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중대한 일
양천환은 손가락을 꼽아 수를 세더니 탈태환을 허칠안의 품으로 던졌다.
“그걸 먹으면 자네는 안심하고 경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걸세. 그때 가서 누군가 물으면 이건 사천감에서 준 단약인데 자네 자신도 생사를 짐작하기 어려워 미리 탈태환을 복용했다고 말하게. 그 후, 약효가 나타났고 환골탈태 상태로 접어들어 죽은 모습과 형태가 같아 장 순무 등이 자네가 전사한 줄 알았지. 하지만 사실 자네는 깊은 잠에 빠졌을 뿐이었네.”
“현재로서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군요. 저를 대신해 감정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허칠안은 등황색의 투명한 탈태환을 주워 손바닥으로 움켜쥐었지만 먹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서신 몇 통을 꺼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자면 아마 경성까지 잘 듯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게 할 겁니다.”
허칠안은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적어도 두 번 죽을 수는 없지요.”
그가 말을 마치고 기기를 뒤흔드니 서신이 종잇조각으로 변해 흩날렸다.
관선이 눈의 장막 뚫고 살얼음을 부수며 천천히 경성으로 향했다.
* * *
사시(巳時),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태자는 여우 가죽으로 된 옷을 걸친 채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경관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는 훤칠하고 빼어나 외관이 아주 뛰어났다.
물론 허칠안은 일찍이 원경제의 아들 중에는 이길 수 있는 자가 없다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었다. 허칠안의 비교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동생 허신년이었다.
하지만 사실 태자는 미남이다. 원경제가 젊었을 때 진 귀비 역시 당대 제일의 미인이었기에 임안처럼 예쁜 딸이 있을 수 있었다. 친오빠인 태자도 당연히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았다.
진 귀비의 궁원에 온 태자는 겉옷을 벗어 마중 나온 궁녀에게 건넸다.
그가 방에 들어서니 실내는 봄처럼 따뜻했고, 사람을 파고드는 그윽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진 귀비는 궁녀 두 명을 데리고 웃으며 맞이했다.
“임안은 왜 오지 않았니?”
태자가 손을 내저었다. 그는 지체할 것 없이 자리에 앉아 궁녀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음…… 이 술맛 괜찮네요.”
태자가 궁금해하며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선물 주신 백일춘(百日春)이야. 자양과 양생의 기능이 있으니 많이 마시렴.”
진 귀비가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궁녀에게 술을 따르라 분부했다.
모자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원경제는 도를 닦는 데 심취하여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후궁들은 진작에 고인 물이 되어 외롭고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비빈들은 궁궐에서 암투를 벌이고 싶어도 싸움을 벌일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태자와 임안은 어머니를 보러 자주 왔다.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드렸다.
“임안은 몸이 안 좋니? 임안을 데리러 간 자가 돌아와서 보고하길 그녀가 방안에 누워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진 귀비는 버들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태자가 탄식했다.
“어머니, 임안도 시집갈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진 귀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수련에만 빠져 계시니 너희 혼사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구나. 황후마마는 적모가 돼서 궁에만 박혀 좀처럼 외출하지 않으시고. 사황자와 회경의 일조차도 관심 두지 않으시니 임안을 어찌 논하겠니.”
태자는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가 생각하기에는 임안을 하루빨리 시집보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진 귀비가 태자를 자세히 관찰하더니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태자는 왜 그런 말을 하는가?”
태자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술을 마셨다.
그는 임안이 그 동라에게 감정이 있다고 더 없이 확신했다. 임안의 나이는 소녀가 이성에 눈을 뜨는 나이인 데다가, 임안은 교만하고 제멋대로지만 사실 아주 순수한 여자아이라서 기본적으로 감정을 농락당하기 십상이었다.
다만 평소에 그녀와 가까워지려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좀처럼 그 끈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일단 그녀의 입맛에 맞는 남자가 나타나면 그런 감정은 번식하여 무럭무럭 자랄 터였다.
임안이 최근에 울적해하는 모습이 바로 그 증거다.
다행히 그 동라는 이미 순직했지만, 태자 역시 임안이 시집갈 나이가 됐다는 걸 깨달았다.
“적당히 마시렴, 적당히…….”
진 귀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타일렀다.
태자는 마음속으로 일을 생각하면서 친여동생의 감정 문제를 걱정하다 저도 모르게 과음했다. 위장이 후끈후끈 타오르는 듯했다.
주변에 있는 외모가 수려한 궁녀들도 이럴 때 보면 매우 매혹적이다.
“어머니, 저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태자는 꺽 하더니 일어나서 물러갔다.
한파가 덮쳐와 실외 공기가 맑았다. 찬바람을 쐬자 태자는 그제야 몸이 많이 편안해졌다.
그는 시위를 이끌고 돌아갔다. 가는 길에 한 궁녀가 길가에서 그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그 궁녀는 태자 일행을 보더니 즉시 마중 나와 예를 갖췄다.
“태자 전하, 복비(福妃)께서 말씀 좀 나누자고 하십니다.”
* * *
임안은 창문을 밀어젖혔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오점 하나 없이 하얀 마당이 들어왔다.
그녀의 눈시울은 복숭아씨처럼 빨갛게 부어올랐다. 방금 개자식이 보낸 서신을 읽다가 또 울었다.
서신에 쓴 어휘는 진지하면서도 날렵하고 해학적이라, 읽다 보니 머릿속에 개자식의 웃는 모습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임안은 더 이상 그런 웃음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자는 운주에서 죽었다. 그는 차가운 관 속에 누운 채 요원한 만 리를 건너 조용히 소리 없이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점은, 자신은 공주 신분이라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어도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불어와 뼛속까지 사무쳤다. 그녀는 손을 뻗어 볼을 만지다가 눈물이 또 흐른다는 걸 알았다.
