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293화 (293/712)

293화. 허 대인은 실로 호걸이구나

진 귀비는 기세를 몰아 추격해 왔다.

“설령 자네가 비밀을 안다고 해도 본궁을 지목하는 건 불가능하네. 랑아가 근래에 몸이 좋지 않더니 갑자기 병이 생겼고, 태의도 살려내지 못했다. 이 결과에 대해 허 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임안에게 어쩜 이런 엄마가 있을 수 있지? 그림의 떡으로 나를 꼬시겠다……?’

허칠안은 침음하더니 말했다.

“3년은 너무 깁니다. 귀비마마께서 소직을 간 보시려는 건지 누가 압니까?”

진 귀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가장 빨라도 2년이네. 작위를 부여하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야. 이 점은 자네가 잘 알 것이네.”

“소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허칠안은 손을 저으며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소직은 혼인까지 3년이 필요하다면, 우선 먼저 부부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지 여쭤 보려 할 뿐입니다.”

“자네 지금 본궁을 놀리는 겐가?”

‘차가운 얼음’이 조금씩 진 귀비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녀의 표정, 눈빛, 말투 모두 싸늘했다.

“보세요.”

허칠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비웃었다.

“빈말을 내뱉는 사람은 아무리 듣기 좋게 말하다가도 확실히 바칠 게 생기기만 하면 바로 얼굴을 붉히기 마련이죠.”

‘아직 네가 승낙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임안이 상처받는다 해도 이 몸이 너를 망쳤을 것이다.’

진 귀비가 찻잔을 받치고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을 때에는 이미 얼굴색이 정상적으로 회복됐다.

“본궁의 가장 큰 허점이 바로 랑아네. 그녀가 없어지면 증명할 길이 없어지지. 그리고 봉서궁의 높은 건물도 눈 깜짝할 사이에 곧 무너질 걸세. 소위 영리한 새는 나무를 골라 둥지를 틀지. 허 대인은 똑똑한 사람이니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잘 알 걸세.”

허칠안은 찬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는 태자고, 황후께서는 곧 자리가 바뀌실 테고, 마마께서는 임안을 제게 시집보낸다고 약조하셨으니…… 저는 위 공을 택하겠습니다.”

진 귀비는 굳어진 얼굴로 찻잔을 쥔 손에 한참 동안 힘을 주었다. 그녀는 그러고 나서야 뜨거운 찻물을 그놈의 얼굴에 끼얹는다거나 잔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 냈다.

“그렇다면 허 대인은 랑아를 경수궁에서 데려가 본궁을 사지로 몰아넣을 작정인가?”

진 귀비는 아름다운 눈으로 허칠안을 죽자사자 노려보았다. 방 안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보이지 않는 살기가 허칠안을 뒤덮었다.

허 색마는 연신경이라 적이 나서는 장면을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7품 무사의 본능은 그에게 신호를 주입했다. 위험해!

‘랑아를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진 귀비와 사생결단하겠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궁지에 몰린 그녀는 급한 마음에 이곳이 내궁이란 사실을 더는 개의치 않고 나를 물 테고, 내 생명은 보장받을 수 없을 거야. 물론 신수 승려가 있지만, 승려는 내 마지막 비장의 카드니까…….’

허칠안은 냉소를 짓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허칠안은 그날 만 명이 넘는 반란군을 맞아 홀로 분투하며 수천 명의 목을 베다가 죽었지만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마마의 고작 이런 위협에 제가 두려워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신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죽음으로 겁을 줄 수 있겠습니까?”

‘신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죽음으로 겁줄 수 있냐고……?’

진 귀비의 눈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네. 허 대인은 실로 호걸이구나. 내가 졌네…….”

귀비는 마치 잔을 던지는 행위를 신호로 삼으려는 듯 손에 든 찻잔을 꽉 쥐었다.

갑자기 허칠안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임안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녀가 속상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귀비를 적발하려면 내가 경수궁을 빠져나갈 수 있어야 하잖아…….’

허칠안은 유감스럽다고 생각했다.

진 귀비는 그를 잠시 주시하더니 찻잔을 내려놓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하지 않은 걸 보니 임안에게 진심인 건 확실하구나. 그렇다면 허 대인은 왜 내게 의지하기를 원치 않는 건가?”

‘내가 바보인 줄 아니? 너한테 빌붙으면 나는 끝장이야. 경성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위연뿐이야. 회경도 반밖에 안 돼. 임안은 권력도 세력도 없는 한낱 공주니 절대로 나를 보호할 수 없다고.’

“마마, 인재를 배양하시려면 입에 발린 말로 약속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셔야 합니다. 소직이 위 공께 충성을 다하는 건 위 공께서 저를 진심으로 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를 신임합니다.”

허칠안은 말을 마친 뒤 몸을 옆으로 돌려 뜰 밖에 있는 공공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소직은 속수무책입니다. 다만, 마마께서도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으신 건가 곰곰이 생각 중입니다.”

일단 둘 다 죽자는 생각이 사라졌으니 진 귀비도 더는 그를 난처하게 할 수 없었다.

공공은 비록 졸개지만, 그는 현재 원경제의 눈이므로 CCTV가 되어 감시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원경제에게 전달될 것이다.

진 귀비가 바로 그를 죽이지 않는 이상 교활한 계략으로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공공이 허칠안을 위해 입증할 수 있다.

이게 바로 허칠안이 공공을 남겨 두려고 고집을 부린 이유다.

진 귀비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아름다운 눈을 슬며시 감으며 말했다.

