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브레인스토밍 (1)
진시 초, 오문의 옆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늙은 태감이 문 앞으로 걸어와 우렁차게 말했다.
“조회에 참석하십시오!”
떠들썩한 소리가 바로 그쳤다. 문무백관들은 질서정연하게 옆문으로 들어갔다. 문관은 왼쪽에 무관은 오른쪽에 위치하여 경계가 뚜렷하고 분명했다.
오문에 들어간 후 4품 이상은 전(殿)으로 들어가고, 4품 이하는 입구에, 6품 이하는 광장에 섰다.
대전으로 들어간 군신들이 일각을 기다리니 원경제가 여유롭게 걸어왔다.
한 무더기의 시선이 한 나라의 군주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무슨 일인지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단서를 얻고자 했다.
어느 하나도 실패한 것이 없다. 원경제 재위 37년, 황제는 계산적이고 경험이 풍부하여 조정에서 그와 팔씨름을 겨룰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위연과 왕 재상뿐이었다.
이번 조회는 지난날과 별반 다르지 않게 군주와 신하가 평소와 같이 답신(答申)하면 됐다.
“폐하, 엄동설한에 초주(楚州)에서 수만 명이 얼어 죽었습니다. 포정사사에서 이재민을 구휼하느라 전조(田租)를 이미 다 써버렸다고 합니다. 폐하께 간청드리옵니다. 호부에서 예산을 집행하도록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국고가 텅 비었으니 이재민을 구휼하는 일은 현지 유지들에게서 기부 물자를 모으시오…….”
원경제가 답했다.
“폐하, 북방의 오랑캐가 변방을 수차례 침범하였습니다. 봄이 오면 변방의 충돌이 점점 더 격렬해질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 진북왕이 오랑캐의 변방 약탈을 경시하여 변방 도시를 사수하는 몇 안 되는 병사조차 파견하지 않았고, 이에 변방의 백성들을 유랑하게 하여 사상자가 극심합니다. 폐하께서는 죄를 물어 주십시오.”
원경제는 여기까지 듣자 위연을 쳐다보며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
“위 경, 북방 오랑캐는 무슨 상황이오?”
위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난해 말, 북방에 수개월 동안 폭설이 내려 얼어 죽은 짐승이 무수히 많습니다. 신은 당시에 바로 오랑캐가 남하하여 약탈할 거라 예상했지요.”
원경제는 문득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기억나자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 후로는? 오랑캐가 남하하여 국경을 침입하였는데 어째서 야경꾼들이 미리 소식을 받지 못한 건가?”
“신이 소홀했습니다.”
위연이 말했다.
사실 그는 북방의 첩자를 거두어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원경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북방 오랑캐가 남하하여 침입한 일은 위연이 감찰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니 좌도어사 직위를 박탈하고, 일 년간 감봉처분을 내리겠소.”
순간 주변이 조용해지며 군신들은 머릿속에 물음표가 빽빽하게 떠올랐다.
야경꾼들에게 정보를 정탐하는 직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곁다리 업무에 속한다. 게다가 북방 오랑캐가 남하하여 침입하였는데 진북왕은 필사적으로 지키러 나서지도 않았고 싸우지도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 오랑캐가 국경을 침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책임을 어째서 위연에게 떠넘기는가?
하지만 모처럼 원경제가 화포를 위연 쪽으로 돌렸다. 물론 다들 당혹스러웠지만, 문관들은 즉시 기회를 잡았다. 이 기회에 위연의 약점을 들추어 공격하며 성왕의 영명함을 크게 외쳤다.
한 어사가 앞으로 나와 강조했다.
“폐하, 진북왕은 백성들이 전쟁의 피해를 받고 있음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좌시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죄를 물어 주십시오.”
원경제의 대답은 네 글자였다.
“짐 알겠소.”
어사는 달갑지 않은 듯 물러났다.
