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브레인스토밍 (2)
허칠안은 하급 관리를 따라 호기루에 이르러 익숙하게 7층에 올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실 안에는 위연을 제외하고 예상치 못한 손님이 두 사람 더 있었다.
우아하고 고상한 장공주 회경과 준수한 외모에 함축미가 있는 원경제의 적자 사황자였다.
회경의 친오라버니인 사황자는 이목구비가 여동생과 전혀 닮지 않았다. 오히려 원경제와 아주 비슷했다.
회경은 황후와 좀 닮았는데 다만 모녀 둘의 기질 차이가 너무 커서 그 얼마 안 되는 닮은 부분을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세 사람의 표정이 모두 좋지 않았다. 위연은 손에 찻잔을 쥐고 고개를 숙인 채, 마치 허칠안이 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황자는 소리가 들리자 보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회경 역시 허칠안을 보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침음하고 있었다.
“위 공.”
허칠안이 읍을 올렸다.
위연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었고, 회경 옆자리를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앉게.”
허칠안은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에 자객과 맞닥뜨렸다고?”
위연은 찻주전자를 허칠안에게 밀며 알아서 차를 따르라는 의사를 표했다.
허칠안은 방금 밥을 배불리 먹은 터라 차를 한 잔 따랐을 뿐 마시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후의 주모자는 복비 사건과 관련 있습니다. 바로 궁 안에 있지요.”
“자네는 황후를 의심하나?”
위연의 이 말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허칠안은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회경을 쳐다봤다.
회경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걱정이 태산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장공주의 모습은 정말이지 이혼 합의서를 마주한 사람 같다…….’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폐하께서 조회에서 폐후를 거론하셨네. 폐하께서는 복비 사건 배후의 진범이 황후라고 하셨네.”
위연이 말했다.
“???”
허칠안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는 머릿속에 ‘내가 얼마나 잔 거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째 잠에서 깨자마자 마치 한 세기 동안 잠을 잤던 것처럼 세상이 급변한 것 같았다.
복비 사건은 그가 직접 조사했다. 매 단계, 모든 단서는 그가 헤아리고 찾아낸 것이다. 그도 아직 황후가 살인자라고 감히 확정 짓지 않았는데 원경제가 무슨 근거로?
그는 자신이 코난인 줄 아는가? 아니면 적인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이어 회경공주의 한 마디가 허칠안을 또다시 할 말 없게 했다.
“황후께서 인정하셨다.”
‘What are you 뭐라는 거지?’
허칠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소직이 좀 침착하게 생각을 해 봐야…….”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떠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황후를 폐위하려 하시는 이유가 복비 사건 배후의 진범이 황후고, 황후께서 정말 인정하셨다고요?”
사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요됐을 가능성은요?”
허칠안이 추측했다.
“없네.”
위연이 고개를 저었고, 세월의 온갖 풍파를 머금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복비 사건은 자네가 직접 조사한 것이니 단서, 세부 사항 모두 자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네. 다시 제대로 생각해보게. 그중에 의심할만한 점과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는가? 오늘 두 분 전하께서 관아에 오신 건 나와 폐후의 일에 관해 상의하고자 함이야. 또 자네한테 도움을 청하는 의미 또한 내포되어 있다네. 폐하께서 자네의 금패를 아직 도로 거두지 않으셨고, 제공들이 이 일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니 자네는 아직 이 사건을수사할 시간이 있네.”
회경과 사황자가 동시에 허칠안을 쳐다봤다.
사황자가 공수하며 읍을 올렸다.
“허 대인, 수고 좀 해 주게.”
허칠안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회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꽃처럼 우아하고 고결한 공주마마는 맑은 호수같은 눈동자로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상처는 어떠니?”
그녀는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허칠안의 상처에 관심을 가졌다.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니 이혼하지 않을게…….’
허칠안은 ‘응’하고 소리를 내더니 대답했다.
“공주마마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직은 괜찮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복비 사건을 보면, 황후께 태자를 모함할 충분한 동기와 이유가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또한, 제가 어제 밝혀낸 단서에 따르면 배후의 진범 역시 확실히 황후마마를 가리키고 있지요.”
