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심검(心劍) (1)
끼이익.
막 닫힌 격자문을 다시 밀어젖히고, 검은색 도포를 입은 국사가 팔오금에 먼지떨이를 낀 채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에 비녀를 무심하게 꽂고 앞머리 몇 가닥을 늘어뜨려 여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미간의 주사(朱砂)는 신선 같은 거룩함을 돋보이게 하여 두 가지의 다른 매력이 신기하게도 어우러졌다.
“국사, 식사하십시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밥을 한 그릇씩 퍼서 각자 밥을 먹었다.
허칠안은 미녀 국사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어 입을 떼지 않았다. 그는 밥을 먹을 때 이따금 그녀를 쳐다보면 눈과 마음이 즐거웠다.
언뜻 보기에 이 여인은 풋풋한 스무 살 같았지만, 보다 보면 생기가 도는 서른 살의 젊은 부인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보면, 제기랄, 분명히 40대 초반의 성숙한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은 도를 닦는 거야, 아니면 요술을 닦는 거야?’
허칠안은 은근히 눈살을 찌푸렸다.
앞서 언급한 착각이 드는 건 당연히 그 때문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인종이 도를 닦는 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금련도사가 서책을 읽고 확인한 점이다.
천지인 삼종(三宗) 중에 어느 하나 정상적인 게 없다. 지종은 공덕을 쌓다가 지쳐 툭하면 마귀가 된다. 인종은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후유증이 있다.
천종, 그들은 그들이 걷는 길 그 자체가 가장 큰 문제다.
하늘에 정이 없어야만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 무정하면 무생물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허칠안이 이해한 대로라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이 즉 화신(化身)의 규칙인 것 아닌가?
“금련도사의 말씀을 들으니 허 공자께서 운주에서 탈태환을 먹었다던데?”
낙옥형이 입을 뗐다.
‘금련도사는 너한테 그걸 얘기해서 뭐 한대…….’
허칠안은 어리둥절했다.
“그렇습니다.”
“빈도가 허 대인의 정혈(精血) 한 그릇을 빌려 약인을 만든 다음, 단약을 정제하고 고질병을 완화하는 데 쓰고 싶네.”
‘무슨 고질병이길래 내 정혈로 약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허칠안은 그녀를 쳐다볼 뿐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적절한 어휘를 고르며 어떻게 거절할지 생각했다.
혈액이라는 건 그의 전생에서는 혈액형을 검사하는 데만 쓰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수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가장 인상 깊은 건 무신교의 주살술이다.
낙옥형은 그의 반응을 진작 예상한 듯, 밥을 한 젓가락 집어 볼그스름한 입으로 집어넣고 여유 있게 덧붙였다.
“이는 금련도사의 제안이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확인을 좀 해야겠습니다.”
낙옥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칠안은 그녀 앞에서 지서 파편을 꺼내고 문자를 보내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은 죽은 사람이란 생각이 떠올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때 낙옥형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여기 있네.”
허칠안이 고개를 돌려 보니 문턱에 웅크리고 앉은 황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고양이는 호박색의 세로 눈동자로 그들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도사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잠깐만요, 황성에 들어오지 못하시는 거 아닙니까?”
황갈색 고양이는 꼬리를 치켜세우고 소리 없이 부드러운 고양이 걸음을 내디뎌 탁자로 뛰어올랐다.
허칠안은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자를 치며 말했다.
“식사 중입니다. 고양이 털을 조심해 주시지요.”
황갈색 고양이는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쳐들고 부드럽게 말했다.
“부상이 다 나은 뒤에는 마음대로 황성을 드나들 수 있네. 허나 황궁은 여전히 들어가지 못하지.”
‘도사의 실력이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뛰어나군…….’
허칠안은 이제 더 이상 풋내기가 아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황성에 숨어들고 싶으면 적어도 4품이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 무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무사 체계의 특징으로는 설령 일품이라 해도 소리 소문 없이 황성에 잠입할 수 없다. 대개는 발각될 것이다.
