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황갈색 고양이
영보관의 단향목 향이 은은한 정실(靜室) 안. 신분과 지위가 남다른 두 여인이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햇살이 격자창을 뚫고 들어와 바닥에 가지런한 네모 반점을 비추었다.
빛줄기에 먼지가 떠다녔다.
낙옥형은 ‘도(道)’자가 새겨진 부들방석 위에 등을 지고 앉아 한 손으로는 먼지떨이를 잡아당기며 한 손으로는 찻잔을 받치고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뜨고 맛을 음미하니 촘촘하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돋보였다.
“남치(南梔)가 심은 차는 일반 품종과는 다르군요. 매일 한 주전자씩 마실 수 있다면, 저는 신선을 하지 않겠어요.”
낙옥형이 개탄하며 말했다.
낙 도수 맞은편에는 짙은 남색의 화려한 긴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현란한 장신구를 한 채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얇은 면사에 가려져 뺨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였다. 그녀는 오직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와 잘 다듬어진 정교한 눈썹만을 드러냈다.
“이 차는 3년에 세 근만 만들어지지요. 대부분 궁에 바쳐서 제 수중에도 얼마 없습니다.”
복면 여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성숙한 여인의 자성이 가득했다.
그녀는 얇은 면사를 젖히고 입을 오므리더니 반대로 물었다.
“최근 경성에 재미있는 일 없습니까?”
낙옥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조당 다툼에는 관심이 없지만,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하고 감칠맛 나는 게 조당 다툼 아니겠어요? 사건이라면 세은 사건부터 상백 사건까지 오고 가며 수도 없이 들었을 테고……. 여기는 경성입니다. 당신한테 들려줄 사건이 어디 그렇게 많겠어요?”
“복비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 아닙니까?”
복면의 여인은 마치 웃는 듯 눈썹을 구부렸다.
“이 사건도 그 동라가 책임지고 조사합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저도 잘 모르지요.”
낙옥형이 찻잔 안의 차를 ‘꼴꼴꼴’ 마신 뒤 또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어쨌거나 황제의 집안사이니 만약 관심이 있다면 회경공주를 찾아가 물어보세요.”
“됐습니다. 황실 사람을 상대하면 기분 나빠요.”
여인은 고개를 저었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동라와는 두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좀 밉살스럽더군요.”
“그와 만난 적이 있어요?”
낙옥형이 어리둥절했다.
복면의 여인은 대답하더니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찻물을 묻혀 찻상에 돼지머리를 하나 그리고, 눈썹을 구부리며 콧소리를 냈다.
“제 향낭을 주워가놓고 돌려줄 생각이 없더군요.”
낙옥형은 고개를 끄덕였고, 주제에 맞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자는 보통이 아닙니다. 위연이 매우 총애하며 모든 힘을 쏟아 양성하고 있지요. 시간이 흐른 뒤 장차 대봉에 전도유망한 고품 무사가 또 하나 나올 것입니다.”
그녀는 얇은 면사 아래로 입을 삐죽거렸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높아 봤자 얼마나 높겠어요? 진북왕이 계시는 한, 대봉의 무사는 고개도 들지 못합니다. 그는 일개 동라일 뿐인데요.”
낙옥형은 웃었다. 그 동라는 타고난 자질이 좋아서 위연의 총애를 받을 뿐만 아니라 지종에게도 지서 소지자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천하에는 영웅이 셀 수 없이 너무 많다. 그는 단지 그중에서 유독 뛰어난 한 사람일 뿐이다.
“저는 오히려 그의 사건 해결 능력을 아주 높이 삽니다. 파란만장한 사건들, 그 과정이 재미있더군요.”
복면의 여인이 말했다.
낙옥형은 말을 하려다 말고 볼에 갑자기 매혹적인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남치, 당신 먼저 돌아가세요…….”
복면의 여인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입구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정 안 되면 원경제를 따르세요. 아니면 남자를 찾아도 좋습니다. 매달 허열(虛熱)로 몸을 태우니 도수가 탕부(*蕩婦: 방탕한 여인)로 변할까 봐 정말 두렵습니다.”
낙옥형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복면의 여인은 정실 문을 열고 처마 아래로 걸어가 청석반(靑石板)을 깐 작은 길을 따라 뒤뜰을 떠났다.
