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폐하께서는 사약을 내려 주십시오
이튿날, 어서방.
“사흘이란 시간이 이미 흘렀는데 경들이 짐에게 주는 답변이 고작 ‘사건의 경위가 복잡하고 의문점이 너무 많아 며칠만 더 기한을 늦춰주십시오’인가?”
원경제는 접본 몇 부를 세 대신의 몸에 매섭게 내리쳤다.
대리사경, 형부상서, 위연이 건넨 접본은 엉뚱하게도 일치했다. 마치 서로 숙제를 베낀 듯했다. 그런데 심지어 오답을 베낀 모양이었다.
원경제는 너무 화가 나 탁자를 내리쳤다.
형부상서가 송구스러워하며 말했다.
“폐하, 이 사건은 의문점이 많아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습니다. 소신은 이미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폐하, 며칠만 더 기한을 늦춰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대리사경도 말했다.
“소신의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퇴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경들은…….”
원경제는 손을 크게 휘저으며 탁자 위의 접본과 문방사우를 모두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그러고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짐이 너희의 목을 베겠다!”
세 대신은 즉시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소신은 죽어도 전혀 아쉬울 게 없으나 폐하께서는 옥체를 지키셔야 합니다!”
‘맞춘 대사인가?’
원경제는 화가 나서 폭발했다.
양측의 대신들은 질서정연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항상 위연과 말다툼하길 좋아하는 급사중들도 말을 아꼈다.
이 사건은 당연히 처리해야 하지만, 각계의 의견이 아직 일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자 일파는 어떻게 이 황태자를 도와 죄명을 벗길지 궁리했다.
다른 파벌은 만약 태자가 폐위되면 앞으로 황자들 중에 누가 황태자가 될지 고민했다.
생각은 각자 다르지만 한 가지, 모두가 묵인하는 건 바로 우선 사건을 미루려는 점이었다. 복비의 죽음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이 사건 이후에 얽힌 국본 다툼이다.
경찰, 그 이상의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한차례 불 것이다.
각 당파는 따져보고 줄을 서서 계획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조당의 목적이 일치된 경우에는 설령 원경제라도 무능하게 광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진상을 원치 않고, 그 자리에서 태자를 폐위하지 않는 이상……. 하지만 아마 내각에게 반박당할 것이다.
“폐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소신이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왕 재상이 대열에서 나와 복비 사건을 잠시 들추며 말했다.
“소신이 알기로는 야경꾼 관아의 동라 허칠안이 아직 순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제 기이하게도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작위를 부여하는 일은 폐하께서 철회해주시길 바랍니다.”
어서방 내의 대신들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허씨 동라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대리사경과 형부상서는 마음이 복잡했다.
원경제는 어리둥절하더니 분노를 거두고 위연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위경, 재상이 한 말이 사실이오?”
“실로 그렇습니다.”
위연이 읍을 올렸다.
바로 급사중 한 명이 대열에서 나와 큰소리로 외쳤다.
“장항영이 사건의 경위를 거짓 보고하여 폐하를 기만하였으니 폐하께서는 그 죄를 다스려 주시길 바랍니다.”
원경제는 상대하지 않고 위연을 쳐다보며 계속해서 물었다.
“어찌 그런 상황이 된 것이오?”
“허칠안은 죽지 않았습니다. 반란군과 사투하기 전에 사천감의 탈태환을 복용하여 힘을 다 쓴 후 가짜로 죽은 상태에 들어섰다가 어젯밤에서야 의식을 회복한 것입니다. 장항영이 허칠안이 순직했다고 착각한 건 그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위연이 설명했다.
‘탈태환…….’
원경제는 듣자마자 파리를 먹은 것처럼 혐오스러웠다.
처음에 그가 감정에게 이 약을 달라고 청했으나 감정은 주지 않았고, 이미 없다고 핑계를 댔다.
그런데 지금 그도 구하지 못한 영험한 묘약을 일개 동라가 먹었다고 한다.
