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262화 (262/712)

262화. 태자를 만나다

허칠안은 ‘감방’에서 태자를 만났다. 소위 감방이라 하면 다들 허름한 방을 생각한다. 그러나 태자가 갇힌 감방은 사실 깨끗하고 말끔한 방으로 호화롭게 꾸며진 편은 아니지만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었다.

태자는 방 안에 수감되어 사건이 제대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벗어날 수 없었다.

‘역시 태자답다. 감옥살이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군.’

허칠안은 속으로 감탄했다.

문을 닫은 하급 관리가 물러간 후 그는 읍을 올리며 말했다.

“소직 허칠안,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본 태자를 심문하러 온 것인가? 아바마마께서 자네에게 이 사건을 맡으라고 하셨는가?”

태자는 탁자에 앉아 허칠안을 훑어봤다.

“삼법사가 얼렁뚱땅 책임을 회피하며 이 일에 개입하길 원치 않았기에 저 같은 구제 불능을 찾으실 수밖에 없으셨겠지요. 어쨌든 저는 미움을 산 사람이 이미 충분히 많습니다.”

허칠안은 어깨를 으쓱하고 탁자에 앉아 물 한 잔을 따랐다. 그의 이런 행동거지들을 태자는 모두 눈에 새겨 두었다.

“태자 전하께서 그날의 일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태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천천히 말했다.

“그날 본 태자는 어머니 처소에서 점심 식사를 마쳤네. 그러고는 쌓인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시위를 데리고 동궁으로 돌아왔네. 오는 길에 복비 곁의 궁녀 하나를 마주쳤는데 그 궁녀가 말하길 복비께서 본 태자와 담소를 나누고 싶다고 초대하셨다 했네.

본 태자는 그때 술을 많이 마셔서 너무 갈증이 났네. 그래서 탁자 위의 찻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했는데 왠지 모르게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잠이 들었네. 그러다가 비명소리에 놀라 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복비께서 건물 밖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고 본 태자가 가장 큰 용의자가 되었지.”

허칠안은 무표정으로 물었다.

“그때 각루 안에 궁녀는 없었습니까?”

“외청에는 없었고 안은 모르네.”

“그럼 그 궁녀는요?”

“실종됐네.”

‘실종이라…….’

허칠안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는 무엄하게도 두 팔로 탁자를 받치고 태자를 노려보았다.

“태자 전하께서는 궁녀가 실종된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순간 태자는 동라의 날카로운 기세에 찰나 겁을 먹었다.

“본 태자가 비록 감옥에 있지만 바깥의 일을 알아볼 방법은 있네.”

태자가 차가운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순간적으로 느낀 두려움에 화가 치밀었다.

허칠안은 태자가 자신을 만났을 때 차분한 모습을 보인 것을 떠올리며, 그의 말을 믿었다.

“복비께서는 평소에 태자 전하와 접점이 있습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당연히 없네.”

태자는 단번에 부인했다. 명색이 태자로서, 황제의 비(妃)와 어떠한 사사로운 접점이 있을 가능성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됐다.

“그럼 왜 복비께서 사람을 보내 태자 전하를 초대했을 때 태자 전하께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시고 그 장소로 가신 겁니까?”

허칠안이 일침을 가했다.

“본 태자는…… 그때 술에 취해 생각이 주도면밀하지 못했네.”

태자의 표정이 좀 부자연스러웠다.

‘쳇, 여인의 몸을 탐한 게 아니라고?’

사실, 허칠안 또한 태자의 마음은 호색한으로서 잘 알았다. 복비는 용모와 품격이 모두 뛰어난 미인이니 태자가 지난날 상상에 빠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태자는 공교롭게도 그날 술을 많이 마셨고, 하필 또 신장을 보양하고 양기를 북돋는 술을 마셨다. 알딸딸하게 마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면 사람은 들뜬다.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지금은 바로 하러 갈 용기가 생긴다.

그런 사람은 평소에 감히 하지 못했던 말을 입만 열면 마구 내뱉는다.

때마침 태자는 복비에게 초대를 받았다. 심지어 초대를 받지 않았어도 순간 자극받아 갔겠지.