“후…….”
낙옥형은 타는 듯한 숨을 내뱉으며 찻상을 받치고 일어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정실을 나왔다.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에 홍조가 가득 퍼졌고, 촉촉한 눈은 촘촘한 그물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풍덩…….
낙옥형은 몸을 훌쩍 날려 뒤뜰에 있는 작은 못으로 뛰어들었다.
얼음같이 찬 연못물이 아리따운 여도사의 몸을 집어삼켰다. 삽시간에 연못 수면에서 ‘치직치직’ 소리가 나더니 수면이 두텁고 단단하게 얼었다.
한파가 주변의 석가산과 정자에 불어닥쳐 겉면을 얇고 투명한 얼음 결정체로 뒤덮었다.
또다시 일각이 흐르고, 연못이 점점 융화되더니 실오라기 같은 증기가 솟아올랐다. 이어서 수면 위로 기포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더니 ‘퍽’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콸콸콸…….
점점 더 많은 기포가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이내 증기가 점점 더 조밀해지더니 연못 전체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30분 동안 지속됐다. 수위가 십여 센티미터 낮아지고 들끓던 연못이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지만, 습하고 뜨거운 기류가 뒤뜰 상공을 배회하며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낙옥형은 수면을 뚫고 나왔다. 촉촉한 눈망울에 비녀가 빠지고 새까만 머리가 새하얀 얼굴에 닿아 비할 바 없이 아름다웠다.
야옹~.
고양이의 살랑살랑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바깥 담에서 넘어와 씩씩한 몸짓으로 낙옥형 뒤의 석가산으로 뛰어올라 얌전하게 웅크리고 앉았다.
“허열로 분신하면 도기(道基)를 녹일 것이야. 낙옥형, 기껏해야 3년을 더 버틸 수 있을 걸세.”
황갈색 고양이는 입에서 사람의 말을 내뱉어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부드러운 목소리를 전했다.
“사형,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낙옥형은 아름다운 눈이 반쯤 잠긴 채 물속에 몸을 담갔다.
“자네에게 바른길을 인도하러 왔네.”
황갈색 고양이가 말했다.
“사천감의 탈태환이 자네의 증상을 완화할 수 있네. 지금은 욕(欲)이라면 앞으로는 탐(貪), 진(嗔), 치(痴), 한(恨)이겠지……. 괴로울 일만 남았네.”
“아이고, 도문 삼종 중에 유일하게 천종만이 인간 세상의 번잡함으로 시달리지 않지요. 어쩌면 천종의 이념이야말로 옳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낙옥형이 눈을 뜨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종은 정과 의리를 끊고 천지와 동화되어 슬픔과 기쁨, 사랑과 증오가 없지요. 설령 우화(羽化)하여 신선이 된다 해도 자아를 잃을 것입니다. 이는 좋지 않아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탈태환이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감정은 줄곧 저 인종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절대로 단(丹)을 주지 않을 겁니다.”
황갈색 고양이는 서두르지도 미루지도 않으며 말했다.
“허칠안이 탈태환을 복용한 적이 있네. 약효가 채 가시지 않았으니 그에게서 정혈 한 그릇을 뽑아 약인(藥引)을 만들게. 제련해낸 단환(丹丸)이 탈태환보다는 못하지만, 급한 불은 끌 수 있네. 그가 빈도의 체면을 어느 정도 봐 줄 것이네.”
낙옥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사형께서는 자신을 돌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사형께서 분열한 그 마성(魔性)이 사형 대부분의 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지금의 잔혼(殘魂)으로 마귀를 없애고 싶다는 건 허황된 망상일 듯합니다.”
황갈색 고양이는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때가 되면 사매가 나서서 서로 도와야 하네. 물론, 내가 마귀를 굴복시킬 자신이 생기는 그날, 지서 파편 소지자들 대부분은 이미 성장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사매는 곁에서 상황을 장악하기만 하면 되네.”
낙옥형은 눈썹을 찌푸렸다.
“사형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일품에 들어서지 않는 이상 제 상태로 만약 인과 관계에 얽매인다면, 아마 죽음밖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사매가 일품으로 들어설 수 있게 내가 도울 것이네.”
