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289화 (289/712)

289화. 문전 박대 (2)

야경꾼 관아, 호기루.

검은 옷의 하급 관리가 다실로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

“위 공, 회경공주마마의 시위가 국구를 관아로 압송했습니다. 국구께서는 위 공을 만나겠다고 소리치고 계십니다.”

위연은 고개를 숙이고 접본을 보더니 머리도 들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곧 죽을 인간을 만날 필요는 없지. 남궁 금라에게 국구를 잘 접대하라고 통지하거라.”

검은 옷의 하급 관리가 물러난 뒤 위연은 접본을 덮었다. 그러고는 느린 걸음으로 요망대에 올라 우여곡절이 겹겹이 쌓인 눈빛으로 황궁을 멀리 바라보았다.

* * *

회경은 황궁에 돌아온 뒤 곧장 봉서궁으로 갔다.

허칠안은 명단에 있는 인물을 계속해서 조사할 계획으로, 환관을 불러 함께 처리하기로 했다.

그는 명단에 따라 단서를 좇다가 마지막 한 사람을 조사할 때 난관에 부딪혔다.

그 사람은 경수궁의 궁녀였다.

“랑아(琅兒) 누이가 귀비마마의 시중을 들고 있으니 허 대인께서는 조금 이따가 오십시오.”

문을 지키는 환관이 허칠안을 가로막았다.

허칠안은 하늘색을 보더니 상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본관이 언제 와야 좋은가?”

환관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누가 압니까. 내일 다시 오시지요.”

“사건이 긴급한데 어찌 이렇게 미룰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조금 알아보려는 것뿐이네. 한 마디면 될 일이야.”

허칠안은 은자 다섯 냥짜리 은표를 꺼내며 말했다.

“공공, 편의 좀 봐주게.”

문을 지키던 환관이 은자를 받고 돌아서서 들어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환관은 크게 화가 났고,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허 대인, 저 개자식이 대인을 농락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 이렇게 쳐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나?”

허칠안이 무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 안 됩니다.”

환관이 서둘러 저지하며 타일렀다.

“비(妃)의 침궁에 사사로이 뛰어드는 건 대역죄입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갔다.

환관은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차라리 그만두십시오. 날이 늦었으니 우선 돌아가시는 게 낫겠어요.”

“아니, 임안공주마마를 찾아가서 정산할 참이네.”

* * *

소음궁에 있던 임안은 기분이 좋았다. 오늘 원경제가 조당에서 폐후를 제의하였고, 반나절 동안 발효(發效)되어 대봉 관리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궁에 있는 임안 역시 자연스레 이 소식을 들었다.

화려한 붉은색 치마를 입은 이공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포도 덩굴 대에 매달려 있는 그네에 앉아 있었다. 치맛자락 아래로는 작고 정교한 꽃신 두 짝이 흥겹게 흔들거렸다.

그녀가 기분이 좋은 건 당연했다. 황후가 태자를 모함하고, 복비를 죽였다고 인정하였으니 태자 오라버니는 곧 대리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머니도 매일 눈물범벅이 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개자식 역시 살아 돌아왔다. 고작 닷새만에 그야말로 운수가 풀렸다.

임안은 세월이 평온하다고 생각했다.

“회경은 지금 아주 슬프겠지. 흥, 누가 황후더러 우리 태자 오라버니를 모함하래……. 음, 본궁이 기분 좋으니 요 며칠 간은 그녀를 찾아가 뽐내지 않아야겠어.”

임안은 요사스러운 마음이 꿈틀거렸지만 회경의 주먹이 자신보다 세다는 걸 고려하여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 회경을 찾아가 도발하기로 말이다.

그때는 개자식을 데리고 오면 된다. 그는 적군 수천 명과 맞서 싸운 영웅이니 틀림없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뜰 밖에서 시위가 걸어오더니 더는 다가오지 않고 십여 미터 밖에 멈춰 서서 읍을 올리며 말했다.

“마마, 허 대인이 오셨습니다.”

임안의 얼굴에 순간 웃음꽃이 피었다.

“얼른 모셔라.”

그녀는 그네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기울이고 목을 쭉 뺀 채로 기다렸다.