조회는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갔다. 원경제는 그동안 방치해 둔 정무를 전부 처리하고 군신이 상소를 다 올리자 검지를 치켜들고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망포를 입은 늙은 태감이 앞으로 나서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왔다…….’
제공들의 마음이 일렁였다.
방금은 전부 정상적인 상소였다. 위연의 좌도어사 직위를 박탈한 건 뜻밖이었지만, 원경제가 갑자기 조회를 소집한 건 결코 이런 ‘작은 일’ 때문이 아니었다.
늙은 태감은 손에 있는 조서를 펼치고 우렁차게 말했다.
“짐은 이미 복비 사건의 전말을 명백히 밝혔다. 황후 상관(上官)씨가 궁녀 황소유에게 복비를 살해하고, 태자를 모함하라고 지시하였다……. 짐이 백방으로 문책하였고, 상관씨가 저지른 그 범죄 행위에 관해 숨기지 않고 자백하였다. 질서를 깬 황후는 그 덕이 직위에 어울리지 않으며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않았다. 이에 장춘궁(長春宮)으로 물러날 것을 명한다.”
장춘궁이 바로 냉궁이다.
전(殿) 안팎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위로는 1품 3공부터 아래로는 전(殿) 밖에 있는 군신들까지, 조서의 내용을 들은 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곧 침묵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 아니 될 일이옵니다.”
원경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정색하며, 앞으로 나온 위연을 쳐다보았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를 지닌 위연이 세월의 온갖 풍파를 견뎌낸 두 눈을 빛내며 원경제와 서로를 지긋이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부상서와 대리사경이 나란히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 복비 사건은 아직 삼사의 심사를 거치지 않았기에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원경제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건 짐의 가정사다.”
새로 부임한 형부상서가 재빨리 읍을 올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 황후를 폐위하는 일은 마찬가지로 국가대사이오니 경솔해서는 아니 됩니다. 복비 사건을 삼사에서 심사하게 하신 뒤에 결정하시길 청하는 바입니다.”
물론 조서에서 황후가 이미 죄를 인정했다고 말했지만, 황후를 폐위하는 건 중대한 일이므로 제공들이 상황을 모른다는 전제하에 그들은 원경제의 폐후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좋소!”
* * *
이른 아침, 허신년은 세수와 양치질을 마치고 아침 식사하러 뒤뜰로 갔다. 저 멀리 대청 밖 계단에 치마를 입고 화가 나서 볼을 땡땡하게 부풀리고 앉은 허영음이 보였다.
고독하게 덩그러니 있는 조그마한 형제가 가엾기 짝이 없어 보였다.
“영음, 너 왜 이곳에 앉아있니?”
허신년이 물었다.
허영음이 고개를 들고 보더니 대꾸하지 않았다.
“둘째 오라버니가 묻고 있잖니.”
허신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가 저를 내쫓고 때리기까지 했어요.”
허영음이 고자질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어머니한테 따져줄 수 있어요?”
허신년이 고개를 저었다.
콩알이가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큰 오라버니가 집에 있으면 좋겠어요. 큰 오라버니는 어머니 괴롭히는 걸 가장 좋아하잖아요.”
* * *
허신년은 대청으로 들어가 익숙한 자리에 앉아 녹아가 떠준 죽 한 그릇을 받아 먹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영음이 또 화나게 했어요?”
“아니, 네 형이 나를 화나게 했지.”
숙모가 쌀쌀맞게 말했다.
“형님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숙모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네 형 능력이잖니? 이곳에 없는데도 나를 열 받아 죽게 할 수 있다니.”
허신년이 고개를 숙이고 죽을 먹고 있는 여동생과 부친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허영월이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영음이 오늘 찐빵을 먹는데 한 입 먹고 한 입 토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평생 쉬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형님이 가르쳐 준 거래?”
허신년이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허영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가 덧붙였다.
“영음이 다 토한 뒤에 아까웠는지 도로 주워서 먹으려고 하다가 네 어머니한테 한 대 맞았지.”
