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회신 (2)
허칠안은 임안의 서신을 서신 봉투에 도로 넣고, 심호흡한 뒤 마지막 서신을 펼쳤다.
‘회경과 채미, 너희 둘 중에 대체 누가 반역자인지 지금 보면 진상을 알겠지.’
“허 동라, 운주의 환경은 복잡해. 비적의 난이 오래되고, 제당과 무신교가 여러 해 동안 은밀하게 음모를 꾸며 틀림없이 운주에 적잖은 세력을 축적했을 거야.
조심하게 행동해야 함을 꼭 기억해. 설령 4품 무사 강율중이 있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아. 만약 목표를 특정했다면, 반드시 세찬 기세로 체포하여 상대방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해.
나는 위 공이 은밀하게 포석했을 거라 짐작해. 하지만 대부분은 너희와 마주치지 않겠지. 어쩌면 장 순무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어. 네가 비록 사건 수사에는 신이라고 하지만 실력에 한계가 있는 걸 어찌하겠어? 단독 행동은 절대 금물이야.”
서신은 회경의 것이었다.
허칠안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실망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실망스러운 건 회경공주가 뜻밖에도 나쁜 여자였다는 부분이었다. 애정을 낭비했다. 그는 기껏 어항에 거두었건만 그녀가 이렇게도 몰인정하다니.
기쁜 건 회경이 답장을 해줬다는 거였다. 그녀는 아직 이 동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손바닥과 손등 모두 살이다. 허칠안은 이런 결과를 마주하자 기쁨과 걱정이 반반이었다.
“회경은 정말 무서워. 아무래도 IQ가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아니다. IQ뿐만 아니라 형세에 대한 분석과 사람 마음에 대한 장악 모두 뛰어나다. 위 공의 생각조차도 다 파악했다니……. 망했다. 나중에 바람피웠다가는 걸리기 십상이다.”
‘뭐, 회경공주가 아직은 위연의 반쪽 제자니 이런 능력이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
허칠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요 며칠, 채미가 내 궁원에 와서 식사했는데 한담을 나누다가 네 얘기가 나왔어. 그녀가 말하길 요즘 네게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하더라. 그녀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잘못 썼다가 너한테 비웃음 살까 봐 걱정하더라고.
그녀가 ‘허칠안은 정말 생각이 깊어요. 청주에서 홍련 꽃잎을 보내주면서 저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했어요’라고 말하더군.
채미가 본 공주와 얘기할 때 눈가에 웃음을 띠고 있길래…… 내가 채미에게 ‘본 공주가 너를 대신해 답장을 써 줄게’라고 말했어.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고.
허, 허 대인 정말이지 멋스럽고 소탈해. 꽃 하나를 두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어휘 선택도 제각각인데 하필 또 묘사한 내용이 장점과 딱 들어맞다니.
본 공주는 탄복했네.”
허칠안은 굳은 얼굴로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자네 무슨 일인가?”
양천환이 물었다.
“망했어요…….”
허 색마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수치스러움에 운하로 뛰어들어 백제성으로 헤엄쳐 돌아가고 싶었다.
‘제기랄, 채미가 아직 애정에 눈을 뜨지 못한 소녀라는 걸 잊었다. 그녀와 회경은 사이가 좋다. 절친과 이런 일을 공유하는 데 전혀 심리적인 거리낌이 없겠지. 회경은 본래 나에게 편견이 있다. 경성을 떠날 때도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채미 소저마저 공격당했다……. 회경은 틀림없이 나한테 쓰레기 꼬리표를 달았겠지.’
허칠안은 창피한 나머지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졌다.
‘허 모 씨 역시 명예와 위신이 있는 사람인데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경성에 돌아갈 낯짝이 어찌 있겠니……. 아, 나 이미 죽었지. 그럼 괜찮겠다.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군. 임안, 부향, 영월 동생의 서신은 회경이 보지 못하니까. 부향과 영월 동생은 말할 것도 없이 회경과 접점이 없다. 임안은 그녀의 자매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물과 기름과도 같아서 이런 규방 밀서를 공유할 리가 없다.