허칠안은 환관을 데리고 들어와 거드름을 피우며 포도 덩굴대 아래의 돌 탁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궁녀가 임안에게 주려고 놓은 과일, 어선방 주방장이 만든 떡 그리고 특별히 제공된 찻잎을 먹었다.

“저기…….”

옆에 서 있던 궁녀가 불렀다.

“응?”

허칠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그건 마마께서 마시는 거예요.”

궁녀가 모기처럼 가는 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하네, 미안해.”

허칠안은 잔을 들고 또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임안이 참지 못했다. 분을 칠한 얼굴이 새빨개지며 짜증을 냈다.

“허칠안.”

마침 이때,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와 포도 덩굴이 살짝 흔들렸다. 햇빛이 덩굴을 뚫고, 그녀의 동글동글한 달걀형 얼굴에 쏟아졌다. 불그스름한 작은 입술, 오뚝한 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듯한, 어여쁘면서도 다정다감한 도화안과 돋보이는 발그레한 볼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을 띠었다.

그 황홀한 풍경이 아니었으면 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대봉의 공주를 일망타진하려 했을 것이다.

‘허 대인은 장공주마마에게 총애받는 신하이자 이공주마마에게도 총애받는 신하구나. 전도유망하다…….’

환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큰 경성에서 궁안의 황자, 황녀를 제외하고 임안공주마마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허 대인뿐일 것이다.

환관은 요 며칠 허칠안을 따라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와 회경공주, 임안공주의 교류를 직접 목격했다. 두 마마가 허칠안을 중시하고, 높이 산다는 건 장님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건은 다 끝난 거 아니야?”

임안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자식, 왜 아직도 궁에 들어와서 사건을 조사하려는 거야?”

그녀는 환관의 존재를 보고 허칠안이 여전히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러지 않았으면 이 순간 소음원에 오는 사람은 그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허칠안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마, 저는 마마의 사람인지요?”

“당연하지.”

임안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무시 당했어요.”

허칠안이 얼굴을 가리고 비통한 감정을 드러냈다.

“우리 집은 몹시 어려워요. 어릴 때부터 숙부가 제게 말씀하셨죠. 가난한 집의 아이는 일찍이 집안일을 도맡아야 한다고……. 하지만 경수궁의 그 칼 맞아 죽을 놈이 제 은자 십 냥을 강탈했어요.”

임안은 비록 여우 같지만, 그래도 아주 의리 있는 사람이다. 임안은 그 말을 듣더니 역시나 버럭 화를 내며 ‘탁’하고 그네에서 뛰어내려 눈썹을 치켜올리고 말했다.

“가자. 경수궁에 가서 본 공주가 너 대신 정의를 바로 잡아 주겠어.”

적은 돈이지만, 임안의 사람을 괴롭히는 건 다른 문제다.

허칠안은 억울해 죽겠다는 모습을 하고 얌전하게 공주마마의 곁을 따라서 잠시 걷다가 무심한 듯 물었다.

“마마, 진 귀비 곁에 랑아라는 궁녀가 있지요?”

“응.”

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궁녀는 경수궁에서 오래 일했지요?”

“맞아.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었지.”

“마마께서 그 궁녀에 관해 좀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예를 들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또 최근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이에요.”

“본 공주가 어찌 일개 궁녀 하나가 최근에 뭘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겠니?”

임안은 당당하게 말했고, 생각해보더니 덧붙였다.

“녹두떡을 아주 좋아하긴 해. 어머니가 남은 녹두떡을 그녀에게 주는 걸 자주 봤어. 아주 좋아하더라고.”

* * *

그들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이 경수궁에 도착했다.

방금 허칠안에게서 은자 십 냥을 ‘독직한’ 문지기 환관이 저 멀리 보였다.

허칠안은 다가가 귀싸대기를 날리더니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환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마, 바로 이자가 제 돈을 약탈했어요.”

“너는…….”

얼얼한 얼굴을 감싼 문지기 환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허칠안이 뜻밖에 이공주 마마를 데리고 돌아와 귀찮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진 귀비 궁 안의 사람이다. 재상 댁 문지기도 7품관인데 그는 진 귀비 댁의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신하는 궁중의 태감에게 이렇게 세게 나오지 못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대개 속으로 삼키고 끽소리도 하지 못한다.