“그는 그 약을 어떻게 구한 것이오?”
원경제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사천감의 저채미가 준 것이라 합니다.”
위연이 대답했다.
원경제는 몇 초간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를 부여하는 일은 철회하겠소. 또한, 동라 허칠안에게 속히 짐을 만나러 오라고 전하시오.”
위연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읍하고 말했다.
“네.”
* * *
허칠안은 호출을 받고 오전에 서둘러 황궁에 도착했다. 우림위가 신분을 확인한 뒤 그를 입궁시켰다.
위연이 성문 안쪽에 뒷짐을 지고 서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곁에는 남궁천유가 서 있었다.
허칠안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외쳤다.
“위 공!”
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복비 사건으로 자네를 부르셨네.”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작위를 부여하는 일은 철회되었네.”
‘정말 철회되었군. 이 소식이 발표된 지 3일째인데 이 역시 철회할 수 있다니. 규칙을 지키지 않는구먼…….’
허칠안은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 * *
그는 위연을 따라 어서방에 왔으나 원경제는 없었고, 망포를 입은 늙은 태감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영보관에서 국사를 따라 좌선하고 계셔서 오후에야 돌아오실 테니 기다리시게.”
한 번 기다리는 데 한 시진이었다.
* * *
원경제는 영보관에서 좌선을 마치고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눈을 뜨고 탄식하며 말했다.
“국사, 짐은 언제쯤에야 금단(金丹)을 제련할 수 있소?”
낙옥형은 도포 아래 감추기 어려운 매력적인 몸매 그리고 경국지색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자성을 띤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정무를 내려놓고 도를 닦는 데 몰두하시는 그때 금단이 머지않아 실현될 겁니다.”
원경제는 눈앞의 더없이 아름다운 여도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두 눈 사이의 주사(*朱沙: 진한 붉은색을 띠고 다이아몬드 광택이 나는 광물)는 선녀처럼 더 두드러져 보였다.
원경제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쌍수하기만 하면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다만, 한 나라의 군주라 할지라도 그 역시 인종 도수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2품 고수인 건 고사하고, 설령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해도 쌍수하는 일은 두 사람의 심법(心法)이 어우러져야 하기에 무리하게 요구할 수 없었다.
“국사는 언제 1품에 이를 수 있소?”
원경제가 물었다.
낙옥형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경제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짐은 감정의 생각을 점점 더 내다보지 못하겠구려. 짐이 그에게 탈태환을 받아 내려 했던 그 날, 그는 주지 않았소. 짐이 오늘 일개 동라조차 그 영험한 묘약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누가 알았겠소?”
낙옥형은 눈을 뜨고, 호기심에 물었다.
“동라요?”
원경제는 손을 내둘렀다.
“그자는 언급할 가치도 없소. 짐은 먼저 궁으로 돌아가겠소. 내일 다시 국사와 좌선하며 도를 깨우치러 오겠소.”
그는 마차를 대령시켜 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허칠안이 이미 어서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돌아가지 않았고, 꼼꼼하게 목욕을 마친 뒤 마침내 어물쩍대며 갔다.
* * *
어서방 내에서 허칠안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직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원경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는 탈태환의 일을 언급하지도, 이 동라가 운주에서 세운 공을 칭찬하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며칠 전 복비가 떨어져 사망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 다른 속사정이 있는 듯하니 짐이 자네에게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거라. 그러지 못하면 엄벌에 처하겠다.”
허칠안은 즉시 읍을 올리고 허리를 90도로 구부린 채 큰소리로 외쳤다.
“폐하께서는 사약을 내려주십시오!”
찰나, 원경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허칠안이 이렇게 대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매번 그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소신, 사직하겠사옵니다’라고 외치는 일이 관리 사회의 베테랑 스타일이었다. 이 동라가 더 깔끔하고 명쾌하게 죽음을 청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원경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상석에 앉은 사람은 자극적인 말로 위엄을 과시하길 좋아한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현령까지 모두 이렇게 말하길 즐긴다.
