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231화 (231/712)

231화. 위로와 외면 (2)

“순무 대인, 드디어 오셨습니까.”

각진 얼굴에 세모진 눈을 한 천호는 장 순무를 본 순간 가슴속의 돌덩이를 드디어 내려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 순무는 오는 내내 애간장이 탄 탓에, 오히려 성벽 꼭대기에 오를 때 모든 감정을 추스르고 근엄한 얼굴에 아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성벽 꼭대기에 서서 잠시 보더니 분부했다.

“줄이 달린 바구니로 나를 내려 보내 주게.”

천호가 말했다.

“소직이 바로 성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방금 그 동라와 기마 유격병 장군도 성문으로 나갔습니다.”

‘소란법석은…….’

장 순무가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위사의 군대가 만약 정말 성을 공격할 마음을 먹었다면 성문은 이미 함락됐을 것이야.”

천호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줄 달린 바구니는 필요 없네. 내가 순무 대인을 모시고 내려가겠네.”

강율중이 장 순무의 어깨를 눌렀다. 잠시 뒤 장 순무의 눈앞이 아른해지더니 성 밖에 이르렀다. 허칠안 등과의 거리는 10장(丈)이 채 되지 않았다.

허칠안 쪽도 강율중과 장 순무를 인식했다. 모든 사람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이묘진의 표정은 그대로였고, 긴장한 허칠안의 표정은 다소 느슨해졌다.

서호신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긴 창을 움켜쥔 손을 꽉 쥐었다.

순무는 두렵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건 옆에 있는 그 금라였다.

장 순무가 큰소리로 말했다.

“서호신, 말에서 내려와서 얘기하게.”

서호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긴 창을 꽉 움켜쥐고 가늠해 봤다. 그는 긴 창을 말 고리에 걸어 두고 빈손으로 장 순무를 맞이했다.

“순무 대인!”

서호신은 읍을 올렸다.

“아주 배짱이 크구먼.”

장 순무는 냉소를 지었다.

“오늘 설사 내가 강 금라를 시켜 자네를 현장에서 쳐 죽여도 자네 배후의 3천 대군을 그대로 제압할 수 있네.”

서호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골백번도 넘게 말하지만, 자네는 고작 양천남을 구하고 싶은 거 아닌가? 본관이 묻겠네. 만약 양천남이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면 자네들은 구할 텐가?”

“양 대인은 무고합니다.”

“본관이 물었네. 구할 텐가 아니면 구하지 않을 텐가.”

“구할 것입니다!”

장 순무는 하하하 크게 웃었다.

“역시 의협심 넘치는 사나이군. 본관이 높이 평가하지. 양천남 사건은 현재 결론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네. 자네가 양 대인의 사람 됨됨이를 믿으니 그럼 본관도 이 자리에서 자네에게 약속하지. 양천남이 무고하기만 하다면 본관이 반드시 그의 결백을 밝힐 것이네.”

장 순무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별안간 태도를 바꾸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격분해서 말했다.

“허나 자네가 제멋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에 집결시킨 건 죽을죄야!”

서호신은 달갑지 않아하며 읍을 올렸다.

“소직…… 죄를 인정합니다. 순무 대인께서 양 대인의 결백을 밝혀 주시기만 한다면 소직은 대인의 어떠한 처분도 달게 받겠습니다.”

“됐네. 자네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서 대오를 이끌고 군영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본관은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겠네.”

장 순무가 관용을 베풀었다.

“순무 대인께서 기왕 약속하셨으니 그럼 소직은 대인만 믿겠습니다.”

서호신은 원하는 답을 얻고선 고개를 돌려 허칠안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이 동라가 중간에서 중재하여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악화되지 않았다.

서호신이 대오를 이끌고 소란을 피워 얻고 싶었던 건 결과 혹은 약속이었다. 그는 경성에서 온 순무가 공적을 위해 도지휘사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울까 봐 아주 두려웠다.

지금은 순무가 승낙했고 사건은 여전히 조사 중이었다. 때문에 도지휘사는 아직 죄를 판결받지 않았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뒤이어 장 순무는 상냥한 얼굴로 위로하며 예의를 갖추고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서호신은 과분한 총애에 기쁘고 놀라워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해했다.