사황자는 흥분하여 말을 끊었다.
“불가능하네. 어마마마께서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
“전하,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허칠안이 회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떤 증거를 갖고 계십니까?”
회경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어마마마께서 스스로 인정하신 거야.”
허칠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네요. 만약 폐하께서 증거가 없으시다면 황후께서 왜 인정하시겠습니까? 기왕 황후께서 인정하셨다면 왜 사람을 보내 저를 암살하려 하셨겠습니까?”
역설적이다.
사황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모르기 때문에 자네를 찾아온 것 아닌가. 허 대인, 괴이한 사건을 여러 차례 해결하지 않았는가. 경성에서 짧은 시간 내에 진상을 밝혀낼 수 있고, 어마마마의 결백을 증명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자네뿐이네.”
허칠안은 자리에 앉은 후로 처음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천천히 말했다.
“제가 막 사건을 인계받았을 때 복비 사건에는 두 가지 가능성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태자께서 정말로 술에 취해 실수하시고 복비를 죽인 겁니다. 둘째, 누군가 태자를 모함하여 동궁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겁니다. 복비의 청풍전을 조사한 뒤 저는 단정 지을 수 있었습니다. 태자께서는 정말 억울하게 누명을 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두 번째 가능성에 속합니다. 누군가 태자를 모함하려 한 것이죠.
이 사고의 흐름대로 조사해 나가다 보니 각종 단서가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황후마마를 가리키더군요. 두 분 전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방금 저 역시 황후마마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황후께서 자객을 보내 저를 암살하려고 한 게 아닌가 하고요.”
“하지만 황후께서 자신이 배후의 진범이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을 안 후 저는 갑자기 이 사건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렇다면 배후 주모자의 목적이 태자를 모함하는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죠. 일석이조입니다.
허나 저는 의문이 있습니다. 황후께서 궁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외출하지 않으시고, 사황자 역시 태자가 아닌데 배후의 주모자는 왜 창끝을 황후께 향해야 했을까요? 바라는 게 무엇일까요? 굳이 내궁의 주인을 노린 건 아닐 테니까요.”
십수 년째 금욕 중인 황제가 있는데 내궁의 주인 자리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위연이 찻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사황자께서 태자이든 아니든 그는 폐하의 적장자시네. 그리고 배후의 주모자는 나를 겨냥한 것이야.”
“???”
허칠안은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위연은 잠시 침묵하더니 설명했다.
“위씨 집안과 상관가는 대대로 교분이 있네. 황후마마의 성이 상관이야.”
‘그렇군. 다시 말하자면 위연과 황후는 정치적인 맹우로 황후의 <외척>에 속하는 거구나……. 어쩐지 회경공주가 위연의 반 제자라더니……. 그래서 복비 사건이 표면적으로는 태자를 모함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위연을 겨냥한 거란 말이지. 위연은 의문의 여지없이 사황자당에 속하겠군……. 복비 사건 하나만으로 동시에 태자당과 사황자당을 처리하려고 하다니, 대단하다…….’
허칠안은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아바마마께서 오늘 조회에서 위 공의 좌도어사 직위를 박탈하셨어.”
회경공주가 말했다.
허칠안은 놀랐다.
‘잉? 이건 불합리한데……. 설령 배후의 검은손이 위연의 세력을 꺾기 위해 황후를 타도하려 한다 해도 그건 위연의 맹우를 해치는 것이다. 다른 형태로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게 맞다. 원경제는 황후가 문제를 일으키자 바로 위연의 중요한 신분을 박탈하고 배후의 주모자가 위연인 것처럼 꾸미는구나…….
잠깐, 가령 황후가 태자를 모함한 배후의 검은손이라면 그 의도는 사황자를 태자로 만들기 위함이겠지. 원경제가 이 일을 안 후에 즉시 위연을 꺾고, 자극한다라……. 뭘 의미하는 거지? 원경제가 위연을 꺼린다는 걸 의미한다.’
