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다 (2)
허칠안은 마당 가운데에 서 있다가 풍채를 가다듬는 척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짧은 시간을 틈타 이해득실을 가늠하며 앞으로 발생할 일을 헤아렸다.
‘만약 나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려는 것이라면 사람들을 물리칠 필요가 없다. 바꿔 말하면, 진 귀비와 내가 나눌 대화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다. 내가 공공에게 좀 멀리 서 있으라고 한 건 진 귀비에 대한 일종의 타협이다. 먼 곳에 서 있는 장점은 나와 귀비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없으면서도 방 안에 있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똑히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로써 진 귀비가 술래잡기하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비(妃)를 능욕했다는 누명을 내게 뒤집어씌우려는 꿍꿍이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비록 좀 조잡하지만, 방비하지 않을 수 없지.’
* * *
허칠안은 생각을 끝낸 뒤 방으로 들어가, 화려한 궁장을 입고 부드러운 침상에 단정히 앉은 진 귀비를 만났다.
이는 허칠안과 진 귀비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지난번은 지난해 연말 제사대전 때였다. 그는 영진산하 사당이 무너졌다고 목청껏 소리 지른 뒤 충성스러운 시늉을 하며 근거리에서 황제의 여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진 귀비와 임안은 같은 얼굴형으로 표준 달걀형 얼굴이다. 눈썹과 눈, 입술, 코 모두 아름다웠다.
사실 얼굴만 놓고 보자면 진 귀비는 황후보다 약간 떨어지지만, 그녀의 단정하고 부드러운 기질이나 친화력은 황후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꽃이 수놓아진 화려한 치마와 머리 위의 조잡하면서도 값비싼 장신구가 그녀의 친화력을 해쳤다.
허칠안이 만난 여자 중에서는 임안만이 사치스러운 장신구와 의상을 소화할 수 있었다. 장신구가 화려하고 값비쌀수록 그녀의 매력이 점점 더 짙어졌다. 임안은 오히려 그렇게 치장할수록 더 아름답고 예뻤다.
이 점은 모녀 둘이 닮지 않았다.
“오늘 아침 폐하께서 조당에서 폐후를 거론하셨다고 하지. 허 대인도 분명 들었을 것이라 생각되네.”
진 귀비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함이 덜 느껴졌다. 대신 성숙한 부인의 부드러움이 더해져 봄바람 속에 있는 듯했다.
“소직 이미 알고 있습니다.”
허칠안은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 대인이 내 경수궁에 온 건 무슨 일 때문인가?”
“이 사건에 아직 몇 가지 의문점이 있사옵니다.”
진 귀비는 ‘아’하고 소리를 내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하며 말했다.
“어떤 의문점인가?”
“그건……. 소직이 우매하여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진 귀비는 얼굴의 미소를 조금씩 거두며 허칠안을 한참 동안 응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 귀비는 싸늘한 얼굴을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거짓말!”
이 세 글자는 마치 무거운 추로 허칠안의 가슴을 내리찍는 듯했다. 또 귓가에 천둥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내가 거짓말하는지 어떻게 안 거지……?’
그는 절제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었다. 그에 따라 호흡이 가빠졌으나 곧 모든 감정을 가라앉히고 얼버무렸다.
“마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
“자네가 망기술로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망기술로 자네를 볼 수 있지.”
진 귀비는 찻잔을 받치고 여유롭게 한 모금 마시더니 탄식했다.
“본궁이 자네를 초대한 건 활로를 모색해 보려 한 것뿐인데 방금 자네의 거짓말로 본궁이 더 이상의 요행을 바랄 수 없게 되었군. 허 대인의 날카로운 생각으로는 세상의 아무리 묘한 사건이라도 모두 뻔한 수작일 테지.”
‘진 귀비가 술사라고?! 불가능해. 그녀가 왜 내게 자백하려는 거지? 내가 원경제에게 말할까 봐 겁나지 않는 건가? 그녀가 나를 초대한 목적이 무엇이지?’
허칠안은 여러 생각을 하다 탄식했다.
“마마, 구태여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모른 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이따가 너와 맞설 위 공과 회경을 찾아가야지…….’
허칠안은 속으로 덧붙였다.
이쯤 되면 두 사람은 서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셈이다.
허칠안은 진 귀비의 태연한 모습이 뜻밖이었다. 그는 이 문제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네는 언제 밝혀낸 건가? 방금?”
진 귀비는 또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마치 한담을 나누는 듯 차분했다.
“네. 랑아가 위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이미 어느 정도 의심했겠지. 말해 보게.”
허칠안은 침음하더니 말했다.
“소직이 복비 사건의 과정을 되돌아보니 확실히 의문점이 많더군요. 마마께서 어찌 아무런 까닭 없이 탁자 위에 황후께서 보내신 백일춘을 올려놓았을까요? 이곳은 필경 내궁입니다. 원기를 돋우는 술을 태자가 취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그가 나쁜 일을 저지를까 봐 두렵지 않으십니까? 이는 마마의 조심스러운 품격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날 회경은 그에게 황후가 냉궁에 갇혔던 일을 얘기하면서 진 귀비가 태자의 자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전했다. 또 그녀가 마음이 옹졸하고 조심스러우며 신중한 스타일이라고 언급했다. 허칠안은 이때부터 의문이 생겼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황후께서 황소유를 매수해 태자께 함정을 팔 수는 있지만, 그녀가 어찌 태자께서 반드시 청풍전에 갈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마마께서는 태자의 생모시니 아들을 아주 잘 알고, 그가 복비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계셨죠. 그러니 도중에 황소유를 보내 요행을 바라신 거죠…….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더군요.