자랑하는 건 더욱 불가능하다. 임안이 아무리 순진무구하고 사심이 없다 해도 그녀 역시 황가에서 태어난 공주다. 이런 편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아무 데나 말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다행히 나는 저채미가 고지식한 걸 알고 있기에 그녀와 시시덕거리지 않았다. 가는 길에 먹은 맛있는 음식에 관해서만 썼다……. 아마 이렇기에 회경공주가 불쾌해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조언해준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그녀에게 쓴 건 연서고 채미에게 쓴 건 보통 편지니까.
헤헤,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 회경? 너는 내가 2층에 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 나는 5층에 있다고.’
“누가 쓴 서신인가?”
양천환이 드디어 서신을 다 읽은 허칠안을 보자 다시 이야기보따리를 열었다.
“경성 친구가 보내온 서신입니다.”
허칠안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연인이지?”
양천환이 물었다.
허칠안이 순간 경계했다,
“제 서신을 몰래 보셨습니까?”
양천환이 냉소를 지었다.
“나 양천환은 그런 추잡한 일을 할 이유가 없네.”
‘어쨌거나 4품 술사니깐…….’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네 채미 사매는 정말이지 고지식합니다. 그녀 나이쯤 되면 소녀가 연정을 품을 때도 되지 않았나요? 저는 하여간 꼬시지 못하겠어요. 그녀에게 서신을 썼는데 그녀는…….”
허칠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천환이 동조했다.
“채미 사매는 정말이지 사춘기가 늦게 오네. 그녀는 그저 보통 친구와 주고받는 서신이라고 생각해서 회경공주에게 말한 걸세. 자네에게 전혀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니네. 적어도 그녀 마음속에 자네는 아주 중요한 친구잖나.”
허칠안은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회경에게 말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
허세왕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당했다는 걸 알았고, 갑자기 방금 전 허칠안처럼 수치스러워졌다.
‘내 편지를 몰래 봤을 뿐만 아니라 다시 붙여놓은 거네……?’
“됐습니다. 저를 도와 양진태를 잡아 준 걸 봐서라도 저 역시 문제 삼기 귀찮네요.”
허칠안이 경고했다.
“하지만 절대로 서신 내용을 밖에 누설하지 마십시오.”
일은 이미 이렇게 풀려 버렸다. 양천환은 이미 다 봤고,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차라리 대범한 척하는 게 나았다.
양천환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자네들을 도와 양진태를 잡지 않았네.”
갑판 틈 사이로 한파가 스며들어 허칠안의 목덜미를 때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솜털이 한 가닥씩 섰으며 목소리조차도 조금 떨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 * *
남궁천유는 따뜻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마차를 몰아 궁성 밖에 도착했다.
그는 마차를 정차한 다음, 마중 나온 우림위에게 말고삐를 던져 줬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나무 의자를 떼어내고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의부님, 도착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청포를 입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위연이 마차를 뚫고 나와 나무 의자를 밟고 내려왔다.
두 사람은 궁성으로 들어가 어서방을 향해 걸어갔다.
“의부님, 듣자 하니 오늘 아침에 800리 긴급 전보가 왔다면서요?”
남궁천유가 물었다.
대봉의 정보 등급은 300리 긴급 전보, 400리 긴급 전보, 600리 긴급 전보 그리고 가장 높은 800리 긴급 전보로 나뉜다.
그중에 800리 긴급 전보의 정보는 바로 내각으로 보내지고 내각에서 황제에게 전달한다. 내각에 보내지기 전에 정보를 전달한 역졸 외에 어떤 이의 손을 거쳐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된다.
위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800리 긴급 문서가 궁에 전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하께서 어서방에 소조회를 소집하셨다.
800리 긴급 전보라는 건 분명 큰일이다. 다만 어느 주(州)에서 왔는지 모를 뿐이다.
“정말 다사다난하구먼!”