허칠안은 갑자기 황후가 낳은 사황자가 아닌 서출인 황자를 원경제가 왜 태자로 책봉했는지 깨달았다.
황후와 위연은 정치적 동맹이다. 만약 사황자를 태자로 세웠다면, 나였어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허칠안은 흩어졌던 생각을 거둬들인 뒤, 사건에 신경을 쏟아 복비 사건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칠안이 생각에 잠기자 다실 안이 조용해졌다. 네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만 들려 왔다.
“태자께서 진 귀비 거처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황소유를 만났고, 복비의 청풍전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태자께서 당시 아버지의 여인에게 비뚤어진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건 확실합니다. 그후 복비께서 추락하여 사망하셨고, 태자께서는 용의자가 되어 대리사에 수감됐습니다. 복비께서는 살해당하셨고, 태자께서는 모함당했다는 사실을 제가 밝혀낸 이튿날 황소유의 시체가 해각에서 발견됐습니다……. 참 공교롭습니다, 참으로 공교로워요.
어쩐지 저는 당시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소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멸구당했는데 살인범은 왜 굳이 해각을 선택했을까요? 사람을 죽여 멸구한다면 시체를 우물에 던지는 것보다 몰래 묻는 게 더 좋지요. 한 발짝 양보해서 말한다 해도 심궁내원에 우물이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백 개가 넘습니다. 굳이 인구가 밀집되고 발견되기 쉬운 해각을 선택하다니요? 이건 틀림없이 고의입니다. 의도적으로 저희가 황소유와 황후의 관계를 알아차리게 한 것이죠.”
“제가 처음에 한 추측은 틀린 건가요? 황소유는 복비를 살해한 범인이 아닙니다. 그녀는 단지 도구일 뿐이죠. 의심의 대상을 황후로 특정 짓게 하는 도구인가요? 아닙니다. 태자를 속여 청풍전에 데리고 간 사람은 분명 황소유입니다. 태자께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그의 곁에 시위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죠. 탄로 나기에 십상이니까요. 또한, 현장에 손을 쓰고 암암리에 난간을 훼손시킬 수 있으며, 복비의 습관을 잘 알고 그녀가 가짜 남편과사랑을 나누려는 사실도 아는 사람. 이 모든 건 틀림없이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만이 가능합니다.
만약 이 모든 걸 황후께서 한 게 아니라면 왜 인정하시려는 거죠? 어쩌면 어떠한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황후께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신 거죠? 이건 필연적으로 이 사건과 관련 있습니다. 사건에 주요하게 연루된 세 사람은 각각 복비, 태자 그리고 궁녀 황소유입니다. 그리고 세 사람 중에 황후와 연관된 유일한 사람은 황소유지요…….”
‘황소유?!’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생각, 추측이 마음속에 스쳐 지나갔고, 허칠안은 자신이 얻은 단서를 결합하여 사건의 경위를 차근차근 짚어나갔다.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 품속에서 빛깔과 광택이 선명하지 않은 노란색 비단을 꺼냈다.
위에는 붉은 연꽃과 글씨 한 줄이 수놓아져 있었다. 원경 31년 봄.
회경공주는 노란색 비단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건 궁녀 황소유 몸에 있던 거잖아?”
“맞습니다!”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세 사람을 둘러보다가 다시 회경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마마, 저희는 황후께서 황소유만 구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두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마마께서 눈치채셨는지 모르겠네요.”
회경이 고개를 저었다.
“첫째, 황후께서 왜 황소유를 구해야 했을까요?”
“어마마마는 마음씨가 어질고 너그러우셔. 궁녀를 구하기 위해 영험한 묘약을 쓰셨다는 게 결코 이상하지 않아.”
회경이 말했다.
‘황후가 어쩌면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아…….’
허칠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황후께서 왜 궁녀를 주시하고 계셨을까요? 봉서궁의 하아까지 파견하면서까지?”
“본 공주가 어마마마께 여쭤봤는데 어마마마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어.”
회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둘째, 궁녀 황소유는 왜 자살하려 했을까요?”
허칠안이 노란색 비단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말했다.
“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