물론 만약 일품 무사라면 대부분은 단독으로 ‘대봉 경성’ 치트키를 쓸 수 있다.
“그 정혈은…….”
허칠안은 금련도사를 아주 신뢰하지만 여전히 좀 망설여졌다.
이건 마치 누군가 당신의 컴퓨터를 쓰려는 것과 같다. 친한 친구거나 친척이라 해도 당신은 내심 거부감이 들 것이다.
“자네 혈액 속 탈태환의 약성(藥性)을 빌리려는 것이네.”
금련도사는 우선 낙옥형을 쳐다봤다. 그러다 그녀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
“인종이 도를 닦는 길은 평탄하지 않네. 이 점은 자네도 어느 정도 알 테지. 낙 도수는 매월 업을 물려받아 불에 타고 그을리지. 모든 욕망과 감정이 고통을 받네. 탈태환은 옛 육체를 벗어 던지고, 새 생명을 다시 얻게 만드니 당분간은 증상을 완화할 수 있네.”
허칠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담하게 한마디 했다.
“어쩐지 국사께서 남다른 매력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금련도사가 여기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 말을 결단코 내뱉을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금련도사가 대답했다.
“인종 도법(道法)을 심오한 곳까지 수련하면 중생상(衆生相)을 갖출 수 있으며, 자네 내면에서 가장 갈망하는 그 부분을 볼 수 있지……. 내가 말하는 건 애정 면이네.”
황갈색 고양이는 말을 하던 중에 인간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무엇을 보았는가?”
낙옥형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들고 허칠안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허칠안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이 반응은…….’
금련도사는 멍하니 있다가 금세 재미를 붙이고 캐물었다.
“자네 꽤 감명 깊은가 보군.”
‘나는 내가 점잖은 놈인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그저 단순한 호색가였다니……. 이 말에 대한 인상이 여태껏 이렇게 깊어 본 적이 없다…….’
허칠안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기왕 금련도사께서 중재자 역할을 하시니 소인도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낙옥형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원하는 단약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게. 정혈에 따른 보상으로 삼게.”
금련도사는 허칠안이 입을 떼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급할 거 없네. 천천히 생각하게. 인종 도수의 호의는 보통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이야.”
낙옥형은 속기(俗氣)를 띠지 않고 황갈색 고양이를 힐끗 쳐다봤다.
* * *
경수궁.
임안은 시위를 데리고 모친의 거처에 도착했다. 그녀는 붉은색 치마를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진 귀비는 방 안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다가 딸이 뛰어오는 걸 보더니,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눈물 자국을 닦았다.
임안은 두 팔을 격하게 흔들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고 진 귀비 곁으로 걸어가 손을 잡았다. 그녀의 어여쁘고 매혹적인 도화안에 속상한 마음이 스쳤다.
“어머니, 태자 오라버니는 별일 없을 거예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결백한 자는 결백한 법이에요. 울지 마세요.”
얼마 전까지 그녀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허칠안의 순직으로 속상한 게 반, 태자가 불행한 일을 겪고 진 귀비가 매일매일 눈물로 지새는 걸 보고 슬픈 마음이 반이었다.
그녀 또한 딸로서 모친이 늘 울적해하며 매일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니 몹시 괴로웠지만 아무 도움도 될 수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수행 궁녀가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요 며칠 동안, 종실 친왕이 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그들 말로는 밖에 있는 대신들이 태자를 따로 책봉하는 일에 관해 상의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을 들은 마마께서 한바탕 펑펑 우셨고, 이틀 내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어요.”
임안은 격노했다.
“안목 없는 개자식들이 뭣 하러 어머니께 그런 말을 한 거야?”
그녀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숙부들을 개자식이라고 욕했다.
“임안, 당치 않은 말하지 말렴.”
처량한 표정의 진 귀비는 딸의 작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태자 오라버니가 서출이라, 요 몇 년간 사람들이 그가 옳지 않게 책봉됐으니 폐위돼도 좋다는 말을 늘 달고 다녔잖니. 이 어미도 더는 매일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어졌단다.”
