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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296화 (296/712)

296화. 강등되다

늙은 태감은 시위 한 대오를 거느리고 석양빛을 받으며 겹겹이 쌓인 궁의 담을 지나 경수궁에 도착했다.

문지기 환관은 멀리서부터 폐하 곁의 태감인 걸 알아차리고 마중 나가선 말했다.

“공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노비가 귀비마마께 전달하러 가겠습니다…….”

“시간이 없네.”

늙은 태감은 그의 뺨을 한 대 갈기더니 시위를 데리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가 바깥뜰을 지나자 안뜰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태감은 안뜰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귀비마마, 노비가 뵙기를 청합니다.”

진 귀비의 방 안에서 눈시울이 좀 붉어진 궁녀가 걸어 나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서 들라 하십니다.”

늙은 태감은 궁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진 귀비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손에 비단 손수건을 쥐고 이따금 눈물을 닦았다.

“마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늙은 태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본궁 곁의 하인이 갑자기 병에 걸리더니 방금 떠났네. 태의가 살려내지 못했어.”

진 귀비가 슬퍼하며 말했다.

“그…….”

늙은 태감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마마,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 궁녀의 이름이 무엇인지요?”

“랑아네.”

“!!!”

늙은 태감의 표정이 굳어졌다.

“태감이 우리 경수궁에는 어쩐 일로 온 것인가?”

진 귀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태감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마마를 위로해 드리라며 노비를 보내셨습니다. 그동안 마마께서 불안에 떨고 계셨다는 걸 폐하께서도 잘 아십니다.”

진 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신첩을 보러 오시는 것조차 하지 못하신단 말인가?”

늙은 태감은 억지로 웃을 뿐 귀비의 불평에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귀비와 몇 마디 잡담을 나누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랑아는 나이가 많지 않지요?”

랑아는 비록 경수궁 고참이지만, 원경제가 10~20년간 후궁을 임행한 적이 없기에 늙은 태감은 불행하게도 요절한 이 수행 궁녀에 대해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가여운 아이네.”

진 귀비가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늙은 태감은 여세를 몰아 물었다.

“저희가 좀 보러 가겠습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신분이 있다. 바로 황궁의 환관과 궁녀를 통솔하는 내무부 총관(總管)이다. 하지만 이 신분은 원경제 가장 측근의 태감으로서 자연스레 맡은 이름뿐인 직함이다.

부총관(副總管)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자이다.

어쨌거나 내무부 총관은 사무가 바빠 시시각각 황제 곁에서 시중들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 * *

늙은 태감은 진 귀비와 작별한 뒤, 궁녀의 안내를 받아 남쪽에 있는 별채에 들어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창백한 랑아를 보았다.

“태의를 모셔와 살펴보았는가?”

“공공께 아룁니다. 살펴보셨는데 태의께서 말씀하시길 뇌졸중이라 살릴 약이 없다고 합니다.”

늙은 태감은 랑아를 한참 동안 주시하더니 분부했다.

“우리에게 넘기게.”

그는 시위에게 랑아의 시체를 옮기라고 명령한 뒤 보고하러 황급히 돌아갔다.

그가 원경제의 침전으로 돌아오니, 늙은 황제는 여전히 밝은 노란색의 비단을 깐 큰 탁자에 단정하게 앉아 무표정으로 대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늙은 태감이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걸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폐하, 랑아가 죽었습니다…….”

늙은 태감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 원경제는 ‘응’하고 대답했다. 원경제는 권력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30년이나 내려다본 터라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 * *

이튿날, 원경제는 다시 조회를 열었다. 문무백관은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질서정연하게 오문으로 들어섰다. 일부는 금란전 밖의 광장에 멈추었으며 일부는 금란전 밖의 한백옥 계단에 섰다.

아주 극소수만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이야기꾼은 일제히 이들을 ‘조당의 무위도식하는 대감님네들’이라 칭한다.