“한 대 더 때려라.”

임안은 다른 사람 앞에서 공주가 갖춰야 할 자태를 지키며 싸늘하게 분부를 내렸다.

허칠안은 또 한 대 갈겼다. 문지기 태감은 휘청거렸고, 간간이 이명이 울렸다.

“본 공주의 사람을 감히 공갈 협박하다니. 어마마마의 체면을 봐서 너를 한 번 용서해주겠다. 다음번에 또다시 허 대인에게 무례하게 굴면 바로 고된 일을 하는 지위로 강등시킬 것이다.”

임안의 얼굴에는 서리가 내린 듯했다.

“은자를 토해 내거라.”

‘하찮은 문지기 환관에게 기회를 주길 원하다니. 그녀는 사실 아주 선한 여인이다. 대다수의 황실 사람들보다 순진해…….’

허칠안은 속으로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자기처럼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집적대기 쉽다고 중얼거렸다.

‘임안은 나와 사이가 좋으니 내가 그녀를 잘 감시해야겠어. 그녀가 쓰레기 같은 남자한테 상처받으면 안 돼.’

문지기 환관은 진심으로 원치 않았다. 은자 다섯 냥은 그의 한 달 녹봉보다 많았다. 하지만 이공주의 명령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내놓았다.

그는 따끈따끈한 은표를 꺼내 두 손으로 받쳤다.

“노비가 함부로 무시했습니다. 허 대인께서는 나무라지 마십시오.”

허칠안은 받지 않고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준 건 열 냥이네.”

‘열 냥?!’

문지기 환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변명했다.

“분명히 다섯 냥인데 허 대인께서는 어찌 노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시는 겁니까.”

허칠안은 즉시 임안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마마, 겉으로만 복종하면서 속으로는 따르지 않는 이 자식을 보십시오. 마마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은 게지요!”

임안은 어떻게 해도 포악해 보이지 않는 도화안을 부릅떴다.

“노비가 감히 그럴 리가요, 감히 그럴 리가요…….”

문지기 환관은 한참을 만지작거리더니, 은자 석 냥과 부스러기 은전 한 움큼을 꺼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노비가 가진 건 이뿐입니다.”

허칠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은자를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보상이 따르는 건 아니지만,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숙청될 것이네. 본관이 자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니 이 은자들은 그 값인 셈 치게.”

‘어떤 사람들은 늘 잘못하고도 사과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붙여도 상대방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한다. 사과가 소용 있다면 율법은 뭐 하러 있겠는가……. 내 은자 다섯 냥을 사기 치고 돌려주면 끝인 줄 알았나? 꿈도 크군.’

이어 그는 고개를 돌려 선이 살아있는 동글반반한 임안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말했다.

“기왕 왔으니 마마, 저를 데리고 경수궁에 다녀오시죠. 마침 소직이 복비 사건의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

임안은 즉시 그를 데리고 마당 문을 넘어 뜰로 들어갔다.

“마마, 소직이 찾는 건 랑아라는 궁녀입니다. 저를 도와 불러 주십시오.”

허칠안은 궁녀를 따라 편청으로 들어갔고, 임안은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그는 붉은 치마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으나 붉은 치마는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 * *

그가 편청에 들어가니 궁녀 하나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허칠안이 물었다.

“뒷간이 어디오?”

“대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궁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문을 나서서 환관 하나를 데리고 왔다.

“대인을 모시고 뒷간에 가게.”

허칠안은 태감을 따라 편청을 나와 마당 남쪽의 뒷간으로 갔다. 그는 문을 닫고 지서 파편을 쏟아 유가 버전의 ‘마법서’를 찾았고, 망기술이 기록된 종이를 찢어 기기로 불태웠다.

청기 두 줄기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쓰다 보니 마법서도 반쯤 얇아졌군. 안 되겠어. 이렇게 쓸모있는 물건은 계속 써야 한다고. 춘시가 끝나면 운록서원에 가서 스승 세 분을 좀 봬야겠어. 음, 그들에게 무임승차할 시를 미리 생각해놔야겠군…….”

그는 편청으로 돌아가 차를 마시며 랑아라는 이름의 궁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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