그 후는 말이죠. 황소유의 시체가 발견되고 소직이 단서를 찾아 황후를 가리킬 때까지 인위적으로 밀어붙인 흔적이 너무 뚜렷했습니다. 하지만 황소유가 만약 그대로 실종됐다면 황후를 모함하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셨겠죠.
물론, 그때 저는 아직 반응이 오지 않아서 여전히 황후의 혐의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납득할 수 없는 건 마마께서는 왜 사람을 보내 어약방의 수지 장부를 훼손하신 겁니까? 그건 황후마마를 가리키는 가장 유리한 증거일 텐데요. 비단 필요 이상의 짓이었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까발리신 겁니다.”
진 귀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코 부질없는 짓이 아니네. 그건 원래 내가 일부러 남긴 증거지. 만약 사건을 수사하는 수석 수사관이 자네가 아니었다면, 황후를 공격하는 가장 쓸모있는 증거 중 하나가 됐겠지. 하지만 자네가 죽었다가 되살아난 건 완전히 본궁의 예상 밖이었네. 황소유의 시체와 어약방의 장부가 동시에 발견됐다면 유도하는 흔적이 너무 과했을 걸세. 나는 자네가 알아차릴까 봐 두려워 바로 폐하께 아뢰고 사람을 보내 장부를 찢어 버렸네.
그래서 자네가 당시에 의문을 품고 있으면서도 황후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딱 잘라 말하지 못했지. 하, 만약 폐하께서 미리 아셨다면, 어제 본궁의 하소연은 그 효과가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야. 그런 뒤 임안에게서 사건의 진척을 알아봤지. 나는 폐하께 압력을 가하면서 한 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자네를 암살하려 했네. 자네가 죽고 황후께서 다시 죄를 인정하신다면 이 모든 건 흠 잡을 데 없이 완전무결했어.”
허칠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 아침에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황후라고 생각하며 회경과 이혼할 마음을 먹었더랬다. 위연이 그에게 황후가 죄를 인정했다고 말한 뒤에야 이 사건에 또 다른 내막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나를 사지로 몰아넣으려 한 자가 진 귀비였군. 자, 아무것도 말할 필요 없어. 임안과 이혼해야겠다.’
“의문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마마께서 답을 주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해 보게.”
진 귀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태자께서는 이미 태자신데 마마는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진 귀비는 웃었다. 그녀는 허칠안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자조하는 것 같기도 한, 복잡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태자는 필경 태자이나 제위에 오르지 않으면 주인이 바뀔 가능성이 있지. 황후는 늘 황후고 사황자는 영원히 적자지. 만약 폐하께서 원래 관심을 쏟았던 게 사황자라고 자네에게 말한다면? 만일 폐하께서 그해 황후께서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사황자는 이미 태자일 거야.”
허칠안은 이 말을 할 때 통쾌함과 원망이 함께 서린 진 귀비의 눈빛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설령 그렇다 쳐도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날 동안 태자의 자리는 한결같았는데 마마께서 너무 불필요한 걱정을 하시는 건 아닌지요?”
“자네가 조당의 일을 뭘 아는가.”
진 귀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연이 있는 한 사황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영원히 내 아들보다 크네. 위연은 시종일관 조당을 장악하여 고질병을 싹 쓸어버리고 싶어 하지. 자신의 포부를 펼치려 사황자를 반드시 제위에 앉힐 게야. 여인의 몸으로 나 혼자서는 위연을 당해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황후 쪽에서부터 힘을 쓸 수밖에 없었네. 내궁의 주인이자 이 나라의 어머니인 황후는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야. 본궁 역시 황후의 지위가 탐나는 여인일세.”
허칠안은 위연의 포부를 이해하였기에 진 귀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마마의 뒤에 누가 있습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진 귀비는 뜻밖의 질문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곧 고개를 저으며 실소하였다.
“본궁은 점점 자네가 눈에 드는걸. 보아 하니 임안이 무심코 보물을 하나 캤구나. 자네는 본궁 뒤에 누군가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한 거지?”
허칠안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발끝을 주시한 채로 생각하면서 말했다.
“만약 마마께서 국구가 한 일을 진작 아셨다면, 왜 이렇게 오랫동안 꾹 참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나서신 걸까요? 만약 마마께서 최근에야 국구와 황소유의 일을 알게 됐다면 또 누가 마마께 이 일을 알린 걸까요? 틀림없이 황소유는 아닐 테지요. 그녀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참을 수 있었는데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생각을 바꿔 자발적으로 마마께 털어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중에는 분명 다리를 놓아준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마께서는 소직이 거짓말한다는 걸 아셨죠. 사천감의 망기술은 보통 사람이 시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소직이 방금 또 한 가지 가능성을 추측했습니다.”
허칠안이 고개를 들고 진 귀비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마의 목표는 황후지만 마마 배후에 있는 사람 혹은 세력의 목표는 위 공입니다.”
진 귀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칠안을 오랫동안 쳐다보더니 문득 말했다.
“허 대인은 임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주 나이스…….’
허칠안은 내심 마음이 동요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임안이 출가할 나이가 됐다고 태자가 내게 말한 적 있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는데 그 후에 보니 임안이 자네를 안 뒤로 경수궁에 올 때마다 자네 얘기를 가장 많이 꺼낸다는 걸 알게 됐지.”
진 귀비는 차근차근 잘 유도하였다.
“소녀가 연정을 품는 나이를 본궁도 겪어보았네. 머지않아 허 대인에게 곧 작위를 부여한다고 들었네. 자작이 크지는 않지만, 자네가 귀족 계층에 발을 들였다는 걸 의미하지. 본궁이 3년 안에 자네의 작위를 한 단계 더 높여 주겠다고 약조할 수 있네. 그때가 되면 임안을 자네에게 시집보내지.”
적나라한 꼬임 역시 진 귀비가 그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이유다.
허칠안은 좀 망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