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검시 (2)
원경제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는 눈을 감고 음미하며 책 속의 깊은 뜻을 사색했다. 그런 뒤 인삼차를 받치고 한 모금 마시며 그윽하게 숨을 내뱉었다.
이 틈을 타 대태감이 아뢰었다.
“폐하, 허칠안이 퇴궁했습니다.”
원경제는 잠시 사색하더니 물었다.
“그가 오늘 황궁에서 무엇을 했는가?”
원경제는 어쨌거나 방금 막 허칠안에게 수석 수사관을 위임한 터라, 이 동라가 어떻게 사건을 수사하는지 꽤 관심이 많았다.
늙은 태감은 즉시 환관을 부르러 갔다가 그를 데리고 침전으로 들었다.
환관은 고개를 숙인 채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원경제가 나른한 자세로 앉아 환관을 슬쩍 훑어보더니 말했다.
“허칠안이 무엇을 했는가? 사건에 진척이 있는가?”
늙은 태감이 즉시 말했다.
“폐하께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드리거라.”
환관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허 공자는 우선 임안공주마마의 소음원에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은 석가산 뒤에서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올 때 임안공주마마의 눈시울이 붉어진 게 마치 운 것 같았습니다.”
원경제는 여기까지 듣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그들이 석가산 뒤에서 무엇을 한 게냐?”
늙은 태감은 원경제의 표정을 보고 폐하께서 언짢으시다는 걸 알았다. 공주와 허 동라가 으슥한 석가산 뒤에 갔고, 공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왔다니.
참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다.
“사실에 입각하여 말하거라.”
늙은 태감이 눈을 부릅떴다.
“네……. 임안공주마마께서 당시에 칼을 들고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허 동라는 보자마자 석가산 뒤로 숨었습니다. 노비가 공주마마께 허 동라가 석가산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환관은 황급히 설명했고, 전전긍긍하며 숨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늙은 태감은 즉시 원경제를 쳐다봤다. 그는 폐하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가신 걸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해서 말하거라.”
“그런 뒤 허 대인은 공주마마와 함께 대청으로 들어갔고 노비는 쫓겨났습니다. 마마께서는 허 대인과 대청에서 이각(二刻) 정도 말씀을 나누셨는데 대화 내용은 노비가 알지 못합니다.”
환관은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결국,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노비가 소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허 대인의 태도가 너무 강경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곁눈질로 조심스럽게 원경제를 힐끗 쳐다봤다.
실망스럽게도 원경제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자 환관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뒤 허 대인이 노비와 임안공주마마를 데리고 복비마마의 시신을 보러 갔습니다. 그 과정에 허 대인이 복비마마의 시신을 건드리려 하여 노비가 온 힘을 다해 막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그에게 걷어차였습니다.”
요 자식이 얼마나 성가시게 굴었는지! 환관은 그때 걷어차였던 일을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 두고 허칠안을 망신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원경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수십 년 동안 함께한 늙은 태감이 주인을 대신해 물었다.
“어떻게 검시했는가?”
“한참을 반복적으로 더듬었습니다.”
환관이 대답했다.
그는 그 단어를 과장해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 원경제가 진노하여 대조 확인할 사람이 필요하여 허칠안에게 묻는다면, 거짓말이 곧 탄로 날 것이었다. 환관은 감히 군주를 기만하는 죄를 저지를 수 없었다.
늙은 태감이 물었다.
“그리고?”
“그런 뒤에는…… 떠났습니다.”
환관이 말했다.
“허나 허 대인이 임안공주마마에게 말하길 복비마마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상한 점이 있다?”
원경제가 드디어 다시 입을 뗐다. 그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환관을 주시했다.
“허 대인 말로는 정상적으로 떨어진 거라면 얼굴이 아래를 향하고 등이 위를 향해야 하는데, 복비마마께서는 등이 아래를 향한 채로 돌아가셨지요. 누군가가 밀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했습니다.”
환관은 허 색마의 분석을 있는 그대로 원경제에게 다시 진술했다.
‘누군가가 밀어서 떨어져 죽었다.’
원경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은 천장을 향한 채로 한참을 무어라 읊조리더니 말했다.
“물러가거라.”
환관이 물러갔다.
늙은 태감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
“허칠안은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삼법사가 여러 날 동안 조사해도 속수무책이었는데, 오자마자 바로 단서를 발견하다니요.”
원경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삼법사가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단지 처리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 허나 허칠안이 능력이 있는 건 확실하구나.”
그는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원경제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짐의 명령을 내각에 전해 조서(詔書)의 초안을 잡으라 이르거라. 허칠안의 작위 부여에 관해 다시 논의할 것이다.”
* * *
늙은 태감은 명을 받들고 침전에서 물러났으나 즉시 내각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허칠안의 사건 처리를 감독하는 환관을 찾아가 손을 휘둘러 ‘짝’하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양부님?”
환관은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감쌌다.
“어느 때인데 잔꾀를 부리는 것이냐? 폐하께서 알아듣지 못하실 줄 알았느냐? 네가 방금 생사의 갈림길에 다녀온 건 아느냐?”
늙은 태감이 사나운 표정을 하고 격하게 말했다.
“복비마마의 일로 폐하께서 마음이 초조하시다. 이런 때에 폐하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다니. 네가 오늘 아무 일도 없는 건 순전히 네 명이 길어서다. 네게 허칠안을 감독하라고 했으면 잘 감독하면 될 뿐, 잘못된 감정을 몰래 섞지 말거라.
그가 내궁에서 접촉하는 사람, 하는 일 모두 마마와 공주, 황자들과 연관되어 있으니 조금의 편견과 의견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황실과 황실의 자제분들에게 말참견하게 되는 꼴이다.”
