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순직
“언니, 순직이 뭐야?”
허영음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곁에 있는 허영월을 쳐다봤다.
허영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기 없는 종이꽃 한 송이처럼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지만 창백했다.
문지기 장씨가 대성통곡하였다.
그제야 허영월이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대답했다.
“순직은 죽는 거야…….”
남궁천유는 속으로 탄식하며 은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말했다.
“3~5일 뒤면 유골이 경성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미리 장례를 준비하십시오.”
800리 긴급 문서는 당연히 유골보다 먼저 경성에 도착했다.
남궁천유는 말을 마친 뒤 돌아서서 가려 했다.
“거짓말!”
새끼 사자 같은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허영음이 야경꾼 셋의 앞을 막고 씩씩거리며 남궁천유를 노려보았다.
여섯 살의 아이는 죽음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았다.
남궁천유는 상대하지 않고 허영음을 돌아서 계속해서 밖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허영음은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허영음이 그를 뒤쫓아 가 사정없이 때리며 소리쳤다.
“거짓말, 거짓말……!”
어린아이의 사고방식은 단순하다.
‘사기꾼을 때려서 방금 내뱉은 말을 취소시키면 큰 오라버니가 돌아올 수 있어. 사기꾼을 때려서 방금 내뱉은 말을 취소시키면 큰 오라버니가 돌아올 수 있어…….’
남궁천유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재촉해 동라 둘을 데리고 허부를 떠났다. 그는 멀찍이 걸어 나왔음에도 안심되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는 끈질기게 쫓아 나왔다. 그러더니 문 앞에 덩그러니 서서 엉엉엉 오열하며 작은 몸을 계속해서 바들바들 떨었다.
마치 버림받은 짐승 같았다.
남궁천유는 문득 후회스러웠다. 그는 아이가 서당에 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가 허칠안의 부고를 전해야 했다.
“가족들이 잘 돌볼 수 있게 저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게.”
남궁천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왼쪽에 있는 동라에게 분부했다.
“네.”
* * *
허부, 허평지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아내를 안고 방으로 돌아온 다음 바깥 대청으로 나가 딸을 찾았다. 그는 위로를 해주려 했으나 허영월은 꼼짝하지 않고 탁자에 앉아 눈을 부릅뜬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허평지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문지기 장씨를 불러 나지막이 말했다.
“서원에 사람을 보내 신년에게 소식을 알리고, 그에게 최대한 빨리 저택으로 돌아오라 이르게.”
장씨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사실 저택의 하인들 중에 말을 탈 줄 아는 자는 몇 없었다. 일의 중요도나 시간적인 면에서나 허평지 자신이 운록서원에 다녀오는 게 맞았다.
문지기 장씨는 나리가 이제 더는 말을 타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 * *
경성에서 청운산까지는 왕복 2시간이 걸린다. 만약 기마술이 부족하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터였다.
허신년은 오시에 저택으로 돌아왔다. 말을 전한 하인은 뒤처져서 혼자 돌아왔다.
허신년은 말을 미친 듯이 채찍질하여 대문에 이르렀다. 그가 급히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갑작스럽게 멈추면서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말의 앞발이 채 내려오기도 전에 허신년은 이미 몸을 비틀어 내렸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집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문턱을 넘을 때 걸려 넘어져 땅에 긁히는 바람에 이마가 찢어졌다.
* * *
그는 어느새 비틀거리며 일어나 비틀비틀 저택에 들어갔다. 안채에 가족들이 있었는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공허한 눈빛을 한 생기 없는 여동생이 보였다.
물론 허영음도 바깥 대청 밖 계단에 덩그러니 앉아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낙서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비보를 전해 듣자 슬픔에 잠겨 아이의 감정을 등한시했다. 허영음은 감히 묻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쓸쓸히 계단에 앉아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허평지는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신년, 네 형이…… 사라졌단다.”