위연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자네에게 준비하라고 한 무소 가죽 갑옷은 어떻게 돼 가고 있는가?”
“자재를 이미 다 수집하여 사천감에서 가져가 만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궁천유의 말투에 시샘이 어려있었다.
무소 가죽 갑옷은 위연이 허칠안에게 줄 선물이다. 무소 가죽 갑옷은 칼과 창이 뚫지 못하고, 물과 불도 스며들지 않는다. 만약 다시 사천감의 연금술사와 진법사가 손을 대면 법기로 만들 수 있다.
그럼 바로 천하무적의 지보가 되는 것이다. 설령 5품 경지의 무사라도 함부로 뚫을 수 있다는 생각은 단념하는 게 좋다.
남궁천유는 위연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는 허칠안의 마지막 단점을 메워서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묘목이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하려 했다.
남궁천유는 어서방에 근접했을 때 금군에게 저지당했다. 그리고 위연 홀로 계속 나아갔다.
위연은 문턱을 넘어 어서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양쪽의 군신들을 내키는 대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대신이 난해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원경제 역시 위연을 쳐다보았으나 늙은 황제는 생각이 깊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폐하.”
위연이 읍하고 예를 갖춘 뒤 자연스레 대열에 합류하여 자신의 위치에 섰다.
* * *
위연은 수십 년 동안 관리 사회에서 군림해왔다. 분위기가 조금만 달라져도 그는 예리하게 구별해낼 수 있다.
원경제는 그가 들어올 때 힐끗 쳐다봤을 뿐이었다. 군신들이 이미 시선을 거두었을지라도 위연은 알았다. 이번 소조회는 아마 자신과 관련 있다는 걸.
춘제가 막 끝났고, 며칠 후면 경찰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동안 각 주의 이부에서는 시찰 명단을 연이어 보내 원경제가 일필휘지하기만을 기다렸다.
또한 경성 내의 시찰 결과는 이부 상서의 주관하에 점차 형태를 갖추었다.
이 시찰 명단의 형성 과정이 어떠한 피바람을 동반했는지는 당내의 제공, 원경제 모두 잘 알았다. 단연코 이 시기에 경찰을 미루고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과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 무슨 중대한 일이 자신과 연루되었다는 말인가?
위연은 머리를 굴리더니 머릿속에 두 글자를 떠올렸다. 운주!
‘800리 긴급 정보가 운주에서 왔구나……. 보아하니 운주에 정말 반역이 일어났구나. 강율중과 양연의 능력, 장항영이 일전에 한 노력과 깔아 놓은 포석이 있으니 운주는 혼란에 빠질 수 없는데…….’
위연이 읊조렸다.
위연이 다시 일각을 기다리니 소조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대신들이 잇따라 모두 도착했다.
원경제는 당하(堂下) 신하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 운주에서 800리 긴급 문서가 왔소. 운주 사건은 이미 마무리되었소. 무신교와 결탁하여 산적을 도와 군수물자를 수송한 자는 운주 포정사 송장보요.”
군신들은 마치 폭탄이 터진 듯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다들 깜짝 놀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은 이어 주체할 수 없이 왈가왈부했고, 조당은 질타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허나 그중에 일부 신하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왕당이 그랬다.
긴급 문서는 우선 내각의 손을 거쳐야 하고, 내각에서 통정사(通政司)로 전달한다. 통정사는 출납 제명(帝命)을 관장하여 민정에 밝다.
통정사는 전문적으로 황제의 관방(*關防: 기밀 누설 방지) 공문을 대조하여 도처의 관원과 백성의 실봉(實封) 건언, 진술 상소 및 군정, 천재지변 등의 일을 상주하는 관아다.
내각은 왕 재상의 근거지다. 내각은 당연히 긴급 문서를 사사로이 뜯어볼 권리가 없다. 하지만 황제가 읽은 후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문서 내용을 내각에 알린 후 회의를 여는 것이다.
따라서 왕당이 가장 먼저 소식을 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