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문전 박대 (1)
‘황소유는 원경 28년에 궁에 들어왔고, 그때 폐하께서는 이미 도를 닦는 데 심취하셔서 더는 내궁에 가지 않았다……. 일개 궁녀는 원경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본 적이 없었겠지…….’
허칠안은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그리고 그는 망기술 효과가 아직 사라지지 않아 국구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그녀를 데리고 곁채에 들어가 재미를 보았지. 그 후 그녀는 더없이 기뻐했어. 자신이 폐하를 모셨다고 여겼고, 폐하가 계율을 깨트리게 만든 유일무이한 여인이라고 착각했지. 그녀는 둘째 치고, 위로는 비빈부터 아래로는 궁녀까지 내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게 폐하의 임행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황제를 사칭하여 궁녀에게 임행하다니……. 어쩐지 황후가 한사코 너를 보호하려 했구나.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군…….’
국구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계속 탐하고 싶어 황후를 뵈러 간다는 명분하에 황소유와 자주 밀회를 즐겼어. 나는 그녀에게서 색다른 느낌을 받았네. 다른 여인과는 달랐지. 하지만 그녀가 임신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 그때서야 나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지. 하여 이 일을 황후에게 알렸고, 누이는 나를 한 차례 호되게 꾸짖더니 내게 다시는 내궁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네. 그리고 황소유를 죽여 멸구하고, 나 대신 뒷수습을 해 주겠다고 약조했어.”
허칠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황소유는 줄곧 자신이 황제의 자손을 임신한 줄 알았기에 그녀에게 유산을 강요한 황후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군요. 나중에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았고요. 알고 보니 그녀를 꾀어내어 간통한 자는 황제가 아니라 국구 나리였다는 걸…….
허나 이미 태아가 사라지고 사건은 매듭지어졌을 때였죠. 그녀는 황후를 거스를 수도 없기에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자결한 것이고요. 하지만 황후께서는 지나치게 마음이 어질어 국구의 모든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셨고, 어약방에서 영험한 묘약을 구해 황소유의 목숨을 살리신 겁니다. 허나 만으로 4년 후 오늘, 화근이 될 줄은 몰랐겠죠.”
“이건 다 누이 탓이네. 누이가 애당초 황소유를 죽였다면 오늘 같은 일이 생겼겠는가!”
국구는 노발대발했다.
“누이가 나를 해친 거야! 다 누이 탓이라고!”
“거짓말하시는군요!”
허칠안이 갑자기 그의 말을 끊고,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황소유만이라면, 황후께서 국구를 위해 죄를 뒤집어쓸 필요가 없습니다. 황소유는 이미 죽었고, 죽으면 대조하여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황후께서 수긍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녀가 인정하셨다는 건 황소유 외에 다른 사람 손에도 약점이 하나 잡히셨다는 뜻입니다.”
“그때 ‘신분’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내가 황후궁에서 몰래 옷감 한 마디를 가져 왔네…….”
여기까지 말한 국구가 노란색 비단을 한번 쳐다봤다.
허칠안은 깨달았다. 알고 보니 황소유가 지닌 노란색 비단이 이렇게 온 것이었다.
‘하지만 궁에 이런 옷감을 가지고 있는 비빈은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옷감 한 조각만을 증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는 게 맞다…….’
허칠안이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문득 회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허 대인은 검시 결과와 단서에 근거하여 국구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자입니다. 하물며 이미 내막을 알고 있는 배후의 주모자는 어떻겠습니까. 만약 어마마마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허 대인을 도와 국구의 범행을 밝혀낼 증거가 자연스레 생길 것입니다. 하물며 저희 국구께서는 굽힐 줄 모르시니…… 뭐, 감옥에 들어가 하룻밤만 계시면 뭐든지 자백하시겠지요.”
회경의 입가에 얼음같이 찬 호선이 그려졌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 내 사고에 관성이 생긴 것이다. 이런 부잣집 공자한테는 아마 약점이 넘쳐 흐르겠지. 문제의 핵심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약점이 있는지가 아니라 황후의 선택에 달렸다……. 비록 무능한 사람이지만 어쨌거나 유일한 남동생이다. 만약 신년이 매일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약탈하는데 정적이 그를 이용해 나를 공격하려 한다면, 나는 신년을 구할까?’
