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본관 허칠안
두 사람이 남성 문에 도착해 요패를 꺼내 보인 뒤 성벽 꼭대기에 오르니, 성 방어군의 천호(千戶)가 그들을 직접 맞이했다.
“순무 대인은 왜 아직도 오지 않으셨습니까?”
천호는 각진 얼굴에 세모진 눈매를 가졌다. 그가 장대한 기골을 뽐내며 손에 군도(軍刀)를 들고 광활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속의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순무 대인은 도지휘사사에 사건을 조사하러 가셔서 바로 오지 못하시기에 저와 기마 유격병 장군이 시간을 끌러 먼저 왔습니다.”
허칠안이 설명했다.
그가 성벽 꼭대기에 서서 내려다보니 성 밖에는 방진(方陣)이 두 군데 있었다. 그중에 큰 방진은 위사의 군대였다. 기병이 앞에 보병은 뒤에 화포군은 가운데 있었다.
3천 대군이 펄럭이는 깃발 아래 성 꼭대기를 바라보며 아무런 소리 없이 가만히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나운 기운이 얼굴을 덮어 왔다.
허칠안은 지금 반쯤은 연신경이지만 여러 전투를 겪은 군대를 직면하니 내심 여전히 회피하고 싶었다. 그는 정면으로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몸뚱이 하나로 3천 리를 전전하며 칼 한 자루로 백만 대군을 상대했다라…… 어떤 무사가 이 같은 쾌거를 이룰 수 있을까?’
그는 감개무량했다.
“운주의 군대는 포악하기 그지없고, 난동을 부리겠다면 부리는 놈들이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이묘진이 은색 창을 손에 쥐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역참으로 달려온 건 순무 대인이 과격하게 일을 처리하여 만회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갈까 봐 그런 것이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주 비적의 난은 기세가 맹렬하기에 운주에서 군인이 되려면 포악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일 년 내내 출정하여 싸운 병사는 살기가 세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에 참여한 우두머리만 인정해 주지, 외부 사람이 다루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안일한 지역에 있는 병사들과 달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저쪽의 네모난 덩어리도 저쪽 군대입니까?”
허칠안이 물었다.
성 아래까지 들이닥친 군대는 백제성이 관할하는 위지휘사사(衛指揮史司)로 위사라고도 불렀다. 다음 단계는 소(所)인데 가장자리의 그 네모난 덩어리가 사오백 명 정도 돼 보였다. 허칠안은 군현 급의 ‘소(所)’라고 짐작했다.
이묘진은 순간 좀 머쓱해졌다.
“나의 비연군이네.”
‘너도 앞잡이야?’
허칠안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이묘진은 설명했다.
“나 역시 군대로 압력을 가할 생각을 해 보았네. 이는 운주 군대에서 기른 나쁜 습관이지.”
그녀는 책임을 운주의 군대로 돌렸다.
“그럼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합니까? 성을 나갑니까?”
허칠안이 떠보았다.
“그렇네”
이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순무 대인을 대표하지 않는가.”
이묘진이 그를 흘겨보았다.
“위지휘사 서호신은 성미가 거칠고 고집불통이야. 자네 기왕 갈등을 해소하고 싶은 거라면 꾹 참는 게 좋을 걸세.”
“이 장군 체면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까?”
이묘진이 ‘허’하고 소리를 냈다.
“내가 함께하지 않으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동라 자네를 벨 것이네.”
“참나, 군인이 돼서 정말 억지를 쓰는군요.”
곧 삐걱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고, 성 방어군의 천호가 성을 나가는 두 사람을 배웅하며 손을 저었다.
“몸조심하십시오.”
허칠안이 말 등 위에 앉은 채 돌아보며 물었다.
“천호 대인,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천호가 말했다.
“이곳은 바람이 셉니다. 대인 뭐라고 하셨습니까? 소직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아, 성문을 닫으라고요? 알겠습니다. 소직이 죽는 한이 있어도 성문을 열지 않겠습니다.”
성문이 천천히 닫혔다.
“…….”
