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진상(眞相)
두 사람은 즉시 빙고를 나왔다. 저 멀리 환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이 태감 좀 성실하네…….’
허칠안은 걸어가서 말했다.
“회경공주마마와 궁을 나갔다 올 것이니 자네는 먼저 가서 쉬게. 오늘 일은 서둘러 폐하께 보고 드리지 말게.”
환관은 그를 쳐다보며 말을 하려다 말았다.
“할 말 있으면 하게. 우물쭈물하지 말고.”
“허 대인, 노비는 좀 겁이 납니다.”
‘무서워하지 마. 살살 할게…….’
허칠안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알면 안 되는 것들은 자네가 알지 않게 할 것이야. 자네는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돼.”
환관은 그때서야 한시름 놓았다.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됩니다.”
* * *
허칠안은 원래 회경과 함께 마차를 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야박하고 의리 없는 회경은 그에게 준마 한 필을 내 주었다.
허칠안은 말등 위에 앉아 공주의 마차를 따라 국구의 저택으로 가자니 저도 모르게 자신이 아끼는 암말이 떠올랐다.
그는 어제 자객을 맞닥뜨렸을 때 암말을 내쫓았고, 자객 세 명을 죽인 뒤에는 관아에 가서 상처를 치료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암말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아침, 궁에 들어가기 전에 동료에게 암말을 찾으러 가라고 분부했다.
회경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티 없는 이목구비, 잘 빠진 콧날, 산뜻하고 붉은 입술, 깎은 듯이 정교한 입술 선, 아름다운 눈동자는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설령 어마마마께서 국구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쓴 게 확실하다고 해도 배후의 그자는 여전히 찾아내지 못했네.”
회경이 탄식하며 말했다.
허칠안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제가 더 이해되지 않는 건 배후의 그자는 왜 지금에 와서야 황후마마께 손을 대는 걸까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국구의 저택은 황성에 있다. 허칠안과 장공주는 국구의 저택에 도착하자 수위에게 물은 뒤에야 국구가 황성에 있지 않고 내성의 옛 저택에 있다는 걸 알았다.
“국구가 언제 옛 저택으로 이사 갔는지 가서 물어보게.”
회경은 창문을 열고 수행하는 시위에게 분부했다.
시위가 물어보더니 대답을 전했다.
“오늘 아침이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원경제가 오늘 아침 조회에서 폐후를 논했다고 했는데…….’
허칠안은 무의식적으로 회경을 쳐다봤고, 그녀도 자신을 쳐다보았다.
“상관 옛 저택으로 가자.”
회경공주가 차갑게 말했다.
금사남목으로 만든 호화로운 마차가 천천히 황성을 빠져나가 반 시진 넘게 달려 상관씨 옛 저택에 도착했다.
예상과 달리 상관씨 옛 저택은 한 채에 세 동이 딸린 대원(大院)이었다. 규모는 허칠안이 산 호화주택보다 딱히 크지 않았다. 물론, 정교함과 사치스러운 정도를 논하자면 허부에 비해 훨씬 월등했다.
게다가 이곳에는 수위가 많았다.
허칠안은 마차가 천천히 멈추는 틈을 타 오는 길에 준비한 망기술 종이 한 장을 품에서 집어내 기기로 불을 붙였다.
마차가 상관 저택 밖에 멈추자 회경은 휴대용 의자를 밟고 내려와 곧장 저택으로 들어갔다. 입구의 시위는 가로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중에 회경과 허칠안은 상관씨의 집안 내력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상관씨는 부귀영화를 누리던 명문가가 아니었다. 외조부 상관은 청관(靑官)으로 호부좌시랑(左侍郞)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상관 황후가 봉서당의 안주인이 되고 난 뒤의 일이다.
이전에 상관가는 작은 가문에 불과했다. 회경의 외조부 상관배(上官裴)도 어사까지밖에 하지 못하여 정6품에 그쳤다.
“위 씨 집안과 상관가는 대대로 교분이 있고, 위 공이 어린 시절에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상관가에서 공부했어. 외조부께서는 그의 절반짜리 학업 은사인 셈이지.”