군신들이 대전에 들어온 뒤 원경제는 일각 늦게 뒤쪽에서 걸어 나와 그만의 용평상에 앉았다.

군신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답신한 후에 형부상서가 대열에서 나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삼법사가 이미 사실 확인을 마쳤사옵니다. 황후께서는 확실히 복비 사건의 주모자이십니다. 상관 씨는 직위에 걸맞은 덕을 갖추지 아니하고 비(妃)를 해치고 태자를 모함하였사오니 폐하께서는 엄벌을 내려 주십시오.”

대리사경이 즉시 앞으로 나와 맞장구쳤다.

대전 안에 있는 문신, 무장 및 일부 훈귀가 잇달아 맞장구치니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 데 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는 그들이 어제 상의한 끝에 적당히 타협했다는 의미였다. 국본과 관련된 큰일인 만큼 태자보다는 황후를 폐위하는 편이 나았다. 폐후는 황제의 가정사일 뿐이다. 황제가 싫증이 나서가 아니라 황후가 덕망을 잃었기 때문임을 증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거만 있으면 군신들은 막을 이유도 막을 필요도 없었다.

폐후와 유일하게 관련된 일은 사황자의 신분 문제다. 사황자가 원경제의 유일한 적자라 많은 이들이 그에게 옥새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맞장구치지 않은 그 일부가 바로 사황자당이다.

위연이 원경제의 의사 표시를 기다리지 않고 대열에서 나오니, 대전 내부가 즉시 조용해졌다.

“폐하, 복비 사건에는 다른 내막이 있습니다. 황후께서는 결코 주모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주모자는 궁녀 황소유지요. 그녀가 복비를 죽였습니다. 또한, 태자를 속여 청풍전에 가게 함으로써 이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위연이 말을 마치자 프로 불평러 급사중이 튀어나와 반박했다.

“허튼소리입니다. 일개 궁녀가 이렇게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큰 사건을 저지를 수 있다니요? 게다가 황소유가 왜 태자 전하를 모함하려 합니까? 위연, 폐하를 뭐로 보시는 겁니까? 조당의 제공들을 뭐로 보시는 겁니까?”

그가 말을 마치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이 자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다른 대신들이 잇달아 위연을 책망했고, 대전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늙은 태감이 손에 채찍을 쥐고 힘껏 휘두르자 바닥에서 ‘탁’하고 쟁쟁한 소리가 났다. 곧 그는 큰 소리로 질책했다.

“정숙!”

그때서야 대전 내부가 조용해졌다.

형부상서와 대리사경이 냉소를 지으며 위연을 바라봤다. 다른 모든 관원 역시 위연을 바라보며 냉소를 짓기도 비웃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자는 사황자당이었다.

주변의 시선, 급사중의 악담에 위연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어제 복비 사건을 수사하는 동라 허칠안이 궁녀 황소유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전 안이 다시 술렁거렸다.

‘궁녀 황소유가 임신한 적이 있다고?!’

궁 안의 시위를 제외하면 실제로 여인을 임신시킬 수 있는 사람은 원경제뿐이었다. 시위는 당연히 불가능했다. 내궁에서 당직을 설 수 있는 자들은 모두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하고, 까다롭게 선별된 정예 병사였다.

게다가 보통은 여러 명이 한 대오를 이루며 서로 감독하기 때문에 궁녀와 사사로이 정을 나눌 가능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가능성뿐이다…….

순간 조당 제공들이 원경제를 바라보는 눈빛이 저도 모르게 의미심장해졌다.

원경제의 위엄 있는 얼굴이 살짝 경련을 일으키더니 일부러 잠시 말을 멈춘 위연을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위연, 계속 말하시오!”

위연은 천천히 말했다.

