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290화 (290/712)

290화. 거짓말하지 않았다

안뜰, 안채에서 진 귀비는 수행 궁녀 두 명의 시중을 받으며 부드러운 침상에 나태하게 기댔다. 한 사람은 그녀의 어깨를,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다리를 주물렀다.

원경제의 내궁에는 황귀비가 없었기에 진 귀비가 모든 비빈 중에 가장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얼마 안 있으면 내궁에서의 그녀의 지위는 정말로 천하무적이 될 예정이었다.

진 귀비는 손에 책 한 권을 받쳐 든 채 웃으며 말했다.

“이《춘정월(春庭月)》은 참 잘 썼어. 보면 볼수록 좋아져.”

랑아가 입을 오므리고 살짝 웃었다.

“마마께서 기분이 좋으시니 책도 재밌다고 느끼시는 거예요.”

또 다른 궁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맞아요. 비록 태자께서 아직 대리사에서 나오지 않으셨지만, 조만간의 일이잖아요. 마마께서 근래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셔서 노비들이 마음 아파 죽을 뻔했다고요.”

랑아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어엿한 황후께서 이렇게 악랄한 수법으로 복비마마를 해하고, 태자 전하를 모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저희는 황후께서 참으로 마음씨가 착한 줄 알았지 뭐예요.”

진 귀비가 눈썹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황후마마를 욕보여서는 안 돼.”

“마마, 마마께서는 너무 조심스러우셔요. 폐하께서 조당에서 폐후를 제의하셨으니 제공들께서 승인하시면 그분은 더 이상 황후마마가 아니라고요.”

다른 궁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쩌면 저희 마마께서 얼마 안 있으면 황후가 되실지도 모르고요.”

진 귀비가 연신 눈살을 찌푸리며 막힘없이 지껄이는 두 궁녀를 훈계하려던 참에 갑자기 나긋나긋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임안 왔어요.”

문밖에서 빛이 어른거리더니 임안의 그림자가 방에 드리워졌다. 붉은 치맛자락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불꽃 같았다.

두 궁녀는 약속이나 한 듯 웃음소리를 그치고 대화를 끝냈다.

진 귀비는 인자한 미소를 내비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짓했다.

“임안, 아침에 막 왔다 가지 않았니?”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그렇죠. 경수궁에 눌러앉아서 매일 어머니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요.”

임안은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소저다. 생긴 것도 예쁘고 말도 듣기 좋게 해서 원경제든 진 귀비든 모두 그녀를 아주 총애했다.

“그럼 어머니와 잡담을 좀 나누다가 무료해지면 다시 소음원으로 돌아가거라.”

진 귀비는 딸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곁에 앉혔다.

“좋아요!”

임안은 앉아서 귀엽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를 보러 온 김에 일도 좀 처리하려고요.”

진 귀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니?”

임안은 랑아를 보며 분부했다.

“허 대인이 네게 물을 말이 있다는구나. 바깥뜰에 있는 편청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으니 다녀오거라.”

임안은 말을 마친 뒤 진 귀비에게 설명했다.

“제가 키우는 야경꾼 허칠안 말이에요. 어머니께서도 그자를 기억하실 거예요. 태자 오라버니 사건을 그가 처리했잖아요. 아마 랑아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는가 본데 문을 지키던 노비가 들어가지 못하게 했대요.”

진 귀비는 잠시 침음하더니 손을 흔들며 말했다.

“랑아, 그를 만나러 가거라.”

“네.”

랑아가 대답하더니, 두 손을 배에 가지런히 얹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문턱을 넘어 마당으로 나섰다. 그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임안은 시선을 거두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머니, 태자 오라버니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허칠안에게 더 많이 의지해야 해요. 어머니께서는 모르실 거예요. 저자를 키우는 건 아주 고생스럽다고요. 회경은 인재를 배양할 줄 알고, 세력을 양성할 줄 안다고 항상 말씀하시는데 사실 이 임안도 뒤처지지 않는다고요. 그를 막 알았을 때 그는 장락현의 일개 포졸이었어요. 제가 아주 힘을 들여서 그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낸 거예요.”

