과 양전 30경이라…….’

숙모의 눈에 금빛이 스쳤다.

“칠안, 이게 정말이니? 숙모는 어째 꿈속에 있는 것 같구나.”

숙모가 허칠안의 손을 잡아당겼다.

허칠안은 뿌리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부인, 친한 척하지 마시지요. 자작 대인이라 부르시지요.”

한편, 허영월은 숭배하는 얼굴로 큰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허칠안은 숙모의 화를 돋운 뒤 손을 품속에 집어넣어, 토지 문서를 탁자 위로 꺼내고선 말했다.

“황금은 제가 챙겼고요, 이 양전 30경은, 숙모, 제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으니까 번거롭겠지만…… 영월이 큰 오라버니 대신 관리해 주렴.”

반쯤 내민 숙모의 손이 굳었다. 숙모는 허칠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허평지…….”

숙모는 허칠안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어서, 그 화살을 남편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허평지는 ‘허’하고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칠안이 당신에게 얘기한 것이오. 영월은 그런 걸 알지도 못하지 않소.”

허영월이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몇 년 동안 공부했고, 산수도 잘 알아요.”

게다가 경작지는 보통 저택에서 믿을 만한 하인들을 심주름시켜 관리한다. 주인은 장부를 관리하기만 하면 된다.

숙모는 갑자기 위기의식을 느꼈다.

예전에 그녀 상상 속의 적은 칠안과 신년의 며느리였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에서야 허영월 이 못된 계집애가 뜻밖에 반기를 들고, 어머니인 자신과 권력을 다투려 한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 왜 저를 그렇게 보세요?”

허영월은 모친의 시선이 따가웠다.

“나는 너를 보는 게 아니라 배은망덕한 자식을 보고 있단다.”

“…….”

* * *

관성루 건축물에 관해 얘기해 보자. 경성, 더 나아가 대봉 각지의 인사는 관성루를 떠올리면 두 글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높다!

강호 사람들 눈에는 구름 속으로 높이 솟은 것 말고 관성루는 대봉의 금기 지역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곳에 황조의 유일한 1품 강자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관성루 밑이 어떤 장소인지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이다.

끼기긱…….

어두컴컴한 밑바닥에서 철문이 천천히 솟아올랐고, 구불구불한 돌계단이 밑바닥을 향해 펼쳐졌다. 계단 열 개마다 담벼락에 희미한 빛을 내뿜는 등잔불이 있었다.

타박타박…….

적막한 공기 속에서 또렷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점점 또렷해지더니 밑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왔다.

검은 그림자는 머리를 풀어헤쳐 뺨을 가리고, 연갈색의 간결하면서도 긴 도포를 걸친 채 맨발을 하고 있었다. 걸을 때 이따금 두드러져 보이는 가슴은 그녀가 여인임을 알려 주었다.

“4품 진법사까지는 아직 좀 멀었는데 스승님께서는 왜 나를 깨우셨지…….”

검은 그림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계단 끝, 문밖의 조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빛줄기를 보았다. 오랜만의 햇살이었다.

철문을 밟고 나온 검은 그림자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대청 안에 서서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벌리고 햇살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감정 선생에 의해 관성루 밑에 억압당해 5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 * *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1층의 복도를 지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2층에 이르자 쿵쿵쿵…… 머리 꼭대기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잡다한 용기를 올려놓은 쟁반을 든 백의 술사 한 명이 걸어 내려왔다.

백의 술사는 몸이 갑자기 확 굳었고, 표정도 점점 창백해져 갔다. 그는 마치 극도로 무서운 무언가를 본 듯했다.

삼, 사 초가 흘렀을까. 백의 술사는 돌아서서 허둥지둥 도망갔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은 좋은 뜻으로 황급히 일깨웠다.

“사제님,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가게.”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백의 술사의 발바닥이 갑자기 미끄러지더니,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그러다 여인과 부딪치고 두 사람이 함께 데굴데굴 아래층으로 굴러갔다.

쾅쾅……!