허칠안은 속으로 읊조렸다.
‘뭐 같군.’
* * *
이묘진은 바로 위사로 달려가는 대신,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비연군에게로 가 기병 수십 명을 불러 진을 쳤다. 그리고 그제서야 위사의 3천 대군을 맞이했다.
“내 비연군 중에 수련 품계가 가장 낮은 자는 연정경으로 총 437명이고, 오장(伍長)은 연정 전봉, 십장(什長)은 연기경, 백호(百戶)는 동피철골경이네.”
이묘진의 낭랑한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그녀는 다소 의기양양한 말투로 허칠안에게 자신의 사군을 소개했다.
‘6품경 4명에 연기경 40명……. 세상에나, 이 여자 너무 무서운 거 아니야?’
허칠안은 침을 삼켰다.
“이런 군대는 운주에 없지요?”
이묘진이 ‘응’하고 대답하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모두 내 체면을 보고 나를 따라 운주에 온 것이네.”
‘네 체면이 얼마나 대단한데?’
허칠안은 고개를 돌려 준마에 은색 창을 쥐고 높은 포니테일을 한 장부를 보았다. 그는 그녀의 실력을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허칠안은 그녀를 보았을 때 천종 성녀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다음에 떠오른 인상이 비연 여협객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비연 여협객이란 칭호가 앞에 왔어야 했다.
강호에서 이묘진의 인맥은 어쩌면 그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깊을지도 몰랐다.
‘천지회 내부는 한 명 한 명이 인재다. 나 같은 동라는 분발해야 한다. 음, 우선 작은 목표를 정하자. 위연의 아들이 되는 것…….’
“그럼 서호신은 수련 품계가 뭡니까?”
허칠안이 갑자기 물었다.
“연신경 전봉이네.”
이묘진이 대답했다.
“수련 품계가 높지는 않네요.”
허칠안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위연도 보통 사람이나 남들과는 다르게 3군 통솔자가 되지 않았는가.”
이묘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군대를 출동시켜 전쟁을 치르는 건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네. 고품 무사는 일당백, 일당천도 할 수 있지만 천 명의 군대를 통솔할 수 있지는 않네. 내 능력으로는 오백 명이 한계네. 하지만 서호신은 3천에서 5천 명의 군대를 통솔할 수 있지. 모래벌판에서 정면으로 맞붙으면 두말할 나위 없이 내가 패할 걸세.”
폭력은 미학이고 전쟁은 예술이다. 극과 극의 개념이다.
이묘진은 위사군과 5장(丈) 떨어진 곳에서 멈추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지휘사, 이리 와서 대화 좀 나눕시다!”
말을 탄 누군가 대열 앞으로 나왔다. 우두머리 장군은 8척 키에 사타구니 밑의 말은 보통 말보다 훨씬 컸고, 손에는 긴 창을 쥔 채였다.
긴 창을 쓰는 자가 용맹한 장군이 아닐 리 없었다.
긴 창을 쥔 서호신은 눈빛이 매서웠고, 짙푸른 아래턱의 수염은 방금 깎은 듯했다. 그는 이묘진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장군도 저와 함께 도지휘사 대인을 구할 것입니까?”
이묘진이 고개를 저었다.
“양 대인은 잘 계십니다. 서 장군께서 너무 충동적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결과를 생각해보셨습니까?”
“기껏해야 죽는 것밖에 더 하겠습니까.”
서호신은 아주 강한 어조로 씩 웃으며 말했다.
“이 몸의 목숨은 도지휘사 대인께서 구해 주셨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처단하려 하니 이 몸이 이 목숨을 내놓으려는 거지요.”
허칠안이 별안간 물었다.
“당신들은 이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된 것입니까?”
서호신이 허칠안을 곁눈질하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위 내시 수하의 매 발톱이군.”
‘나를 뭐라고 하는 건 괜찮은데 우리 아빠를 뭐라고 하는 건 너무하지.’
허칠안은 엄지손가락을 튕겨 등허리의 흑금장도를 반 치정도 뽑아 들며 나지막이 말했다.