허칠안은 머릿속에 수행원들과 함께 양갓집 규수를 가운데 두고 에워싼 뒤 음탕한 웃음을 지으며 맞이하는 허신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면이 참 아름다워 닭살이 다 돋네. 음, 신년의 얼굴이라면 강제로 할 필요가 없지. 그의 몸을 탐하는 양갓집 규수는 차고 넘치니깐…….’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황후를 뵈어야겠네, 황후를 봬야겠어…….”
국구는 흥분하여 회경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마치 잘못을 저질렀지만, 마지막으로 누군가 자신을 보호해 주길 갈망하는 아이 같았다.
“폐하께서 폐후하려면 폐후하라시지. 어쨌든 누이도 폐하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자리를 누가 꿰차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지만 회경, 너에게는 외삼촌이 나 하나뿐이란다!”
“입 다무십시오!”
회경은 보기 드물게 격노하며 사나운 표정으로 격한 말을 내뱉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감정을 외삼촌이 폄하하게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정말 인재가 따로 없구나! 간덩이가 크다기보단 어리석다고 형용하는 게 낫겠다. 뒤는 생각지도 않고 일만 저지를 줄 알고, 늘 누군가 그의 뒤치다꺼리를 해주길 바라다니……. 사고 능력이 떨어지는 열혈 소년 신년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살았던 그 시대로 치자면, 사회적인 질타가 결여된 어른아이지…….’
허칠안은 속으로 쯧쯧거렸다.
관건은 황제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일은 아주 자극적이지만, 진정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이 국구 나리는 참으로 유일무이하다는 점이다.
이 일은 황후가 폐위되든 국구가 응당한 처벌을 받든 모두 황제의 집안일이다. 그와는 큰 관련이 없다.
그래서 그는 마음가짐이 아주 홀가분해졌다. 기껏해야 회경이 좀 마음 아플 뿐이다. 하지만, 국구를 미워하는 회경의 마음을 보니 국구가 설령 머리가 잘리더라도 속상해하지 않을 것 같다.
갑자기 허칠안의 마음속에 신비한 광채가 번쩍였다. 황후는 국구의 친누이니 정말 그를 어찌할 수는 없을 테지만 위 공이 어찌 이런 민폐를 용인하겠는가?
설령 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교분이 있다 해도 위 공의 능력으로 성실하게 사람 노릇 하라고 부잣집 공자를 자극하는 일 정도는 완전히 식은 죽 먹기다.
“위 공께서 이 일을 아십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회경이 이 말을 들은 즉시 그를 쳐다봤고, 어떤 생각에 잠겼다.
“위연?”
국구 나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막함에 두려워하던 차였지만 갑자기 악랄해지면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 모든 건 분명히 위연이 계획한 거야. 분명 그자야. 내 아버지를 죽이더니 지금은 또 나를 해치려 하는군. 배은망덕한 놈, 대가 끊어져도 싼 놈.”
허칠안의 작은 머릿속에 큰 의문이 스쳤다. 회경은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그에게 위 씨 집안과 상관가는 대대로 교분이 있다고 말했다.
허나 국구 나리의 태도를 보면 이게 어디 대대로 교분 있는 집안이란 말인가. 철천지원수 집안이라고 해야 맞겠다.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즉시 회경을 쳐다봤다. 그녀 역시 그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국구의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칠안은 목을 가다듬고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위연이 왜 국구 나리를 해하려 합니까?”
국구는 그를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
“내가 말하면 들을 용기는 있는가? 위연이 그해…….”
탁!
절반 쯤 얘기했을까. 허칠안이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려 국구의 말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듣고 싶지 않고, 지금 국구 나리를 야경꾼 관아로 데리고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허칠안이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회경을 쳐다보며 그녀의 의견을 구했다.
회경공주가 말했다.
“데리고 가게.”
“회경,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돼……. 나는 상관가의 독자라고. 네 어머니는 네가 이렇게 하는 데 찬성하지 않을 거야…….”
국구는 허칠안에게 들려 저택을 나갔고, 회경의 분부에 따라 시위 몇몇에게 넘겨졌다. 그들이 야경꾼 관아로 압송하기로 했다.