‘짐(본관)에게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자네를 어찌저찌 할 것이네.’
본래 별거 없다. 어쨌거나 신분의 높고 낮음이 유별하니 신하와 하인은 그저 참고 순순히 명을 받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동라가 되받아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되받아치는 바람에 원경제는 잠시 괴로웠다.
원경제는 더욱이 변화가 큰 허칠안을 보니 기분이 더 나빠졌고, 동시에 탈태환은 역시 보기 드문 영험한 묘약임에 개탄했다.
감정은 60년에 고작 세 알을 제련해낸다.
원경제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칠안, 짐이 너를 죽이지 못할 줄 아느냐?”
원경제는 재위한 지 36년째로 제왕의 위엄이 넘쳤다. 마치 어서방 내의 공기가 떨어진 듯했다. 환관 몇몇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용안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제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건 위연뿐이었다.
허칠안은 물론 계속해서 들이받지는 않을 것이다. 당황하지 않고 방금 주먹을 휘둘러 취했던 공격 태세를 바꾸어 고분고분 순종하는 태도로 말했다.
“폐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직이 운주에서 순무 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반란군과 살육전을 벌여 200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소직은 운주에서 심혈을 기울여 포정사 송장보가 무신교와 결탁한 사건을 해결하고, 도지휘사 양천남의 결백을 증명했습니다. 말씀드린 여러 일들은 보잘것없기에 소직은 절대 공적을 내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상백 사건과 평양 군주 사건에 관해서도 소직은 진작에 잊었고, 절대로 과거지사를 다시 꺼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소직의 원기가 크게 다치고 정신이 쇠약해져 깨어난 후에 수시로 두통에 시달려 폐하의 근심을 함께 나눌 힘이 실로 없습니다.”
원경제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순간 모진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 동라는 고의로 사건을 한 보따리 늘어놔 자신의 공적을 부각했다. 그는 먼저 공신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후 몸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 이미 조당의 관료스러운 화법에 숙달했다.
위연이 즉시 말했다.
“폐하, 허칠안은 그저 동라에 불과합니다. 능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정신력과 체력 소모가 막심합니다. 그의 생사는 당연히 아까워할 일이 못 되나 사건이 지체되어 복비께서 억울함을 벗을 방법이 없는 것이야말로 큰일입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허칠안을 보며 말했다.
“자네는 돌아가서 당분간 마음 놓고 상처를 치료하게. 폐하께서는 굶주린 병사를 파견하지 않을 걸세.”
‘황제가 굶주린 병사를 파견하지 않는다라…….’
원경제는 위연을 쳐다보고 잠시 읊조리더니 말했다.
“허칠안, 사천감에 심신을 편안히 하는 약방은 얼마든지 있다. 영보관처럼 영험한 묘약이 부족하지 않지. 네 몸이 편치 않다면 짐이 네게 단약 몇 재를 하사할 수 있다. 네 운주에서의 공은 짐이 마음에 새겼고, 너에게 자작을 추봉할 의사가 있다. 황은이 망극하니 저버리지 말거라.”
허칠안이 말을 끝까지 마치니 원경제가 고의로 난처하게 할 가치가 없는 그저 미천한 인간에 불과했다. 내각에서 작위 부여를 철회하자고 제안하니 원경제는 물타기에 나섰다.
하지만 원경제는 현재 허칠안을 쓰고자 했기에 그에게 이득을 약간 주는 데에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당했다는 걸 알았기에 마음이 언짢았다.
“폐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영명하시고 위풍당당하신 폐하께서는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타나는 황제)십니다.”
허칠안이 큰 소리로 말했다.
원경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짐은 가능한 한 빨리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다.”
“소직 대봉을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경제는 동라가 이렇듯 약삭빠르게 구는 걸 보니 마음이 좀 편해졌고, 담담하게 말했다.
“물러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