허칠안이 무슨 일을 하든 폐하께서 스스로 판단하실 것이다. 환관이 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주입하는 건 황제의 가족에게 말참견을 하는 격이다.
환관은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며 말했다.
“소자, 알겠습니다.”
대태감은 ‘흥’하더니 말했다.
“허 대인이 너를 쫓아낸 건 너를 위해서다. 정말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는다면 사건이 마무리되는 날이 바로 네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환관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몇 초 뒤 납득했다. 그는 곧 안색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그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허칠안에게 걷어차여서 품었던 앙심이 깨끗이 사라졌다.
* * *
황혼.
허칠안은 말 등에 앉아 애지중지하는 말이 다그닥다그닥 뛰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등황색의 햇빛을 맞았다. 그가 경쾌하게 흥얼거렸다.
“속세의 길을 걷고, 바람에 맞서는 깃발을 받쳐 들고 여색을 즐기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좋은 벼슬아치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다네.”
암말이 다그닥다그닥거리며 교방사 골목에 들어섰다.
허칠안은 골목 입구로 들어가 몸을 비틀어 말에서 내렸다. 그는 골목 입구를 지키는 청의(靑衣) 하인에게 말고삐를 내던지며 내친김에 부스러기 은전을 던져주었다.
‘영매소각의 마당 문이 굳게 닫혀 있네. 문을 닫고 휴업하는 건가?’
허칠안은 서쪽의 석양을 보며 ‘이 시간이면 교방사가 당연히 영업할 텐데’라고 속으로 말했다.
똑똑똑.
그는 고개를 들어 영매소각의 마당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문틈이 드러나자마자 안에 있던 푸른 옷을 입은 어린 하인이 말했다.
“영매소각은 술 손님을 받지 않으니 손님께서는 다른 뜰로 가시는 게…….”
푸른 옷을 입은 어린 하인이 마당 문을 열고 허칠안을 본 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당, 당신은…….”
“나는 너희 아가씨의 허 서방님이다.”
허칠안이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귀신이다!”
푸른 옷을 입은 어린 하인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더니 발을 빼자마자 도망갔다. 그는 두 다리를 아주 빠르게 내디뎠는데, 금방 제자리걸음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허칠안에게 뒷덜미가 들렸다.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허칠안은 다른 손을 들어 올려 아프지는 않지만, 소리는 우렁찬 귀싸대기를 두 대 ‘탁탁’ 때리더니 물었다.
“본관의 손바닥이 뜨끈뜨끈하지 않느냐.”
화끈하고 얼얼한 촉감에 푸른 옷을 입은 어린 하인은 눈앞의 허칠안이 산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다만 그는 허칠안이 어쩌다가 모습이 크게 바뀌고, 심지어는 담비 모피 모자를 쓰고 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드디어 돌아오셨습니까? 부향 낭자가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우며 늘 울적해 있었습니다. 많이 야위었어요.”
푸른 옷을 입은 어린 하인은 황급히 자신의 주인을 위해 호감도를 끌어올렸다.
하인은 허칠안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유가 굉장히 궁금했지만 입을 떼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자께서 돌아오셨다고 즉시 아가씨에게 통지하겠습니다.”
“그냥 그녀에게 손님이 왔다고 말하면서 술을 함께 마시러 나올 건지 물어 보거라.”
허칠안이 말했다.
* * *
푸른 옷을 입은 어린 하인은 서둘러 마당 안쪽으로 들어가 부향의 침실 밖 정원에 서서 소리쳤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는데 술을 함께 마시러 나올 건지 물으라 하십니다.”
부향은 대답하지 않았고 방안에서 여종의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께서 몸이 편치 않으시니 술자리에 나가실 수 없다. 누가 네게 문을 열라고 했건 앞잡이는 필요 없다.”
허칠안이 기침 소리를 내며 말했다.
“부향 낭자가 손님을 모시지 않는다고 하니 그럼 나는 가겠소!”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어 부향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랑?”
그의 목소리가 크게 변해서 부향은 순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일세.”
방 안에서 무슨 물건에 부딪혀 뒤집힌 듯 투닥투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여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가씨, 좀 천천히 가세요…….”
뒤이어 방문이 열렸다. 부향이 흰색 긴 치마를 입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되는 대로 풀어헤친 상태로 거칠게 문을 밀어젖히고 뛰쳐나왔다.
한 사람은 처마 밑에, 또 다른 한 사람은 뜰 안에 서 있었는데 화면이 마치 멈춘 것 같았다.
허칠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밖이 추우니 방으로 돌아가세.”
부향은 그제야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그의 품으로 힘껏 달려들어 처량하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 * *
“사건의 경과가 이러하오. 나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화가 복이 되었어. 얻은 이익이 아주 많아.”
허칠안은 탁자에 앉아 교방사의 맛좋은 술을 마시며 부향에게 자신이 되살아난 전후 관계를 설명했다.
부향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치맛자락이 갈라져 흰 구렁이 같은 긴 다리가 드러났다. 뽀얀 종아리 피부에는 멍이 들어 여종이 고약 바르는 걸 도와주었다.
방금 너무 급하게 뛰다가 부딪친 탓이었다.
지금 부향은 심정이 아주 복잡했다. 그녀는 잃었던 걸 되찾은 기쁨도 있었지만, 감추기 어려운 슬픔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시종일관 허했다.
“허랑이 순직했다는 생각만 하면 제 마음은 여전히 허전해요.”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마음이 아주 땡땡하다는 느낌이 들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