“서 장군님. 조정의 위엄에 도전하지 마십시오. 본관은 성의를 가지고 왔는데 만약 장군께서 호의를 무시하신다면 방금 장군을 베어 말에서 떨어뜨렸을 겁니다.”
이묘진은 그렇게 많이 말을 하면서 사실 한 가지 의미를 내비쳤다.
<군인에게 논리적으로 따지지 마.>
논리적으로 따지는 건 지식인이 하는 일이다. 이곳에서 군인은 주먹만을 논한다. 주먹이 세야 존엄이 있는 것이다.
허칠안은 우선 무력을 과시해 존중받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놈들을 두렵게 하려 했다. 그는 그런 뒤에 논리적으로 대화를 나누려 했다.
서호신은 이묘진한테는 예의 있게 대하면서 그에게는 대놓고 차가운 조소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바로 존중하지 않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바로 사람을 베는 건 안 될 일이다. 그건 갈등을 격화시킬 것이다.
다그닥다그닥…….
그는 무시하고 말머리를 돌려 잠자코 다른 쪽으로 갔다.
서호신과 이묘진 그리고 비연군 기병 수십 명의 시선이 그를 쫓아갔다.
“흥! 이 몸이 순무를 보자는데 일개 동라를 끼워 넣어 나와 대화하게 해?”
서호신은 하찮게 여기며 비웃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놈이 여기가 경성인 줄 아나. 사람들이 다 야경꾼이라면 벌벌 떨게? 이 장군, 도지휘사 대인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묘진이 고개를 저은 뒤 허칠안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서호신은 성미가 다소 급했다. 순무 대인은 그가 성격이 본래 거칠고 욱해서 만나지 않으려 피했고, 대신 일개 동라를 보내 그를 상대하게 했다. 서호신은 이 점 때문에 이미 불만이 가득 쌓인 채였다.
그는 심지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동라를 베어 죽여 순무에게 시위하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그나마 그는 기마 유격병 장군인 이묘진을 봐서 대화를 나누러 온 것이다.
이때, 그 동라가 멈춰서더니 돌아서서 서호신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이어 그는 왼손 엄지손가락을 튕겨 패도를 반 치정도 뽑아 들고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눌렀다. 잠시 힘을 비축한 후에…….
쨍!
귀에 거슬리는 칼을 뽑는 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서호신 등 그리고 수천 명의 군인의 눈에는 공기가 잠시 비틀리더니 뭔가 그은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이 촘촘하게 갈라지더니 허칠안 발 아래부터 군대 앞까지 계속해서, 세로로 10여 장(丈) 정도 뻗어 나갔다.
앞줄의 기마 부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들도 놀란 듯했다.
서호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방금 정말로 나를 베어 말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었구나.’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치르는 용맹스러운 장군의 마음속에 경외심이 조금씩 솟아났다. 그는 허칠안의 진심을 인정했다.
이묘진은 의아한 눈으로 허칠안을 주시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큼지막한 물음표가 스쳤다.
천종 성녀의 눈으로 판단했을 때 이 칼끝은 예리하고, 세찬 천둥소리처럼 재빨랐다. 설령 6품 동피철골경에 막 들어선 무사라도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이게 연기경인 무사가 보일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어서 일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허칠안 이자가 은라 하나를 벤 적이 있다며, 그 은라가 연신경 고수라고 했다.
그때의 그는 품계를 건너뛰어 사람을 벨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반 연신경이다.
‘만약 천재라면.’
하지만 금련도사는 뜻밖에도 그를 천지회에 들이지 않고 그의 사촌 동생을 선택했다.
‘그 사촌 동생도…… 이렇게 공포스럽겠지.’
“어허.”
뒤에서 비연군의 고수들이 탄성을 질렀다.
다그닥다그닥…….
동라가 말을 타고 돌아와 지친 몸을 애써 지탱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서 장군님, 본관 허칠안, 순무 대인을 대표하여 장군님과 협의하러 왔습니다.”
“…….”
서호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말씀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