진 귀비는 매우 놀랐다.

“네가 어떻게 한낱 포졸을 아는 거니?”

“아이고, 이런 사소한 일들에 신경 쓰지 마셔요. 어쨌든 제가 키운 인재가 태자 오라버니를 구했다고요, 그렇죠?”

“그렇고말고. 우리 임안 덕분이지. 이번에 임안이 배출한 사람이 힘을 쓰지 않았다면 네 태자 오라버니는 위험했을 거야.”

진 귀비는 딸의 달걀형 얼굴을 문질렀다.

* * *

허칠안은 편청 안의 의자에 앉은 채 손에 찻잔을 받치고 가볍게 한 입 불었다.

경수궁의 차는 손님 대접용이라고 해도, 숙모가 소장한 좋은 차보다 훨씬 진하고 향기로웠다.

‘그래도 방금 임안이 마신 차보다는 맛이 많이 떨어지네. 이따가 임안에게 찻잎 조금 달라고 해야겠다. 숙부와 숙모도 최상등품을 맛봐야지.’

허칠안은 감탄하며 한 모금 마시고는 옆에 서 있는 환관을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공공, 자네는 폐하께서 본관을 감독하라고 보내신 사람이네. 관리 사회 말로 하자면 흠차대신(欽差大臣)이지. 서 있지 말고 앉게.”

환관은 뜻밖에도 지식을 좀 갖춘 사람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경성을 나가야 흠차죠. 노비는 여전히 궁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럼 전과 다름없이 노비지요. 마치 순무가 밖에서는 위풍당당하지만, 경성으로 돌아오면 일개 어사에 불과한 이치와 같습니다.”

이 말에 허칠안은 웃겨서 웃었다.

“견해가 날카롭군그려.”

장 순무는 경성에 돌아오면 일개 어사일 뿐이다. 하지만 밖에서는 아주 위풍당당하다. 포정사, 도지휘사 이런 우두머리들도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스스로를 소직이라고 칭한다.

“참, 공공은 폐하 침전의 당차 아닌가?”

허칠안이 물었다.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공공이 보고를 마친 뒤 폐하께서 황후의 봉서궁에 가셨는가?”

허칠안은 한 가지 궁금증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해 왔다. 어제 해각에서 황소유와 황후의 뿌리를 밝혀냈고 단서가 황후를 가리키기 시작했지만, 어약방의 수지 기록은 누군가에 의해 몰래 훼손됐다. 이러한 이유로 황후가 황소유를 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명확한 증거가 없어졌다.

원경제의 지혜와 일 처리 방식으로는 사건이 아직 명백하게 밝혀지기 전에 몹시 초조해하며 황후에게 질문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원경제가 정말 이렇게 충동적이고 무지한 사람이라면, 태자 사건이 노출된 후에 그는 바로 태자를 폐위했을 것이다.

“아니요…….”

환관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진 귀비께서 폐하의 침전에 오셔서 울며불며 하소연하셨습니다. 황후께서 태자를 모함했다며 고발하셨지요. 폐하께서는 귀비마마와의 정을 생각해 봉서궁에 가서 황후께 물으신 겁니다. 노비 역시 그쯤에 폐하께서 불러 물으셨지요. 그때는 아직 노비가 자발적으로 보고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진 귀비는 사건의 진척을 어떻게 안 거지?’

말할 필요도 없다. 분명히 임안이 진 귀비에게 말한 것이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사건에 파격적인 진척이 생기고, 태자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지자 못된 계집애가 미친 듯이 기뻐하며 모친을 찾아가 희열을 함께 나누었으리라.

그들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연두색 궁장을 입은 여인이 문지방을 넘어 편청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아름답고 피부가 새하얬으며 스물네다섯쯤 돼 보였다. 저채미처럼 눈이 아주 동그랗고 크지만 저채미만큼 크지는 않았다.