“울긴 뭘 울어. 노비 하나 죽었을 뿐인데. 분명 개자식이 죽은 건데…….”
임안은 화를 내며 눈물을 훔쳤지만, 닦을수록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마마, 마마…….”
황급히 외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이내 임안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가 ‘쾅’하고 방문을 들이받았다.
그녀의 얼굴은 찬바람에 얼어 시퍼레졌고, 두꺼운 방한화에는 더러운 물기와 가랑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임안은 황급히 몸을 옆으로 돌려 허둥지둥 눈물을 닦았지만, 곧 궁녀의 한마디에 놀라서 넋이 나갔다.
“태자 전하께서 하옥되셨습니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 임안은 실성하여 소리쳤다.
“뭐라고?!”
* * *
어서방에서 원경제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높이 위치한 용의(龍椅)에 앉아 있었다. 대리사경, 위연, 형부상서가 당내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신분은 대봉에서 제일 높은 세 법사(法司)를 대표했다.
위연은 도찰원의 좌도어사다.
“폐하, 이는 검시관이 제출한 보고서입니다. 살펴보십시오.”
형부상서가 복비의 검시 보고서를 건넸다.
대태감이 검시 보고서를 받아 건네자, 원경제는 쓱 훑어보더니 정색하고 물었다.
“복비가 모욕당하진 않았소?”
“그건…….”
형부상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감히 복비마마의 시신을 유린할 수 없어 검시관은 대략적으로 조사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궁중의 나이 든 어멈에게 검사하라 이르시지요.”
원경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짐승 같은 놈은?”
“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침궁에 갇혀 폐하께서 결정 내리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리사로 보내시오.”
원경제는 세 사람을 맹렬한 눈빛으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짐은 사흘 내에 결과를 얻어야겠소.”
“폐하, 중대한 일인 만큼 사흘은 어려울 듯합니다.”
대리사경이 말했다.
“짐은 자네들에게 사흘만 주겠소.”
원경제는 냉담한 얼굴을 했다.
“폐하, 위 공의 수하에 큰 사건을 여러 차례 해결한 인재가 많으니 이 사건을 도찰원에 이관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형부상서가 제의했다.
대리사경 역시 좋다고 생각했다.
“인재가 많다고 하는데 상서 대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오?”
위연은 차분하게 두 대신을 훑어본 뒤 다시 원경제를 쳐다봤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가 이미 운주에서 순직하였습니다.”
형부상서와 대리사경은 서로 쳐다봤다. 큰 사건을 여러 차례 해결한 그 동라가 운주에서 화를 당해 며칠 전에 두 사람은 남몰래 갈채를 보냈더랬다.
그런데 현재, 책임을 떠넘길 자가 사라지니 형부상서와 대리사경은 갑자기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복비가 죽었다. 그녀는 태자에게 모욕당해 수치스러움과 분노를 못 이기고 각루에서 뛰어내렸으며, 난간에 부딪혀서 떨어져 죽었다.
사건의 맥락은 이러하다. 오늘 오후, 태자가 진 귀비 처소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어찌 된 일인지 복비의 궁원으로 갔다.
그 후, 복비가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황실의 체면과 관련될 뿐 아니라 태자의 죄명이 일단 명확해지면 국본(國本) 다툼에도 영향을 미친다. 배후에 연루된 이익이 너무 복잡하여 대리사경과 형부에서는 이 뜨거운 감자를 받고 싶지 않았다.
원경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위연이 말한 자가 운주에서 죽은 그 동라 허칠안임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평소에 그 동라가 눈에 거슬리고 얄밉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하니 원경제는 문득 그 동라의 역할이 사실 아주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아깝게 죽었다.
탁!
원경제는 탁자를 치며 노하여 꾸짖었다.
“우리 대봉에 인재가 넘쳐나는데 동라 하나 없다고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폐하, 죄를 용서하십시오.”
세 대신은 동시에 몸을 굽혔다.
이때, 한 환관이 총총걸음으로 어서방 밖에 이르러 문턱을 넘지 않고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이는 밖에 일이 생겼음을 의미했다. 원경제는 바로 입구를 향하는 위치에 앉아 있어 환관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환관을 호출할지 여부는 그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밖에 무슨 일이냐?”
원경제의 어조에는 억눌린 분노가 배어 있었다.
대태감이 황급히 문밖의 환관에게 들어오라 일렀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임안공주마마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환관이 말했다.
임안공주가 이 순간 회견을 요청한 이유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태자의 일 때문이었다.
원경제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임안에게 돌아가라고 하거라. 짐은 당분간 임안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 * *
환관이 명령을 받들고 나가 어서방 밖에 이르렀다. 높은 계단 아래에 귀한 붉은색 갖옷을 걸친 임안이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옆에는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 둘이 함께 있었다.
“이공주마마, 폐하께서 만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돌아가는 게 나으셔요.”
환관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임안은 입술을 깨물고 고집을 부리며 가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어서방 밖에서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삼법사의 우두머리들이 나왔다. 형부상서가 ‘에효’하고 소리를 냈다.
“마마, 날씨가 무척 추우니 고집부리지 마시고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그 몸을 조심하세요. 감기에 걸리시면 안 됩니다.”
대리사경이 맞장구쳤다.
“눈이 녹을 때 가장 춥습니다. 공주마마의 몸으로는 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십니다. 너희 둘,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것이냐. 얼른 마마를 모시고 돌아가거라.”
그러나 임안은 고개를 저으며 가지 않았다.
두 궁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