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가문을 빛내다
이쪽의 조회가 막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늙은 태감이 각각 봉서궁과 경수궁에 황명을 전달하러 갔다.
황후는 그 사실을 알고 탁자에 엎드려 목 놓아 울었다.
진 귀비는 굳은 얼굴로 황명을 받들었다. 그녀는 늙은 태감이 가자마자 탁자 위의 장식품 그리고 성지마저 모조리 땅으로 쓸어 버렸다.
와당탕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 귀비의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단정한 계란형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내뱉었다.
“위연…….”
그리고 주먹을 쥔 채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허칠안!”
이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폐하의 태도가 크게 변한 건 틀림없이 어제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어제 늙은 태감이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왔다. 이건 본래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오늘 조당의 변화와 연관 지어 보면 그 가운데 현묘한 이치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폐하는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허칠안에게만 실체를 털어놓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그 뻔뻔한 자식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고생스럽게 꾸민 계략이 일개 동라 손에 실패했다.
몇 분 뒤, 와당탕탕 하는 소리가 방 안에서 또다시 들려왔고, 뜰 안의 궁녀와 당차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복비 사건이 마무리된 이튿날, 허칠안은 드디어 아끼는 말을 되찾았다.
운명이 기구한 말이다. 작은 생명을 막 되찾은 그 날, 주인에게 쫓겨난 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다가 성을 순찰하는 어도위의 눈에 들었다.
어도위는 말 엉덩이에 있는 날인을 보자마자 속으로 ‘우리 말 아니야?’ 하면서 위영(衛營)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말은 확실히 어도위 전용의 군마로 숙부가 자신의 관계를 이용해 저렴한 값을 주고 손에 넣었더랬다. 그는 말을 사 온 뒤에 몇 년 타지 않고, 조카에게 선물했다.
그 후, 야경꾼 관아는 그날 당직을 서던 그 지역의 어도위를 통해 말 한 필을 ‘주웠다’는 얘기를 듣고, 실마리를 좇아 허칠안이 아끼는 암말을 되찾았다.
그날 오전, 허칠안은 가족들과 함께 대청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콩알이는 오늘 방학이었다. 학당을 갈 필요가 없는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침밥을 두 배로 맛있게 먹었다.
“하루 방학인데 보물을 주운 것처럼 굴다니. 내 평생 너처럼 둔한 딸을 낳아 본 적이 없구나.”
숙모가 불쾌해하며 말했다.
“당신은 그래 봤자 딸 둘뿐이잖소.”
허평지는 어린 딸을 대신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숙모와 대놓고 말다툼을 할 엄두는 나지 않아 은근히 맞부딪칠 뿐이었다.
“그런 말 할 염치는 있고요? 영음이 이렇게 멍청한 건 다 나리를 닮아서예요.”
아니나 다를까, 숙모는 했던 말을 또 하며 허영음이 철이 없는 건 숙부 때문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저는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요.”
허영음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영음아, 너는 멍청하지 않아. 네 어머니가 하는 헛소리를 듣지 말렴.”
허칠안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전생의 선생님이 지도하던 방법을 떠올렸다.
“나중에 공부하기 싫을 때 네 머릿속에 두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렴…….”
“잉? 내 머릿속에 사람이 있어요?”
허영음은 깜짝 놀라며 통통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상상, 큰 오라버니가 상상하라고 말했잖니?”
허칠안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상냥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한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하면, 다른 한 아이가 말할 거야. 나는 공부를 좋아해, 나는 공부를 좋아해.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너는 공부가 좋아질 거야.”
“자기 암시!”
허신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평가했다.
“효과가 좋지요. 제가 예전에 등불에 심지를 돋우고 열심히 공부하다가 너무 졸릴 때면 스스로 자고 싶지 않다고 암시했더니 효과가 괜찮더라고요.”
숙모는 자신의 친아들이 보장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조카의 방법에 기대가 생겼다.
“영음, 한번 해 볼래?”
맹한 허영음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니?”
숙모는 재빨리 물었다. 사실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자식은 어린 딸이었다.