저채미의 큰 눈은 항상 허칠안에게 2차원 여자친구를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동글반반한 계란형 얼굴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큰 눈망울의 귀요미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았다.

이 궁녀는 편청으로 들어와 사뿐사뿐 예를 올리며 말했다.

“허 대인을 뵙습니다.”

“랑아 누이.”

허칠안은 웃으며 답례했다.

랑아는 편청에 서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허 대인께서 무얼 여쭈고 싶으신지요? 마마께서 노비의 시중을 기다리십니다.”

허칠안은 즉시 말했다.

“미안하오. 소직 역시 황명을 받들어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오.”

그는 잠시 멈추더니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랑아 누이, 요 며칠 전에 어약방에 간 적이 있소?”

랑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무얼 했소?”

“태자께서 일을 당하신 후로 마마께서는 매일을 눈물로 지새우시면서 기력이 쇠하셨습니다. 그날은 두통에 시달리셔서 노비가 정신을 안정시키고 머리를 맑게 하는 약을 가지러 어약방에 갔습니다.”

랑아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어약방의 수지 장부를 훼손한 적이 있소?”

허칠안이 물었다.

그는 명단에 있는 다른 궁녀와 태감에게도 이렇게 명쾌하고 시원스럽게 물었다. 효과 좋은 거짓말 탐지기 한 대와 맞먹는 망기술이 있으니 CCTV보다 더 유용했다.

망기술은 여러 가지 제약이 있고, 법기에 차단될 수 있어 술사에게는 유용하지 않고 4품 이상의 관원을 고발하는 데도 쓰일 수 없다. 복비 사건은 국본이 걸린 일이라 마찬가지로 망기술을 증거로 삼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태감과 궁녀들에게 망기술을 쓰는 덴 제약이 없었다. 게다가 허칠안은 이를 보조용으로만 쓸 뿐이었다.

‘우선 네가 마피아라고 확정한 뒤에 다시 너를 조사하러 올 거야. 이게 단서를 좇아 진상을 밝히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하고 편하거든.’

랑아는 마치 허칠안이 이렇게 단순하고 거칠 줄 몰랐다는 듯 어리둥절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후, 사실대로 말하는군…….’

허칠안은 망기술을 시전한 뒤 속으로 실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그의 판단이 틀린 듯했다. 장부를 훼손한 사람은 닷새 사이에 어약방에 들어간 게 아니라 훨씬 더 전이였다. 어약방에 몰래 들어갔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경제의 어약방에는 진귀하고 영험한 묘약이 비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똥 같은 황제의 작은 금고를 단약을 만드는 데 썼으니 어약방을 보고(寶庫)로 묘사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물 창고인 이상 밖에는 당연히 막강한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침입한다고 해서 침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장부를 훼손한 사람이 닷새 전에 어약방에 들어간 것이다. 아니면 어약방에서 반역자가 나온 것이다. 조금 이따가 어약방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는 궁녀와 태감에게 물어보러 가야겠군…….’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어서서 공수하며 말했다.

“다 물었소. 하지만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다시 방문할지도 모르오.”

그는 문전 박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예방주사를 놓았다.

랑아는 이 말을 듣자 눈에 짜증이 역력해졌다.

허칠안은 황급히 말했다.

“이따가 랑아 누이에게 작은 선물을 보내겠소. 경성 계월루는 녹두떡이 간판 간식이지 않소.”

그는 랑아가 녹두떡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경수궁에 오는 길에 임안이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랑아는 고개를 저었고, 거리를 두고 다소 꺼려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노비는 녹두떡을 좋아하지 않아요.”

‘미움받는 건가……? 하, 이 여인도 곧 잔인하고 포악해질 징조가 보이는데 나처럼 세상에서 보기 드문 미남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도 형편없다니. 탈태환의 효과가 미흡한 걸까 아니면 남자를 접해본 적이 없어서 남자의 좋은 점을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본관이 방해하지 않겠…….”

허칠안이 갑자기 굳었다.

망기술이 제공하는 시야 속에 랑아의 감정은 안정적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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