진 귀비는 눈을 반짝이며 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건의 진상이 곧 만천하에 드러나는 거니? 그, 허칠안이 정말 곧 밝혀내는 거야?”
그녀는 금세 감격에 겨워 임안의 손을 꽉 쥐었다.
“어머니, 너무 꽉 쥐셔서 아파요.”
기왕 말을 꺼냈으니 임안은 더 이상 속이지 않고 말했다.
“어머니, 황후가 태자를 모함했어요. 틀림없이 황후예요.”
진 귀비의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임안, 허튼소리하면 안 된다.”
“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임안에게 확실한 증거가 있어요…….”
그녀는 즉시 사건의 경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진 귀비에게 알렸다.
“정말 황후라니. 그해 황후께서 여인의 도리를 지키셨다면, 폐하께서 어찌 그녀를 냉궁에 가두셨겠니! 어찌 내 아들을 태자로 세우셨겠어!”
진 귀비는 울음을 터뜨렸다.
“폐하께서는 마음이 어진 분이라 옛정을 생각해서 황후를 폐위하지 않으셨건만, 황후께서는 오히려 몇 년이 지났는데도 태자의 자리를 놓고 다툴 생각을 하는구나.”
진 귀비의 말이 임안의 귓가에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그녀가 뭘 들은 건가?
황후가 여인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아바마마께서 황후를 폐위하려 했다고?
이게 도대체 언제 적 일인 것인가? 그녀는 왜 몰랐던 걸까?
임안의 머릿속에 온화하지만, 미소가 부족한 황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임안은 그녀가 태자 오라버니를 모함했다는 사실에 분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황후가 도리를 지키지 않은 여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임안은 이렇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받아들이니 과거에 인식하지 못했던 사소한 부분들이 전부 이해가 갔다.
예를 들면 황후는 좀처럼 외출하지 않고 내궁의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임안이 기억할 때부터 그녀는 황후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또 다른 예로, 황후는 회경과 사황자에게도 쌀쌀맞았다. 자신과 태자 오라버니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그, 그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에요? 황후께서 여인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니……. 그 남자는 누구예요?”
임안은 흥분하여 진 귀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녀는 부황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니 이런 얘기를 듣고 분노하는 게 당연했다.
“묻, 묻지 말아라…….”
진 귀비는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알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폐하께서 금기시하시니 밖으로 퍼뜨리면 안 된다.”
* * *
“본좌는 신세 지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무엇을 원하는지 허 대인이 직접 말하게.”
낙옥형은 금련도사의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이고, 저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고요…….’
허칠안은 속으로 아우성쳤다.
그는 순간 딱히 떠오르는 보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참지 못하고 황갈색 고양이를 쳐다보며 의견을 구했다.
황갈색 고양이는 한참을 침음하더니 말했다.
“인종은 검술로 구주를 호령하니 검술을 선물하는 게 어떻겠나.”
“하지만 제가 사용하는 건 칼입니다.”
허칠안이 상기시켜주었다.
“칼로 검술을 부릴 수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
금련도사가 허허허 웃으며 반문했다.
‘그건 그래. 알짜배기만 뽑아내서 도법(刀法)에 활용하면 된다. 마치 내가 천지일도참을 시전할 때 사자후를 곁들여 적을 제압하는 것처럼 말이야.’
허칠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낙옥형이 손을 들어 탁자를 가볍게 문지르자 얇은 접본 세 권이 나타났다.
국사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검술 세 편이 있네. 각각《심검(心劍)》,《기검(氣劍)》,《어검(御劍)》이지. 심검은 원신의 도움을 받아 수련해야 하네. 정신력을 마검석(磨劍石)으로 삼아 매일 끊임없이 검을 가는 것이지. 육신은 벨 수 없고, 원신만을 벨 수 있네.”
허칠안은 여기까지 듣자 무의식적으로 황갈색 고양이를 쳐다봤다.
황갈색 고양이는 ‘팅’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튀기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허 대인, 도발하지 말게.”
허칠안은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