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임안의 격노
허칠안은 위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서방을 나서서 넓디넓은 광장을 걸었다. 곧 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주시하면서 담담하게 웃었다.
“배운 게 있는가?”
“있습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그는 정말 배웠다. 예전에 공부할 때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칠판을 두드리며 ‘너희 다 익혔니?’라고 물으면 눈을 부릅뜨고 엉터리로 ‘네!’하고 대답했던 그런 대답과는 달랐다.
위연이 그와 교류하는 법은 간단하다. 황제 역시 사람이다. 황제 역시 약점이 있고 규칙에 얽매인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거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황제는 만능이 아니다. 황제 역시 욕구가 있다. 당신이 그가 ‘필요로 하는’ 걸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협의의 여지가 아주 크다.
바로 이번처럼 삼법사가 위아래로 책임을 떠넘기며 사건을 질질 끌면 원경제라고 어찌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처벌하는 건데 정말로 관직을 파면하거나 참수할 수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허칠안은 여러 건의 대형 사건을 연달아 파헤쳐 여러 관원들의 미움을 샀으니 바로 사건 수사의 적임자였다.
황제가 쓰려고 하는 사람이 된 이상,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하지만 허칠안은 일단 자작이 되면 노력을 기울였으나 상징적으로 ‘능력이 부족’하여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꼴이다. 이 역시 이치에 맞다.
어쨌거나 그도 신선은 아니니깐.
그때, 원경제의 분노는 예견될 테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자작인 허칠안은 기껏해야 벌을 받을 뿐이다. 형장으로 문책당하거나 감봉되거나 나아가 좌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작위는 박탈한다고 해서 박탈되는 것이 아니다. 작위는 조정에서 사람의 마음을 구슬리는 수단으로 반드시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운 인재여야만 비로소 부여받을 수 있다.
그만큼 작위를 박탈하는 조건 역시 엄격하다. 황제가 박탈한다고 하면 박탈하는 게 절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작위가 너무 헐값인데 어떻게 사람들의 환심을 사겠는가.
원경제가 억지를 부릴지 아닐지에 관해서 허칠안과 위연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엿한 한 나라의 군주가 막무가내로 굴 리 없다. 원경제가 억지를 부리려 하면 허칠안 역시 사건을 질질 끌면 된다.
나라님이 정책을 제정하여 반포해도 아래 관리들은 대책이 있는 법이다.
“허 대인, 멈추시오.”
뒤에서 가늘고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허칠안과 위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원경제 곁의 늙은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손에는 금패를 쥐고 있었다.
“이건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금패이니 허 대인은 언제든지 입궁하여 사건을 수사할 수 있소. 허나 반드시 궁 안의 당차(當差)가 동행해야 하오.”
늙은 태감이 금패를 바쳤다.
허칠안은 받아서 손대중해 보니 무게가 꽤 나갔다.
이 금패는 그가 예전에 받은 것과 달랐다. 금패 정면에는 ‘내(內)’자가 하나 더 붙어있었다. 황궁 안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금패로 등급이 더 높았다.
“공공께 폐를 끼쳤습니다.”
허칠안이 공수했다.
늙은 태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공공,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허칠안이 다시 그를 불렀다.
늙은 태감이 돌아서서 쳐다봤다.
“폐하의 성은에 감읍하옵니다. 본관이 오늘부터 사건 수사에 착수할 것이니 공공께서 제게 당차를 파견해주시길 바랍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당차는 등급이 가장 낮은 태감인데……. 태감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정확하지 않다. 태감은 일종의 신분이자 직위 아닌가. 당차는 등급이 가장 낮은…… 화근을 철저하게 없앤 자이지.’
늙은 태감은 허칠안의 적극적인 업무 태도를 아주 높이 샀다. 문득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지더니 물었다.
“내가 한마디만 더 묻겠소. 허 대인은 어디서부터 조사하려는 것이오?”
허칠안이 입을 벌리고 웃으며 말했다.
“임안공주마마부터 조사하기 시작하려 합니다.”
늙은 태감은 어서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금세 젊은 환관이 뛰어와 위연과 허칠안을 향해 예를 갖췄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위연을 궁성 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런 뒤 당차의 동행하에 발길을 돌려 임안공주의 소음원으로 향했다.
* * *
소음원의 적막한 후원, 임안이 정자에 앉아 정체된 연못물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연못 안의 물은 어젯밤에 얼었는데 이때 따뜻한 햇볕이 비추니 점점 녹으면서 얼음장 몇 덩이만이 남을 뿐이었다.
임안은 5일 만에 훌쩍 여위었다. 동글반반한 계란형 얼굴은 다소 앙상해 보였고, 본래 생기가 넘쳐흐르던 도화안은 흐리멍덩해져 실의가 역력히 드러났다. 물론 상심한 모습도 매력적이지만 지금은 생기가 좀 부족했다.
어려서부터 회경에게 몇 대 맞은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늘 아무런 근심 없이 모든 게 순탄했다.
게다가 친오라버니는 태자고, 자신은 애교를 부릴 줄도 알았다. 임안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법을 알았기에 늘 순탄했다.
하지만 요 며칠간 그녀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보 탓에 마음에 응어리가 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오늘 막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한바탕 울었다. 모녀 둘은 태자의 앞날을 걱정했고 임안은 돌아온 뒤에 정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만약 회경이라면 분명 더할 나위 없이 굳세고 강인하겠지. 그녀는 어떤 일에도 쓰러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니까……. 태자 오라버니가 그런 짓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누가 그를 모함하겠는가……. 사황자, 회경의 친오빠?’