“…….”
그가 고개를 숙이고 탁자 밑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씹어 먹다가 토해 낸 찐빵 찌꺼기가 있었다.
“큰 오라버니는 오늘 또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허영월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허신년과 허평지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말했다.
“분명 교방사에 갔겠지.”
* * *
허칠안은 관아 뒤뜰 곁채에서 깨어났다. 넓은 마당이 아주 조용했다. 늙은 하급 관리 한 사람만이 등을 구부리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이불을 얼마 동안 빨지 않은 거야? 퀴퀴한 냄새가 나잖아. 공동 기숙사는 역시 쓰레기야.”
그는 불쾌해하며 이불을 걷어차고, 매가리 없는 발걸음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햇빛이 들어올 수 있게 창문을 젖혔다.
이곳은 야경꾼 관아의 공동 기숙사로 밤에 당직을 서는 하급 관리와 야경꾼이 쉴 수 있게 제공된 장소다. 금라만 쓰는 전용 방을 제외한 나머지 방은 모두 공용이다.
당연히 위생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두꺼운 솜이불에는 얼마나 많은 이의 땀이 묻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사천감의 영험한 묘약 그리고 허칠안의 강한 육체와 정신력 덕분에 왼쪽 어깨의 관통상은 이미 딱지가 앉았다. 며칠 뒤면 완치될 수 있었다.
오히려 천지일도참으로 소모한 정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너무 지쳐 몸이 여기저기 쿡쿡 쑤시는 것 같고, 기가 다 빨렸다.
허칠안은 차를 따라 입가심하고 마당에 가서 맑고 차가운 우물물 한 통을 길어 얼굴을 씻은 뒤 춘풍당으로 향했다.
* * *
“후, 편안하다…….”
허칠안은 하급 관리가 가져다 준 밥을 먹은 뒤 땡땡하게 부푼 배를 어루만지며, 만족스럽게 이옥춘의 의자에 누워 책상 위에 두 발을 걸쳤다.
그는 이때가 돼서야 어젯밤에 자객을 맞닥뜨린 사건에 관해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평소에 나는 신시 초 정각에 황궁을 나서는데 어젯밤에는 어약방의 명단을 조사하느라 유시가 지나서야 황궁을 나섰다. 나를 매복한 자객이 내가 집에 가는 길을 안다는 건 이상하지 않다. 나는 매일 그 길로 가니까.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잰 거지? 야경꾼이 시시때때로 지붕 위에 올라 감시하니 자객 세 명이 옥상에 엎드린 채 나를 기다리기란 불가능하다. 밤중에 순찰하는 야경꾼에게 진작 발견됐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내가 언제 황궁을 떠났는지 알고 있다……. 배후의 주모자는 궁 안의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지 않고선 이 점을 설명할 길이 없다. 황후인가? 내가 어제 막 그녀에게 불리한 단서를 밝혀냈다.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사람을 보내 나를 암살하려고 한 것인가……? 내가 더는 조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약 정말 황후가 한 짓이라면 회경과 이혼할 수밖에 없겠군.”
허칠안은 미간을 문질렀다.
이때 검은 옷을 입은 하급 관리가 춘풍당으로 들어와 허칠안이 안에 있는 걸 보고 순간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
“방금 뒤뜰에 가서 허 대인을 찾았는데 안 보이셔서 대인께서 이미 관아를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허칠안이 여전히 다리를 탁자 위에 걸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오늘은 사건을 수사하러 궁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네. 상처가 다 아물면 다시 얘기하게.”
하급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위 공께서 찾으십니다. 먼저 호기루에 다녀오셔야겠습니다.”
‘하, 보아하니 위연이 어제 자객을 맞닥뜨린 일을 알았나 보군. 분명히 내 전적에 아연실색하겠지…….’
허칠안은 다리를 내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말했다.
“안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