“듣기에는 누군가 태자 전하께 덫을 놓은 것 같습니다.”

허칠안이 분석하며 말했다.

“당연히 누군가 본 태자를 모함하는 게다. 허 대인 역시 이렇게 생각하는군.”

태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사건 수사는 그렇게 주관적이면 안 됩니다. 저는 단지 그중의 한 가지 가능성만을 얘기한 것뿐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지요.”

허칠안이 다시 탁자를 받치고 몸을 숙인 채 태자에게 접근하여 또박또박 말했다.

“그날 태자 전하께서는 술에 취했고 마음이 들떠 저도 모르게 오랫동안 엿보았던 복비가 떠올랐습니다. 어쨌든 폐하께서는 수련에 빠져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시니 말이죠. 태자 전하께서는 욕정이 들끓어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 대담한 마음이 생겼고, 청풍전(淸風殿)으로 발길을 돌려 모욕하고자 하신 겁니다.

한데, 복비께서 끝까지 정조를 지키며 굽히지 않을 줄 어찌 짐작하셨겠습니까? 한사코 따르지 않자 몸싸움을 벌이던 중에 태자 전하께서 실수로 그녀를 각루에서 밀었고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그런 뒤, 태자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 암암리에 궁녀를 제거하고 자신이 화를 당한 것처럼 꾸민 겁니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태자는 탁자를 치며 일어났는데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허칠안, 네가 감히 본 태자를 비방하고 없는 사실을 꾸며 모함하다니.”

“태자 전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단지 소직의 추측일 뿐, 진상이 어떠한지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허칠안은 활짝 웃으며 비위를 맞췄다.

‘쯧쯧, 태자도 생각이 그리 깊지는 않군. 위치를 너무 의식해서 그런가? 이 수준으로 앞으로 어떻게 황제가 된다는 거지?’

태자와 임안 남매는 둘 다 아주 총명한 자들은 아니다. 허칠안은 원경제가 서출 장자를 태자로 삼은 데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심이 점점 짙어졌다.

허칠안은 태자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사천감의 술사가 전하를 뵈러 온 적이 있지요?”

“이 일은 본 태자와 복비, 대봉의 국본과 관련된 일인데 자네는 아바마마께서 사천감의 술사를 믿으실 거라 생각하는가?”

태자가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경성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뒤섞여 살아가며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천감이 비록 황실을 따라야 하고 황조의 운명을 따라야 하지만, 저채미가 6품으로 승직하려면 경성 백성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 이 점을 대략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1품인 감정이 실질적으로 너무 강하기 때문에 사천감은 순수하게 예속되지 않았다. 그는 대봉과의 협력 관계에 더 가까운 것이다.

황태자의 사건에 연루됐으니 원경제가 꼭 사천감을 믿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천감 역시 이런 구질구질한 일에 개입하길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소직이 태자 전하의 몸을 살펴봐야 하니 태자 전하께서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허칠안은 태자의 손을 잡고 그의 손목, 팔 그리고 목덜미를 조사했다. 손톱 자국과 긁힌 자국이 없었다.

“소직이 최대한 빨리 진상을 밝혀낼 것입니다. 만약 태자 전하께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셨다면 당연히 전하께 결백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허칠안은 일어나 읍했다.

“잠깐!”

태자가 그를 불러세워 나지막이 말했다.

“허 대인과 임안, 너무 가깝게 지내는 거 아닌가?”

‘이게 무슨 말이야? 남녀 사이에 거리가 마이너스가 아니라고 무작정 가깝다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는 동시에 낯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남녀 사이에 뭔가 생길 조짐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서로 다 계산이 선다.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차차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임안은 애정 면으로 좀 둔하다. 일단 경험이 적고, 자신의 속마음을 본능적으로 회피한다.

그래서 그녀는 아마 자신이 허 동라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칠안이 모를까?

불가능하다!

허칠안은 전생에서든 이번 생에서든 애정 경험이 풍부한 남자였다. 임안 같이 꽃 피는 시기의 소녀가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내는 믿음, 친근감 모두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된다. 이 소녀가 나를 좋아한다!