무식쟁이는 꼭 이렇다. 모래벌판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때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다가 다른 사람이 살뜰히 돌봐 주기 시작하면 그들은 감사한 마음에 모질어지지 못한다.

장 순무 같은 신분의 고관이면 더더욱 그러했다.

마지막 결과에 모두가 몹시 기뻐했고, 서호신은 모든 장병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장 순무가 이번 병간을 무마하여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 * *

장 순무는 말을 타고 역참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대적으로 허칠안을 칭찬했다.

“자네 사람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군. 어떻게 갈등을 푸는지 잘 알고 있어. 칠안, 자네 또 공을 세웠네.”

허칠안은 손을 내저으며 말장단을 맞추지 않았다. 그는 너무 지쳐서 대화를 나눌 흥미를 잃었다.

이묘진은 역참으로 따라오지 않았다. 그녀는 사병을 거느리고 군영으로 돌아갔다.

강율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순무 대인의 지연 계책은 한동안만 유효할 겁니다.”

장 순무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관도 알고 있네. 강 금라, 밤에 자네가 위사 군영을 다녀오게. 서호신 등 고급 군관 무리를 성안으로 부르게. 본관이 도지휘사 사건과 관련하여 상의할 비밀스러운 일이 있다고 전하게.”

허칠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 순무가 태연하게 말했다.

“군영 밖으로 데리고 나온 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이게.”

“순무 대인…….”

허칠안은 바로 태도를 싹 바꾸는 장 순무를 바라보자니, 마치 죽은 쥐 한 마리를 먹은 듯 이때의 감정을 형용하기 어려웠다.

장 순무는 못 들은 듯 계속해서 말했다.

“선두에 서서 이끄는 자가 없어지면 일반 병사들은 그저 오합지졸이라 좀 달래주기만 하면 되네. 양천남의 심복 세력이 위사의 삼 오천 군사 아닌가. 이 잠재된 화를 없애고 양천남을 처분해야 뒷일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분명 다른 속사정이 있습니다.”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다른 문제야. 밝혀낼 수 있다면 본관도 당연히 양천남에게 결백을 돌려줄 걸세. 하지만 서호신은 정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결연하기 때문에 본관이 반드시 사전에 그 싹을 잘라 버려야 해.”

장 순무가 희미하게 말했다.

“사람을 보내 운주의 각 위소로부터 군사를 모을 것이야. 이런 일이 다시는 생겨선 안 되네.”

순무는 각 위소의 군대를 움직일 권리가 있었다.

장 순무는 당부를 마친 후 허칠안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칠안, 자비심이 있는 자는 군사를 통솔할 수 없네. 조당도 그렇고 전쟁도 그렇고 망설이면 패배할 것이네. 마음이 약하면 남도 해치고 자신도 해치는 법이지.”

‘이치는 나도 다 알거든…….’

허칠안은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강율중은 온갖 시련을 겪어서 그런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

“각 위소의 군사를 동원한다는 건 순무 대인께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운주의 관리 사회를 제압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장 순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천남이 만약 배후의 검은손이 아니라면 배후의 그자는 바로 성 안에 있네. 4품 이상의 관원들 모두 혐의가 있어. 상대가 궁지에 몰려 허튼짓 못 하게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네.”

* * *

그들이 역참으로 돌아와 차 한 그릇 마실 사이에, 입구에서 당직을 서던 호분위가 들어와 보고했다.

“순무 대인, 송 포정사 등 여러 대인들께서 뵙길 청합니다.”

장 순무는 관계없는 자들에게 물러가라고 이른 뒤, 대청에서 관원들을 접견했다. 그들은 양천남 사건 때문에 온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증거가 확실하니 순무 대인께서 조속히 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송 포정사가 말했다.

운주 지부 등의 관원이 잇따라 맞장구쳤다.

‘퇴위를 강요하러 왔군…….’

허칠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배후의 검은손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있다면, 장 순무의 증거 검증이 끝난 상태에서 관원들이 퇴위를 선동하는 행위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조금 성급하다.