임안의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회경만큼 똑똑하지 않고, 학문도 부족했다. 경전을 외우는 것 역시 아주 얇은 대나무 회초리로 판자를 치며 위협하면 그제야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머금고 몇 편 외우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아둔해보여도 굳이 머리를 쓸일이 없어 안 썼을 뿐, 눈치와 잔머리는 있었다. 그녀는 태자 오라버니가 틀림없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전제하에 머리를 굴려 태자 오라버니가 폐위당할 경우 누가 가장 큰 이득을 얻는지 생각해보았다.
의심할 만한 인물이 바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임안은 이를 생각하니 눈동자가 조금씩 날렵해졌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머리를 굴려 여러 가지 문제와 가능성을 떠올려봤다.
예를 들면 사황자가 어떻게 암암리에 복비를 살해하고 태자 오라버니에게 화를 입혔는지, 또 예를 들면 그와 같은 당파가 누구인지, 황후인지 회경인지 등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지만 그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곤혹스럽고 혼란스러워 머리를 치며 화풀이했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분명 한 번 ‘충동질’해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임안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했다.
그런데 곧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고 눈썹이 쳐지면서 기운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걸.’
“마마, 마마.”
패도를 찬 시위 하나가 급한 발걸음으로 뛰어와 정자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읍을 올렸다.
“동라 허칠안이 만나뵙길 청합니다. 앞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임안은 마치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대략 3~4초 있다가 그녀는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시위 앞으로 걸어가 아름다운 눈을 부릅뜨고 시위를 노려봤다.
“너, 뭐라고 했니?”
“동라 허칠안이 만나뵙길 청합니다.”
시위가 다시 한번 반복했다.
임안은 혈기가 단숨에 얼굴로 치솟아 오르며 전에 없이 격하게 분노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시위의 패도를 뽑아 들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이 새끼야, 너조차 감히 본 공주을 농락하는 게냐? 태자는 아직 폐위되지 않았다!”
그녀가 격노한 진정한 이유는 시위가 허칠안을 가지고 농담했기 때문이다.
시위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는 만약 목을 잘리면 너무 억울하니 물러나면서 설명했다.
“정말 허 공자입니다. 허 공자가 왔습니다. 바로 앞마당에 있으니 마마께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임안은 손에 쥔 패도를 내던지지 않고 서둘러 앞마당으로 달려갔다.
저 멀리 허칠안이 먼저 불처럼 붉은 옷을 입은 임안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의 칼을 들고 출전하는 용사처럼 기세등등한 태도에 깜짝 놀랐다.
허칠안은 속으로 소스라치며 중얼거렸다.
‘내가 어렵사리 생사의 갈림길을 뚫고 나왔는데 마님께서 저를 다시 돌려보내실 계획입니까?’
그는 즉시 임안의 환심을 사려 했던 생각을 접고 석가산(石假山) 뒤로 숨었다.
“허칠안 어디 있어? 허칠안 어디 있냐고? 나와!”
임안은 칼을 들고 앞마당을 두리번거렸으나 익숙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형형한 두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마, 허 대인께선 석가산 뒤에 숨어 계십니다.”
당차 환관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임안의 도화안이 순간 번쩍였다. 그녀는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석가산 뒤로 걸어갔다. 역시나 그자가 보였다.
‘허칠안?’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눈앞에 있는 이자는 남성적이고 외모가 출중했다. 잘생긴 눈썹, 반짝반짝 생기 있는 눈동자, 오뚝한 코, 짙은 라인이 돋보이는 입술.
이어 임안은 허칠안이 손에 들고 있는 줄 달린 나무 인형에 시선이 끌렸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여자는 대갓집 규수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대장군이었다.
허칠안은 헛기침을 하더니 용맹스러운 대장군을 조종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마마, 소직 중국에서 성형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어 그는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로 바꾸어 여자를 조종했다.
“중국이 어디냐?”
용맹스러운 대장군이 말했다.
“아, 운주입니다. 소직이 잘못 말씀드렸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너 운주에서 죽은 게 아니더냐?”
용맹스러운 대장군이 말했다.
“본래는 죽었는데 공주마마에 대한 소직의 한결같은 마음에 염라대왕님께서 감동하시어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에이, 헛소리.”
임안은 재미를 느끼고 키득대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감각이 전해졌다. 어느새 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창피해서 황급히 돌아섰고,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뒤엉켜 말했다.
“오늘 바람이 좀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구나.”
그녀는 성격이 활발하고 까탈스러우며 애교 부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소저로, 사실 이런 수법이 잘 먹혔다. 게다가 연애 경험이 부족하여 쓰레기 같은 남자를 분별하는 능력이 떨어져 전신에 쓰레기 같은 남자를 불러들이는 기운이 만연했다.
물론 허칠안은 절대 쓰레기 같은 남자가 아니다.
이묘진이나 회경이 보기엔 쓰레기겠지만.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모래가 어째 공주마마의 눈에만 들어갔을까요? 설마 공주마마께서 예쁘게 태어나셔서 그런가요?”
임안은 속내가 들통나자 화를 내며 말했다.
“개자식!”
“소직은 개자식이 아닙니다.”
“넌 그냥 개자식이야. 개자식 허칠안.”
“바보 같은 임안.”
“뭐, 뭐라고?”
허칠안이 너무 작게 말한 탓에 임안은 듣지 못했다.
“별거 아닙니다.”
허칠안은 그녀가 우느라 알아듣지 못한다고 얕보았다.
“너 방금 본 공주을 욕한 거지?”
임안이 정색했다.
“아닙니다. 그건 공주마마에 대한 저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허칠안은 진지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