허신년은 몸이 휘청거렸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정오가 되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찬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곧이어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춘제 후 첫눈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쌓인 눈이 용마루, 나뭇가지, 도로를 뒤덮어 온 세상이 은빛 단장을 하였다.
황궁, 어화원.
태자는 이황자, 사황자, 육황자 및 공주 셋을 초대해 청극정에서 눈을 감상했다.
활활 타오르는 숯불, 탁자 위에 놓인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 태자는 술 한 모금을 마시더니 웃으며 말했다.
“작년에 눈이 내려서 설경을 다시 보려면 연말까지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춘제가 지나자마자 또 눈이 내리는구나.”
삼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사천감에서 황력을 제정한 술사가 하는 말이 봄이 오기 전에 눈이 많이 올수록 추수 후에 더 큰 수확을 거둬들인대요.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이번에는 눈이 춘제 후에 내리긴 했어도 어쨌거나 봄이 오기 전이잖아요.”
태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사황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회경은 요즘 어찌 된 일인가? 매일 침궁에서 나오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서 술을 마시러 나오라고 해도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대니 말이야.”
사황자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회경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본래는 가끔씩 황형, 황매들과 모이곤 했는데 얼마 전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방문객을 사절하였다.
사황자와 회경은 한 어머니 배에서 나왔다. 하지만 회경의 그런 성격은 친남매라도 친해지기 쉽지 않았다.
‘흥, 틀림없이 내가 반짝반짝 빛이 나서 볼 낯짝이 없는 거겠지…….’
임안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건방진 생각을 했다.
오목이 널리 알려지면서 임안의 명성 역시 경성을 뒤흔들었다.
‘한번 물어봐야겠다. 본 공주가 이토록 혁혁한 명성을 날리는 사이에 비천한 회경은 왜 자연스레 집안에만 들어앉아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한 건지.’
임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쁜 마음에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붉은 노을이 슬며시 그녀의 동글반반한 얼굴로 올라가자, 어여쁘고 다정다감한 도화안이 약간 흐리멍덩해졌다.
허칠안의 마음속에 임안은 학창 시절에 반에서 아주 예쁘지만 성적은 형편없는 여자아이란 이미지가 있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우거지상을 하고 끊임없이 머리를 긁적거리는 그런 열등생 말이다.
반면 회경은 도도한 공부벌레지만 성격이 지나치게 안하무인이라 학생들의 시샘을 받았다.
‘쳇, 뭐가 대단하다고.’
“이 눈은 길조야. 너희 어제의 800리 긴급 문서를 아느냐?”
태자가 화제를 돌렸다.
“장항영이 운주 반란을 평정한 일이요?”
사황자가 말했다.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당의 공부상서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무신교와 결탁하여 운주에서 세력을 키웠다는군. 다행히 장 순무의 능력이 출중한 덕에 음모를 간파하고 역적의 무리를 토벌했다네.”
태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친여동생 임안을 보며 말했다.
“이 사건에 허칠안의 공이 가장 커 ‘장락현자’라는 시호를 부여받았다고 하지. 과연 대단하더군.”
“그야 당연히 허칠안은 제 노비…….”
본래 임안은 태자 오라버니가 허칠안을 격찬하자 기분이 좋아 본능적으로 좀 뽐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말을 듣자 갑자기 멍해졌다.
“태자 오라버니……. 뭐, 뭐라고 하셨어요?”
그녀의 어여쁘고 다정다감한 얼굴과 달콤한 미소가 조금씩 굳어졌다. 그녀는 크게 뜬 도화안에 공허한 눈빛을 띠고 태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 아직 모르는구나?”
사황자가 탄식했다.
“동라 허칠안이 순직했다고 하는구나.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쨍그랑.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모든 이가 연이어 임안을 쳐다봤다.
임안은 자신의 꼴이 흉하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하얗고 고운 손으로 태자의 옷소매를 꽉 잡아당겼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태자 오라버니, 농담하지 마세요…….”