회경공주가 말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오늘에서야 위연과 황후의 족보를 알았다.
“그럼 위 공께서는…….”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궁금한 점을 물었다.
“어떻게 궁에 들어가시게 된 겁니까?”
회경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 * *
앞마당을 지나자 관현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별당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얇은 면사를 몸에 두른 일고여덟 명의 무희가 악사의 퇴폐적인 연주에 맞춰 나풀나풀 춤을 추고 있었다.
허칠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교방사에서 이런 장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아무리 교방사의 무희라 해도 별당 안의 저 여인들처럼 대담하게 입지는 않았었다.
그 여인들은 복대도 차지 않고 내의도 입지 않은 채 얇디얇은 망사 옷만 한 겹 걸치고 요사스러운 몸짓을 뽐냈다.
* * *
별당 안, 주인석에는 피부가 희고 외모가 출중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팔자 수염을 기른 그는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미인을 끼고 있었다.
그는 음탕한 눈빛으로 나풀나풀 춤을 추는 무희들을 감상했다.
그의 양옆으로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손님 몇몇이 앉아 있었다.
허칠안은 이 터무니없는 호색가 국구를 한층 더 잘 알 수 있었다. 친누나가 곧 폐위될 마당에 그는 여전히 여기에 앉아 마음껏 여색에 빠져 지냈다. 더 황당한 건 황후는 그럼에도 그를 위해 죄를 뒤집어썼다는 점이다.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남동생바라기들이 언제쯤 일어설 수 있을까.
장공주는 별당 밖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허칠안을 쳐다보았다.
허칠안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여 패도를 빼 들고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칼집으로 쾅쾅쾅 힘껏 문틀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방을 점검하겠습니다. 남자들은 왼쪽에 웅크려 앉고, 여자는 오른쪽에 웅크려 앉으십시오. 머리를 감싸고 신분증을 꺼내십시오!”
춤에 심취해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때서야 밖에 서 있는 허칠안과 회경공주를 의식했다.
무희들은 춤사위를 멈추었고, 악사들은 더 이상 연주하지 않았다. 팔자 수염을 기른 국구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회경이 문턱을 넘어 별당 안으로 들어가 냉랭하게 말했다.
“모든 자들은 대당에서 물러가거라. 이곳에 백 보 이상 접근해서는 안 된다. 명령을 어기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허칠안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칼자루를 튕기자 칼집에서 패도가 반촌(半寸) 나왔다. 그는 별당 안의 모든 사람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아직도 썩 꺼지지 않습니까?”
악사와 무희 그리고 손님들이 소리를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가지 말거라, 가지 마…….”
국구는 큰소리로 외쳤지만 흩어지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고, 허칠안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어디서 나타난 개자식이냐. 여봐라, 여봐라…….”
허칠안은 속으로 회경이 외삼촌을 미워하고, 가장 첫 번째로 의심한 사람이 국구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전히 24K 순금 부잣집 공자였다.
국구가 몇 차례 소리를 질렀으나 밖에 자신을 지원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자 더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회경공주를 바라보았다.
“회경, 궁 안에 있지 않고, 외삼촌 저택에는 뭐 하러 온 것이냐.”
“아바마마께서 어마마마를 폐위하겠다고 하신 일을 알고 계시는지요?”
회경의 목소리는 엄동설한의 눈바람처럼 으슬으슬 한기가 가득했다.
“아바마마께서 오늘 조회 때 폐후를 제의하셨다고 합니다. 국구는 명색이 어마마마의 친남동생이신데 저택에서 음주가무를 즐길 여유가 있으신가요?”
“당연히 알지.”
국구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였다.
“하지만 내게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내가 위연도 아니고 내가 폐후하지 말라고 말하면 폐하께서 동의하시겠느냐?”
“국구께서는 아바마마가 어마마마를 폐위하려는 이유를 아십니까?”
장공주가 물었다.
“누이가 사황자를 태자로 삼으려고 동궁의 그분을 모함해서 그런 것 아니더냐?”