낙옥형이 고개를 홱 돌려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황갈색 고양이를 쳐다봤다.
“사매는 왜 원경제와 쌍수하지 않는 것인가?”
황갈색 고양이는 발을 핥고 싶었는지 발톱을 들었지만 이성이 습성을 이겼다.
“그는 기운이 충분치 않습니다.”
낙옥형이 말했다.
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원경제와 쌍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었다.
황갈색 고양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자네가 그의 기운을 빌려 악업(惡業)을 억제할 뿐이니 더욱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것이야. 그다음에는? 분명 다음 계획이 있을 것 아닌가?”
낙옥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황제가 자리에 앉길 기다리는 것이지요.”
‘새로운 황제라…….’
황갈색 고양이는 문득 모든 걸 깨달았고, 별안간 눈살을 찌푸렸다.
“대봉은 지금 나날이 국력이 쇠약해지고 있기에 대가 지날수록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네. 그리고 원경제의 대를 이을 아들 중에는 쇠퇴하는 나라를 다시 일으킬 만한 주인이 없네. 이 점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야.”
낙옥형이 웃으며 말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건 꼭 제왕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위연이라는 제국의 봉보장(縫補匠)이 있지 않습니까. 원경제가 서거하기만 하면 그가 떠받치고 깨끗하게 숙청한 뒤 새로운 황제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제국은 고질병을 털털 털고 나날이 번성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네는 장차 국력이 회복되면 새로운 군주와 쌍수할 작정이로군…….”
황갈색 고양이는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가로저었다.
“이 일은 급하지 않네. 대봉의 국력이 쇠약해진 원인은 간단하지 않아. 배후에 얽힌 일이 너무 많네. 곰곰이 생각할수록 골치 아프지.”
낙옥형은 눈살을 찌푸렸다.
“깊이 있는 안배를 논하자면 사형이 위연에게 뒤지지 않지요.”
“빈도 역시 추측일 뿐, 뚜렷한 건 아직 없네.”
황갈색 고양이는 말을 마치더니 또 말했다.
“참, 이묘진이 경성에 온다고 하네. 자네가 사호를 불러들여서 그래. 그는 명색이 인종 제자이니 천종 성녀를 응대하는 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지.”
“그건……. 그들 모두 천지회의 구성원이니 그들이 자기편끼리 서로 죽이게 놔둘 순 없지요.”
낙옥형은 그에게 뒤통수를 투척했다.
‘좋아……. 그때 가서 허칠안을 내세워 두리뭉실하게 수습하지 뭐…….’
황갈색 고양이는 속으로 남몰래 생각했다.
* * *
어약방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늙은 태감이 책장에서 접본 한 권을 뒤적여 찾아냈다. 그는 사건을 조사하러 온 허칠안에게 접본을 건네며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약방의 수입과 지출 기록은 5년에 한 번씩 정리합니다. 대인께서 몇 년 뒤에 오시면 찾지 못할 겁니다.”
* * *
편청 안에서 임안은 차 한 그릇을 받치고 눈을 재빠르게 굴리다가 접본을 주시했다.
허칠안은 그녀가 접본을 보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말했다.
“공주께서 찾으시겠어요?”
“본 공주는 이런 거 보는 거 귀찮아해. 보기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녀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허칠안은 어리석은 채미 소저가 어떻게 회경과 베프가 됐는지 이해 가지 않았다. 이치대로라면 이들은 유유상종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저채미는 임안과 함께 있어야만 확실히 찰떡궁합이다.
“마마께서는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우나 다만 천부적인 재능이 다른 곳에 있을 뿐입니다.”
허칠안이 접본을 펼치면서 말했다.
“제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공주마마처럼 총명하기 그지없죠. 다만 학문을 익히는 데에는 천부적인 자질이 없더군요.”
“그럼 어디에 있는데?”
“요리책을 외우는 데요.”
“…….”
이 접본은 원경제 32년에 어약방에 있는 모든 단환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물건이었다.
황소유의 부상 정도를 보면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단환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찾기에 쉬웠다. 어약방에 ‘구사일생’의 단약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물은 뒤 약 명칭 순서대로 찾기만 하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허칠안은 차 한 잔이 끓는 시간 동안 찾았는데도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