* * *
허칠안은 말 등에 올라탔다. 방금 찻간에 들어간 장공주가 창문을 열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 대인, 본 공주와 함께 타도 무방하네.”
‘아이고, 이러면 안 되는데. 솔로 남녀가 어찌 함께 마차에 탈 수 있겠어? 여동생과 숙모와도 한 마차에 타본 적이 없다고…….’
허칠안은 말 등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려 금사남목으로 만들어진 호화스러운 마차로 들어갔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준마 두 필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발굽을 내디뎠다. 그렇게 민첩하면서도 안정감 있게 상관 옛 저택 밖의 거리로 나가 황성을 향해 달렸다.
찻간 안에는 푹신푹신한 산양 털 융단이 깔려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푸른색 기룡(夔龍)의 면 깔개가 깔린 부드러운 침상 하나 그리고 큰 의자 두 개와 단단히 못질해놓은 찻상이 있었다.
장공주는 찻상 아래의 나무 궤짝에서 찻잎을 꺼낸 뒤 연기가 나지 않는 수금탄에 불을 붙이고 차를 끓이면서 말했다.
“허 대인, 무슨 조언이 있는가?”
‘이게 바로 고대판 승합차구나……. 이 마차 한 대는 아마 은자 몇천 냥의 가치겠지……?’
허칠안은 속으로 개탄했고, 장공주의 말을 듣고 침음하였다.
“마마께서는 분명 마음속에 결심이 섰을 겁니다.”
회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본래도 국구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일은 그로 인해 일어난 것이니 당연히 그가 끝을 봐야겠지.”
속뜻은 이러했다.
<나는 국구를 넘길 작정이야.>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황후마마께는 여전히 은폐한 죄가 있습니다.”
허칠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죄는 크다고 할 수도, 작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신다면 폐후할 필요 없이 가벼운 형벌로 그치겠지요. 반대로 원경제께서 이 기회를 빌려 폐후하실 수 있습니다. 죄목도 충분하고요.”
허칠안이 아는 바에 따르면 이 황제는 소유욕과 권세욕이 강하다. 이런 사람은 속이 깊지만, 마찬가지로 만만하지 않다.
“어마마마께서 은폐했다고 누가 그러느냐. 국구가 복비 사건에 대해 알게 된 후에 자신의 행실이 머지않아 발각될 걸 알고, 사람을 보내 어마마마한테 애걸복걸한 것이다. 어마마마는 궁궐에 화를 불러오는 이런 짓을 한 국구가 몹시 원망스럽지만, 혈육의 정을 생각하여 국구를 대신해 죄명을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회경공주의 표정과 말투는 늙은이처럼 차분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맞아. 이게 바로 실체야’라고 써 있는 듯했다.
“그건…….”
허칠안은 탄식했다.
“공주마마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맙소사. 이 여인을 아내로 들이면 밀애를 나누거나 바람피우기 쉽지 않겠네.’
“본 공주는 국구가 마치지 못한 그 말이 아주 궁금하던데, 허 대인은 왜 말을 끊은 거지?”
장공주가 가볍게 입을 뗐다.
허칠안은 정성을 기울여 새긴 듯한 회경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주시하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방금 국구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거죠? 소직은 모르겠습니다. 마마께서 알고 싶으시다면, 이따가 소직이 마마를 대신해 심문하겠습니다.”
그는 방금 고의로 국구의 말을 끊었다. 이 일은 위연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허칠안에게는 삼가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궁중의 비밀이다.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두 번째는 위연과 관련된 비밀이다. 위연은 그의 직속 상관이자 빽이다. 경성에서 계속 살아남고 싶다면 반드시 위연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위연의 비밀들에 관해 그가 알아서는 안 된다.
위연이 직접 그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
회경은 능청스럽게 웃더니 화제를 돌렸다.
“황후의 일은 허 대인이 걱정할 필요 없네. 위 공께서 처리하실 거야. 네가 해야 할 건 배후의 그자를 찾는 일이지. 허 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칠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자사(紫紗) 주전자의 밑바닥을 그을리는 청홍색의 불길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