“제 머릿속에 있는 아이가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하고 하니까 다른 아이가 좋다고 말했어요.”
“…….”
숙모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공부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어요. 숙모도 강요하지 마세요.”
허칠안이 위로했다.
“모레면 춘시구나.”
숙부가 갑자기 말했다.
“네!”
허신년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숙모는 즉시 아들에게 삶은 달걀을 까 주며 말했다.
“우리 신년이의 학식으로는 진사 합격도 문제없지. 나리, 허씨 가문이 빛날 시기가 왔어요.”
물론 허칠안이 위연의 총애를 받고 또 공주와 연이 닿았지만, 그는 필경 무사다.
모든 것이 다 하찮고, 학문 정진만이 고상한 이 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이 가문을 빛내는 일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선 큰 오라버니 편인 허영월도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허영월은 허씨 집안을 빛내는 일은 둘째 오라버니가 춘시에서 발휘하는 실력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둘째 오라버니, 저희 허씨 집안이 사대부 계층에 오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라버니에게 달렸어요.”
허신년은 거만하게 아래턱을 치켜올렸다.
‘열받아 죽겠네. 무사는 언제쯤 일어설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대접받을 수는 있을까? 곳곳이 무사에 대한 경멸로 가득하구먼…….’
허칠안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는 그저께 위연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무사 체계는 대를 거듭하며 체계를 보완하고 전승하여 지금의 9품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무사 체계는 결코 정점에 이르지 못했다.
품계를 넘어선 길은 여전히 모색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사 체계는 무신(武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치대로라면 당치 않다. 무사 체계를 밟는 사람이 가장 많다. 방대한 기준량이 있으니 언젠가는 도약할 것이다. 대대로 조금씩 쌓아 가면 무신을 배출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 됐다. 이 문제를 고려하기엔 아직 너무 일러. 내 평생 4품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기쁠 것 같다.’
* * *
숙부가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투구를 품고 패도를 찬 뒤 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잠시만요. 숙부께서는 집안의 어른이시니 오늘 집에 남으셔야 해요.”
허칠안이 그를 불러 세웠다.
허평지가 망연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늘 무슨 기념일이오?”
숙모가 고개를 저었다.
허영월과 허신년도 멍하니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허칠안은 숙모를 쳐다보면서 자랑스럽게 아래턱을 치켜올렸다.
“오늘 무슨 기념일은 아니지만, 허씨 가문이 빛나는 날이에요.”
“가문이 빛난다고?”
숙모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속으로 올해 과거에 급제한다고 해도 한두 달 뒤의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잘난 체하는 조카의 표정을 보고 그때서야 그가 허풍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숙모는 아름다운 눈을 희번덕이며 입을 삐죽거렸다.
“우쭈쭈, 우리 대공자께서 직위가 오르고 작위가 높아졌나 보군요?”
허칠안은 숙모가 입을 열자마자 비꼬는 말임을 알았다.
“이웃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지식인이어야만 조정의 자리 하나 꿰찰 수 있다던데. 네가 아무리 출세해 봤자 야경꾼 아니니.”
비록 숙모가 점점 마음의 담을 허물어 예전처럼 그렇게 원망이 깊지는 않지만, ‘조카와 아들 중에 누가 더 잘났는지’에 관한 주제라면 숙모는 자신이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 허평지처럼 아들과 조카 모두 허씨 집안의 새끼로, 집에서 20년을 키웠으니 친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숙모는 허칠안이 거들먹거리는 꼴이 못마땅했다. 그녀는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제 앞에서 깐족거리는 게 숙모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공자가 반드시 대공자보다 잘나가야 숙모가 조카 앞에서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숙모, 믿지 않으시는 거예요?”
허칠안이 눈을 흘겼다.
“믿는다. 승직한 거 아니니.”
숙모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마 전에 허평지도 관직이 올랐다. 그는 외성에서 내성으로 발령받아 고정적인 순찰 구역이 생겼다. 그 구역은 부호들만 사는 곳으로 그들은 가정의 안녕을 위해 주변의 안전을 책임지는 어도위에게 돈을 쓰고 물건을 바치며 관계를 잘 다지곤 했다.