국구가 큰 소리로 말을 마치더니 ‘큭’하고 비웃었다. 그는 마치 황후의 행동을 아주 경멸하는 듯했다.
허칠안은 조심스럽게 회경을 쳐다봤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침착했다. 혹은 냉담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가 마침 황소유의 일을 다그치려는데 갑자기 회경이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막았다. 공주마마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국구, 본 공주가 황명을 받들어 국구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국구는 멍해졌다.
“나를 체포한다고? 무슨 까닭으로?”
회경은 끝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녀 황소유 때문이지요.”
국구는 이 말을 듣자 벼락을 맞은 듯 몸 전체를 떨었다. 그의 눈에는 놀랍고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힘겹게 버티며 말했다.
“무슨 황소유냐? 회경,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그는 뜻밖에 회경공주를 향해 마구 소리를 질렀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회경이 손을 뻗자 허칠안은 빛깔과 광택이 선명하지 않은 노란색 비단 옷감을 건넸다.
그는 받아서 있는 힘껏 국구의 얼굴에 내던졌다.
“원경 31년 봄, 국구가 황소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국구께서 제일 잘 아시겠죠.”
국구는 넋을 잃었다.
그의 얼굴에서 노란색 비단 옷감이 떨어졌다. 그 옷감이 마치 그의 마지막 핏기를 앗아간 듯했다. 눈동자가 풀린 국구는 놀라고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네게 알려 준 것이냐. 누가 너희에게 황소유 일을 알린 것이냐.”
국구가 중얼거렸다.
“당연히 황후마마시지요.”
허칠안이 거짓말로 맞장구를 쳤다.
“헛소리!”
국구 나리는 이상하리만큼 격하게 반응했다. 서서히 그의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흥분해서인지 분노해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상관가의 독자야. 누이가 나를 배신할 리 없어. 그녀가 어떻게 감히 나를 팔아먹겠느냐? 장차 무슨 낯짝으로 아버지를 뵈려고 하는 건가! 나를 속여서는 안 된다!”
허칠안이 말했다.
“황소유가 복비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과거가 밝혀졌고, 황후께서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원경 31년 봄, 국구 나리께서 궁중에서 황소유를 모욕하셨다고요.”
그는 아주 단언했다.
“불가능하다. 황소유는 진작에 죽었어. 황후께서 멸구하실 거라고 내게 약속하셨다고.”
국구는 깜짝 놀라 말했다.
‘사실은 황후께서 멸구하지 않고 황소유 복중의 태아만 지우셨지……. 회경의 말이 맞았다. 황후는 지나치게 마음이 어질고 모질지 못하다…….’
허칠안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장공주를 쳐다봤다.
회경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본 공주에게 말씀하시는 게 야경꾼 지하 감옥에서 자백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아니면 국구께서는 야경꾼 지하 감옥의 형벌을 맛보고 싶으신 겁니까.”
국구는 낙담하여 주저앉았다.
“그래. 황소유가 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건 맞지만 그녀도 원하는 바였어. 그녀는 내가 폐하인 줄 알았거든. 내가 미색을 좋아하지만 청루와 교방사의 여인에 싫증이 났고, 저택의 첩들도 신선함이 사라진 지 오래였지. 점점 바깥의 여인들보다 궁 안의 여인들에게 더 끌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다 누이가 못되게 군 탓이야! 그녀의 봉서궁에 궁녀가 그렇게도 많이 있는데 누이는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했어. 폐하께서는 도를 닦는 데 심취하셔서 여러 해 동안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데 내가 궁녀 한둘 원한다고 뭐 어떻단 말이냐?
누이는 내궁의 주인이니 누이가 동의하기만 하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 내가 폐하의 비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날 나는 봉서궁에 황후를 뵈러 갔는데 청소하는 궁녀 하나를 보았다. 그녀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네. 나는 봉서궁에 새로 온 궁녀인 줄 알고 집적거렸지. 하, 그녀는 내가 폐하인 줄 알고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감히 거절하지 못했고, 내 뜻에 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