“본궁이 피곤하니 물러가게……. 경수궁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네.”

“소직,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허칠안은 공수하고 읍을 올린 뒤 방에서 물러났다.

* * *

뜰에 있던 공공은 그가 나오는 걸 보자 즉시 맞이하며 물었다.

“허 대인, 귀비마마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묻지 말게. 물으면 자네 목은 보장 못 하네.”

허칠안이 언짢아하며 말했다.

공공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그가 바깥뜰로 오니 정자에 앉아 있는 임안이 보였다. 임안은 한 손으로는 볼을 받치고, 한 손으로는 찻잔을 가지고 놀며 몹시 따분해했다.

곁에는 궁녀 둘이 서 있었다.

그녀는 허칠안을 보자 동글반반한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눈매가 부드러워지면서 도화안이 날렵해졌다. 그녀는 손짓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개자식, 빨리 와.”

개자식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전혀 포스가 없었다. 애교 부리는 것처럼 속삭이는 소리로 들렸다.

허칠안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었다.

“마마, 소직 나왔습니다.”

임안은 바로 물었다.

“어머니가 네게 뭐라고 했어?”

“마마께서 곧 출가할 나이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소직에게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소년 영재 몇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마마 미래의 신랑감 물색을 도우시려고요.”

임안은 잠시 멍해졌다가 얼굴이 살며시 붉어지더니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어머니께서 네게 그런 얘기를 하셨다고?”

‘……잉, 왜 안 걸려들지? 언제 똑똑해진 거야? 이제 내가 나를 추천하고 싶은데.’

허칠안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농담입니다.”

임안이 버들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개자식, 네가 감히 본 공주를 희롱하다니.”

임안은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소직은 아직 어린아이라 희롱이 뭔지 모릅니다.”

여우는 ‘퉤’하고 소리 내더니 허칠안의 말이 재미있었는지 마치 암탉처럼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은 아름다운 풍경처럼 순수하면서도 고왔다.

허칠안은 따라 웃으면서 마음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원래 우선은 모르는 척 경수궁을 빠져나간 뒤, 자신의 발견을 위연에게 알리고 진 귀비가 손을 쓸 새 없이 랑아를 재빨리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임안과의 관계 때문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냉정해진 뒤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 귀비를 까발릴 테지만.

의외로 진 귀비의 단수는 보통이 아니다. 허칠안은 그가 가자마자 랑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날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러면 진 귀비는 더 이상 허점이 없다.

‘진 귀비는 기준에 부합하는 비(妃)인 셈이다……. 임안처럼 둔한 여자아이가 궁궐에서 나고 자라는 게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지만.’

진 귀비의 방금 행동을 떠올려 보면 참 약삭빠르다. 물불 가리지 않고 우선 그를 불러 반응을 떠보았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정말 그녀에게 발각되었다.

그러고 나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말은 마치 다 솔직하게 얘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믿는 구석이 있어 무서울 게 없었다. 그녀가 랑아를 해결하기만 하면 허점이 없어진다. 또 허칠안은 죽고 싶지 않은 이상 절대 랑아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기왕 발각된 거, 차라리 좀 시원시원하게 말해 버렸으면 내 믿음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예쁜 딸을 미끼로 던졌으니 만약 내가 호색가라면 즉시 걸려들었겠지……. 나는 신수 승려를 업고 있으니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폭로되면 원경제 개 같은 놈이 분명히 나를 상백에 봉인했겠지. 결과는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둘 다 죽는다.’

* * *

허칠안은 경수궁을 나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며 오목을 두자는 임안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공공, 궁 안의 일은 내가 이미 처리했네. 조금 이따가 폐하께 보고할 때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본관이 이곳에서 자네에게 일깨워 주겠네.”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환관은 그 말을 듣더니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허 대인 말씀하십시오.”

“경수궁의 일에 관해 자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황제께 아뢰어야 하네. 이렇게 말하게. 경수궁 궁녀 랑아를 심문한 후 허 대인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졌습니다. 마치 더는 머무르기 싫다는 듯 차조차 마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허 대인이 경수궁을 떠나기 전에 갑자기 귀비마마께서 불러 세워 뒤뜰로 가셨습니다…….

귀비마마께서는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방안에서 허 대인과 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노비는 들어가지 못하고 뜰 가운데에 남겨졌기에 두 분께서 방 안에 계신 건 봤지만,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허 대인은 걱정이 태산인 표정으로 궁을 나섰습니다.”

허칠안은 말을 마치고 품속에서 은표 다섯 냥과 경수궁 문지기 환관한테 갈취한 다섯 냥, 합해서 총 열 냥을 꺼내 인정미 넘치게 공공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공공은 한 편으로는 품을 벌리면서 한 편으로는 손을 내저었다.

“허 대인,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아요.”

그는 은자를 받고 허칠안의 말을 꼼꼼히 되새기면서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 * *

허칠안은 즉시 황궁을 나섰다. 그는 회경이 빌려 준 준마를 우림위 손에서 넘겨받아 빠른 속도로 야경꾼 관아로 돌아갔다.

그는 수위의 통전을 거친 뒤 호기루에 들어가 손님을 응대하는 7층 다실에 도착했다.

위연은 다실이 아니라 그곳과 연결된 요망대에 있었다. 그는 큰 의자에 앉아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검은 옷의 하급 관리가 빗을 쥐고 그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위연이 손짓했다.

“오게. 본좌의 머리를 빗겨 주게.”

검은 옷의 하급 관리는 눈치 빠르게 허칠안에게 빗을 건넨 뒤 돌아서서 다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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