그래서 숙부는 최근에 비상금이 아주 많아졌다. 숙부는 은자 오십 냥을 몰수당했지만 여전히 교방사에 놀러 갈 은자가 있었다.
물론 허평지는 사실 지금껏 교방사에 자진해서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교방사의 낭자와 숙모는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무릇 교방사에서 밤을 지새우는 건 동료 간의 접대 때문이었다.
오히려 허칠안과 허신년은 여자를 탐할 나이가 됐는데도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으니 스트레스를 해소하러 자발적으로 교방사에 가곤 했다.
“승직이 아니라 작위를 받는 거예요!”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피식…….”
숙모는 허칠안의 말이 웃겨서 웃었다. 그녀가 들썩들썩 웃는 모습은 황홀했다.
“에이, 헛소리하지 말아라.”
허평지가 손을 내저으며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해 산해관에서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무찌르고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온몸을 피로 목욕할 만큼 적의 목을 베었는데도 작위 부여는 꿈도 꿀 수 없더구나.”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목을 베었다니. 팔이 쑤시지 않던가요……?’
허칠안이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허신년은 고개를 저었다.
“봉작(封爵)은 중대한 일입니다. 대봉의 가장 마지막 봉작이 20년 전 산해관전역 때지요. 지금은 천하가 무사태평한데 어디서 생긴 전공(戰功)으로 형님에게 작위를 주겠어요.”
“봉작이 반드시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 받는 건 아니야.”
허칠안이 콩알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지, 영음?”
콩알이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작은 입을 밥그릇 가장자리에 댄 채 조르륵조르륵 죽을 먹었다.
“됐다, 됐어. 네 주제를 숙모가 모르겠니?”
숙모는 비웃으며 말했다.
“너 오늘 휴가가 아니라면 얼른 관아에 가거라. 곧 묘시가 지나니 네 숙부의 묘시 점호를 지체하지 말고. 칠안 너는 가문을 빛내는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올해 춘시가 끝나면 우리 허씨 집안에 진사가 한 명 나올 테니까. 그때 가면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가족들을 불러 한 끼 함께 하자꾸나.”
춘시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숙모는 이미 거만해졌다.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는 시작이다. 숙부는 편파적이고, 숙모는 매몰차고, 사촌 동생은 지식인이지만, 여러 방면으로 나를 기죽이고, 여동생 하나는 나를 무시하고, 또 다른 여동생은 내 먹을 걸 빼앗고……. 그러다가 전쟁의 신이 돌아와 강력한 작위를 부여받으면 숙부와 숙모 한 가족을 개집으로 내쫓아야지…….’
허칠안은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아주 통쾌했다.
허평지는 다시 투구를 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다. 나는 묘시 점호하러 가야겠구나.”
작위 부여에 관한 일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다들 조카가 농담한 셈 쳤다.
허씨 집안에 훈귀가 한 명 나올 수 있다면, 정말이지 조상의 무덤에서 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올 일이다. 설령 신년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에 합격한다 해도 칠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년이는 기세 드높은 문신이니까.
바로 이때, 허평지는 황급히 달려오는 문지기 장씨를 보았다. 그의 당황한 표정만 보면 마치 뒤에 쫓아오는 호랑이가 있는 듯했다.
“나나나나나나나리……!”
문지기 장씨가 말을 더듬으며 흥분하였다.
“성지가 내려왔습니다!”
“성 뭐라고?”
허평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성지요.”
“무슨 성?”
허신년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성지요, 작위를 봉한다는 성지 말입니다.”
허칠안은 멍한 눈빛의 숙모를 쳐다보더니 숙부를 밖으로 밀치고 나갔다.
“폐하께서 내린 성지가 왔대요.”
어제 복비 사건이 끝나고 위연이 그에게 말했다. 내각에서 이미 작위를 부여한다는 성지를 입안하였고, 오늘 결정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