쟁반에 있던 잡다한 용기들이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오색찬란한 먼지가 자욱하게 퍼졌다.

“살, 살려 주세요…….”

백의 술사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더니 점점 검푸른색으로 변해 갔다. 그는 자신의 목을 조르며 힘겹게 말했다.

“이, 이건, 송경 사형이, 제, 제련한 독약이에요…….”

여인은 자신의 목을 감싼 채 힘겹게 말했다.

“이 사저(師姐)한테는 해독약이 없는데.”

“해독약은 안에 있습니다…….”

백의 술사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떨어져 깨진 어느 도자기 병과 가루약을 필사적으로 쳐다보았다.

몇 분 뒤, 백의 술사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 해독약을 먹었고, 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1층 대당에 이르자 약을 끓이고 제련하는 백의 술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종(鐘) 사저가 나왔다!!!”

콰당……. 백의 술사들 손에 들린 도자기 병과 국자 등의 도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뻣뻣하게 목을 비틀어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 * *

한편,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은 계속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7층을 지나는데 7층 연단실에서 ‘쾅’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바닥과 벽이 흔들리면서 재가 사르르 떨어졌다.

“왜 폭발한 거야? 왜?!”

송경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 * *

흰옷에 흰 수염을 한 비범한 풍채의 감정이 탁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뒤 술잔을 쥐고 멍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

공손히 부른 여인은 탁자 위의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로 시선을 옮겼다.

“종리(鐘璃), 자네가 4품으로 승직할 계기가 생겼네.”

감정이 여유롭게 말했다.

순간 몸이 떨린 여인이 살짝 고개를 들자 하얗고 날카로운 아래턱이 보였다.

* * *

대봉에서 성씨가 다른 작위는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男) 이렇게 다섯 종류로 나뉜다. 또 모든 작위마다 다섯 가지 품계(등급)로 나뉜다.

허칠안 작위의 전체 명칭은 ‘3등 장락현자’다.

높은 사람과 비교하자면 많이 부족하지만, 낮은 사람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은 편인 작위다. 별다른 실권 없이 녹봉이 더 늘 뿐이다.

하지만 작위의 의미는 결코 권력에 있지 않다. 그가 상징하는 영예와 사회적인 지위에 있다.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의 서열이 오르면 훈귀란 말인가? 아니다. 이런 권세는 단지 한순간이다. 진정으로 평민에서 벗어나 귀족 계층에 들어섰다는 상징은 변함없이 세습되는 작위다.

물론 허칠안의 작위가 변함없이 세습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존재하는 한 허씨 집안은 평민이 아니라 귀족으로 있을 수 있다.

앞으로 장락현자가 만약 평민 여인을 본처로 맞으면 급사중이 그를 탄핵하는 접본을 올릴 것이다. 모든 조정의 문무백관은 말할 것이다. 공주가 인기가 없는 것인가? 군주가 예쁘지 않은 것인가?

평민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다니.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허씨 집안에서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자작이 나왔고 이로써 완벽하게 백성에서 벗어나 귀족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한 집안의 기둥인 허평지에게는 아마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는 그날 바로 허칠안을 데리고 조상의 묘에 가서 향을 피웠다.

그는 돌아온 뒤엔 초대장을 널리 뿌리고 나서 연회를 크게 베풀어 친지와 친구를 저택에 초대해 술을 마시며 축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숙모가 부적절하다며 말했다.

“모레가 춘시예요. 이러면 신년이 공부하는 데 영향을 미칠 거라고요.”

그렇다. 모레가 바로 춘시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으뜸 대사인데 집에서 연회를 크게 베풀면 신년이 공부하는 데 틀림없이 영향을 미칠 터였다. 허평지는 아내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하여 허신년에게 외성에 있는 옛 저택으로 옮겨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다. 연회는 변함없이 진행할 예정이었다.

허영음도 좋다고 생각했다.

허신년은 불만을 토로하며 방에서 나와 하인 한 명과 여종 한 명을 데리고 엉덩이를 뒤뚱대며 옛 저택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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