위사의 군대가 막 철수했는데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장 순무에게 이 사건의 결론을 내리라고 독촉하다니. 정말로 용의주도한 자식이 꾸민 조작은 아닌 듯했다.

양진태가 우물쭈물하여 단서가 없으니 상대방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아, 즉시 양천남을 속죄양으로 내세우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설명밖에 할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할수록 빈틈을 보이기가 쉽지. 강율중이 서호신 등의 장군들을 죽인 후, 각 위소의 군사를 동원해서 오면 순무 대인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배후의 검은손과 제대로 놀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시간을 끌면 그만이다.’

허칠안은 생각이 번쩍였다.

아니나 다를까 장 순무는 관원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응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양천남을 다시 은밀하게 심문해야 하니 내일 3사에서 공동 심의하라며 핑계를 댔다.

어쨌든 우선 오늘은 넘겼다.

장 순무는 여러 대인을 돌려 보낸 뒤 차를 마시며 개탄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네.”

서호신을 죽이는 건 양천남 라인을 안정시키는 일이며, 군사를 동원하는 건 배후의 검은손 라인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어쨌거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양쪽 모두 다칠 게 뻔했다.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강 금라가 오늘 밤 일을 마치면, 사람을 시켜 양진태로 위장하여 굴 밖으로 유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말을 막 마치자마자 당직 서던 호분위가 또 들어오더니 말했다.

“순무 대인, 문밖에 복순표국(福順鏢局)의 표사(鏢師)라 자칭하는 무리가 와서는 순무 대인을 만나 뵙고 싶다 요청합니다.”

“복순표국?”

장 순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표국 명칭을 처음 들어봤다.

“복순표국?”

주광효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다가 사실을 확인하는 듯 한마디 물었다. 그는 장 순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장 순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 이 표국을 아는가?”

주광효가 대답했다.

“복순표국이 바로 저희가 운주로 오는 길에 마주쳤던 노상강도에게 떼죽음 당한 그 상대입니다. 복순표국은 또 다른 명칭이 있는데 복순상회라고도 합니다.”

그는 말을 하다가 송정풍과 허칠안 두 쌍놈을 쳐다보았다. 그날 이 두 사람이 위아래로 책임을 떠넘기다가 결국은 일을 그에게 떠넘겼더랬다.

그는 상회 주인 조룡의 유품을 가족들에게 돌려 주는 일을 맡았다. 주소를 따라가 보니 찾은 것이 바로 이 복순표국이었다.

“아마도 순무 대인께서 시찰에서 돌아온 걸 알고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나 봅니다.”

한 은라가 추측하며 말했다.

그들이 산적을 토벌하고 화물을 되찾지 않았다면, 복순표국은 이번에 남김없이 변상했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표국의 다른 표사들과 조룡의 식솔이 이번에 순무 대인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장 순무가 운주에 처음 와서 한 첫 번째 선행이었다. 그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 들어오라고 하거라.”

이내 중년 남자 셋이 푸른색의 두꺼운 솜옷을 입고, 같은 색의 허리띠를 꽉 졸라맨 채 검은색 장화를 신고 쥐 가죽 모자를 쓴 차림으로 호분위의 안내를 받아 들어왔다.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색으로 ‘복순’ 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세 사람은 문 앞에서 무기를 압수당해 두 손이 텅텅 비어 있었다.

허칠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세 사람을 훑어봤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구레나룻 사나이는 연기경이고 다른 두 사나이는 연정경이었다.

“평민 조예(趙銳), 복순표국에 새로 부임한 당가(當家)로 장 순무를 뵙습니다.”

구레나룻 사나이가 허리를 굽히고 읍을 올렸다.

유가의 예절에서는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 임금, 부모, 스승)에게만 무릎을 꿇고, 백성이 관리를 보면 무릎 꿇을 필요 없이 예를 갖춰 인사하기만 하면 됐다. 물론 관아에서 심문을 받을 때는 예외다.

‘어쩐지 연기경이라니. 알고 보니 표국의 새로 부임한 당가로군……. 연기경이 되어야만 큰 표국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군…….’

허칠안은 살펴보는 눈길을 거두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