태자 역시 남자기에 허칠안이 그의 앞에서 부인하는 건 의미가 없다.

“태자 전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어떻습니까?”

허칠안이 반문했다.

“듣자 하니 아바마마께서 본래 자네를 장락현자에 봉하려 했다가 자네가 다시 살아났다는 걸 알고 취소하셨다지?”

태자가 말했다.

“복비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기만 하면 제가 작위를 부여받는 날이 머지않을 거라고 폐하께서 제게 약조하셨습니다.”

태자가 읊조렸다.

“필경 자작의 지위가 좀 낮으니 만약 자네가 본 태자의 결백을 증명해준다면, 본 태자가 자네를 도와 지위를 좀 더 높여줄 수 있을 걸세. 어떤 일들은 자작으로 충분치 않다는 걸 자네가 알아야 하네.”

허칠안이 비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차라리 제게 황금 천 냥을 하사하시는 편이 그림의 떡보다 더 실속있을 듯합니다.”

태자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자네, 본 태자를 믿지 않는가?”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태자 전하께서 제게 주실 수 있는 건 위 공께서도 제게 주실 수 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제게 주실 수 없는 것도 위 공께서는 제게 주실 수 있지요.”

“허칠안, 위연은 고립된 신하일세. 역사적으로 보면 고독한 신하에게 좋은 말로가 있던가?”

태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허칠안은 허리를 굽혀 읍을 올리고 방을 떠났다.

* * *

허부.

“큰 오라버니는요? 큰 오라버니는 왜 안 보여요?”

허영음이 입안에 육포를 집어넣으며 두리번거렸다.

“네 큰 오라버니는 집에 없단다.”

숙모가 대답하면서 어린 딸의 목에 작은 보따리를 걸었다.

“큰 오라버니가 없으면 나도 안 갈래요. 큰 오라버니 내놔요.”

허영음이 떼를 쓰며 말했다.

“엄마한테는 이런 수법 안 먹힌단다. 그냥 핑계 대고 숙당에 가지 않으려는 거잖니?”

숙모가 손가락으로 콩알이의 머리를 찌르며 말했다.

콩알이는 깜짝 놀랐다. 한참 생각하다가 떠올린 방법인데 어머니한테 한눈에 간파당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똑똑한데 왜 항상 큰 오라버니 때문에 화가 나서 빽빽거리는 걸까?

“어머니, 그럼 저 집에 남아서 둘째 오라버니와 공부하면 안 돼요?”

허영음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일 바보 같은 녀석이 꿈만 크구나.”

숙모가 꾸짖었다.

“네 둘째 오라버니가 곧 춘시에 참가할 텐데 너처럼 멍청한 아이를 챙길 시간이 어디 있겠니?”

“춘시가 뭐예요?”

“과거란다.”

“과거가 뭐예요?”

“시험이란다.”

“시험이 뭐예요?”

“허영음, 너 엄마를 화나게 해서 죽일 셈이니?”

숙모는 화를 내며 떽떽거렸다.

이때 허신년이 청귤 한 봉지를 들고 저택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모친이 동생을 훈계하는 모습을 보고도 개의치 않고 귤을 건네며 말했다.

“영음아, 숙당에 가져가서 먹으렴.”

허영음이 기쁘게 받아서 보니 청색 귤이었다. 작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 이 귤은 맛없어요.”

허신년은 어리둥절했다.

“먹어 봤어?”

숙모가 설명했다.

“지난번에 네 아버지가 이런 청귤을 샀었어.”

허신년은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하거라. 우물쭈물하지 말고.”

“별로 큰일은 아니에요.”

허신년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어제 형님이 아버지에게 은자 오십 냥을 드리는 걸 봤어요. 아버지가 나가서 흥청망청 쓰지 못하게 빨리 거두어 들이세요.”

어머니가 듣더니 버들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허칠안, 밉살스러운 놈.”

사실 허신년은 어머니를 속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비상금을 짜내라고 한 말이었다.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서라도 비상금을 내놓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나가서 흥청망청 쓰지 못한다.

그리고 밉살스러운 형님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일타쌍피, 완벽하다!

허신년은 만족하여 공부하러 서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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