“추적 조사한 끝에 황소유가 정조를 잃고 임신한 건 당조의 국구 상관명(上官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어 위연은 조당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각색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궁녀 황소유는 국구로부터 모욕을 당해 불행히도 임신하였다. 그녀는 일이 벌어진 뒤 암암리에 유산한 일에 앙심을 품고 여러 해 동안 꾹 인내하다가 결국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복비의 수행 궁녀라는 편리함을 이용해 은밀하게 요망대의 난간을 훼손했다. 그러고는 복비가 술에 취한 틈을 타 태자를 속여 청풍전으로 불렀다.

그녀는 십여 년 이래로 내궁에서 가장 깜짝 놀랄 상황을 연출했다.

국구는 복비 사건을 들은 뒤 황소유가 연관됐다는 걸 알고 자신의 짐승 같은 행동이 까발려질까 두려워 봉서궁에 도움을 청했다.

황후는 그제야 국구가 털끝만큼의 양심도 없이 악랄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혈육의 정을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국구의 죄를 뒤집어썼다.

결국 위연은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최종 결론을 내렸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합니다. 국구도 이미 죄를 인정했으니 폐하께서는 언제든지 심문하셔도 됩니다.”

“황당무계하군.”

대리사경이 콧방귀를 뀌더니 읍을 올리며 말했다.

“폐하, 소신이 알기로 황소유는 살해되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이라면 살인범은요?”

군신들이 잇달아 맞장구쳤다.

위연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설명했다.

“황소유를 도와 구상을 짜고 태자를 모함한 뒤 넌지시 황후를 가리킨 공범이 있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이 말을 듣자 마음이 동요했다. 그들은 각자 연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만약 국구가 황소유를 더럽힌 일이 없었다면 누구라도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황후가 죄를 인정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국구의 자백서가 등장하면서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황후가 무고한지는 잠시 제쳐 두자. 국구의 자백서가 나타나면서 사건은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다.

방금까지 기울어져 가는 추세를 보이던 사황자 당파가 나서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입장을 표명하고 위연을 지지하며 국구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차츰 대전 내부에는 두 가지 목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태자당과 사황자당의 설전이 벌어졌다. 사황자당은 도찰원 우도어사를 필두로 하고, 태자당은 무질서한 작은 당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큰 당파 중에서도 어쩌면 남몰래 태자를 지지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절대로 공개 석상으로 뛰쳐나오지 않을 것이다. 큰 자라는 영원히 물밑에 숨어 있다.

격렬한 말다툼이 오간 후 위연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언쟁 소리가 멈추고 군신들이 맞장구쳤다.

“폐하,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위연의 접본은 어제 일찍이 궁에 건네졌다. 통상적으로 조회에서 정무를 논의하는 경우 접본은 하루 전에 궁에 전달된다. 따라서 원경제는 진작에 국구의 자백서를 본 것이다.

오늘 조회에서 정무를 논의할 때 만약 원경제가 복비 사건을 끝내고 싶으면 이때 관을 덮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만약 끝내고 싶지 않다면 책임지고 다시 조사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원경제는 군신들이 언쟁을 멈추자 그때서야 입을 떼고 천천히 말했다.

“상관명이 내궁을 어지럽혔으니 즉시 참수를 명한다! 황후는 사건의 내막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으나 동일한 죄는 아니다. 황후가 혈육의 정을 생각하여 그런 것이니 참작할 만하므로 석 달 동안 스스로 반성할 것을 엄중히 명한다.”

군신들은 이걸로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원경제는 결국 잠시 멈칫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태자가 술에 취해 청풍전에 들이닥친 건 자신을 단속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이에 반년 동안 스스로 반성할 것을 엄중히 명한다. 진 귀비는 태자가 술에 취하게끔 부추겨 큰 화를 초래하였으니 진 비(妃)로 강등한다.”

대전 안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군신들은 실의에 빠진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사건에 연루된 황후는 석 달 동안, 태자는 반년 동안 잘못을 반성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런 상관없던 진 귀비가 귀비에서 진 비(妃)로 두 등급이나 강등되었다.

‘설마 이 사건이 진 귀비와 관련 있단 말인가……?’

능구렁이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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