그녀의 눈에 영롱한 빛과 가엾은 애원이 공존했다.
태자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얼굴빛이 다소 어두워지더니 임안의 손을 털어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농담 아니야. 아바마마께서 이미 성지를 내리셨어. 그 동라의 유골이 경성으로 운구되면 칙령을 내려 추봉할 거라고 하더구나. 임안, 네 신분을 망각하지 말아라.”
버젓한 대봉의 공주가 한 부하의 순직 때문에 이렇게 추태를 보이다니. 태자는 임안이 쉽게 감상에 젖는 셈 쳤다. 그는 그 이상으로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임안은 묵묵히 손을 움츠리고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망망한 눈보라 속으로 걸어갔다.
“임안, 임안……!”
태자가 정자 옆으로 쫓아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붉은 옷은 잠자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눈송이가 어지럽게 흩날리며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떨어졌다.
태자는 고개를 돌려 임안의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를 향해 소리 질렀다.
“여즉 공주에게 우산을 받쳐주러 가지 않는 것이냐!”
궁녀는 우산을 들고 쫓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선 잠시 멈춰 서서 태자를 향해 예를 갖춘 뒤 기름종이 우산을 펼치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 * *
정자 안에서는 모든 황자와 황녀가 여전히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한편, 그 궁녀는 우산을 받치고 임안의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안타깝다. 그 동라가 순직하다니…….’
궁녀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다 그녀가 살짝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임안공주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공주마마?!”
궁녀는 떨면서 소리쳤고, 당황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눈이 펑펑 쏟아졌으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왜 우시는 거예요? 그, 그 때문에요?”
“본 공주, 본 공주도 모르겠어…….”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고, 임안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그녀는 마음이 공허했다.
* * *
“눈이 오네. 나는 눈 오는 날이 좋아. 눈이 그치면 사형들이랑 눈싸움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눈 말도 만들 수 있겠지?”
저채미는 회경공주의 거처 안에 있는 따뜻한 다실에서 찻잔을 한 잔 받치고 간식을 먹으며 창밖의 함박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얕은 보조개를 지으며 흡족한 오후를 즐겼다. 따뜻한 차와 맛있는 간식이 있고, 눈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친구도 있었다.
회경공주는 하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는 편이라 지금도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단짝 친구의 수다에 대꾸하지 않고, 손에 책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넋을 잃은 채 함박눈을 바라보았다.
“회경공주마마, 무슨 일이에요? 요 며칠 얼빠져 있으시고.”
저채미는 자신이 무시당하는 기분에 속으로 화가 났다.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속에 새하얀 눈송이가 비쳤고, 회경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채미, 본 공주가 너 대신 쓴 서신 말이야. 아마도 네 손에 전해지지 못할 것 같구나.”
저채미는 생각 없이 간식을 먹으며 물었다.
“왜요?”
“그가 순직했어.”
저채미의 입이 딱 벌어졌다. 간식이 바닥에 떨어졌다.
* * *
관성루, 팔괘대에서 저채미는 고개를 떨군 채 의기소침하게 계단을 밟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함박눈이 흩날려 팔괘대에 눈이 얕게 쌓였다. 감정은 가부좌를 틀고 탁자 앞에 앉아 있었는데 둘레가 3척(尺)이나 돼 눈송이가 내려앉지 않았다.
저채미는 감정의 뒤에 멈춰 서서 억울하다는 듯 쿨쩍 울먹였다.
“스승님…….”
“어릴 때부터 사형들이 너를 괴롭힐 때마다 너는 울면서 나한테 고자질하러 뛰어왔지.”
감정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웃으며 술을 한 잔 마셨다.
“사형은 저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저채미는 입을 오므리더니 ‘와’하고 울기 시작했다.
“허칠안이 죽었대요, 허칠안이. 저 너무 마음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