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사회적 매장
허칠안은 문득 이호가 염세 청년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의리와 의협심이 있지만, 자신이 무력으로 금기를 범하는 협객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무책임한 원경제를 극도로 증오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호가 오품 고수라는 점이었다. 그녀에게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하찮은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안 되겠네. 태도를 바꿔야겠다.’
허칠안은 힘으로 내리찍어 소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을 접고 하하하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관은 일리가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모든 일은 의논의 여지가 있지요. 이 장군님이 오로지 대의를 위해 일 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비적을 토벌한 점에 감복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이런 정은 본관을 부끄럽게 하더군요. 그런데 본관은 소소 낭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데, 이 장군께서 단념하실 수 있을까요?”
허칠안은 흥정할 계획이었다. 집돌이는 종이 인형 아내가 볼 수만 있는 것임을 알지만, 그들의 열렬한 사랑을 막지 않는다.
이묘진은 그 말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매(魅)가 고급 원령이긴 하나 그 자체로는 오래 생존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정기를 흡수하지 않는 이상 마음의 지혜를 잃고,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제 곁에 있어야만 원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대인께서는 도문의 제자가 아니니 이런 비술에 정통하지 않아 그녀를 곁에 두는 건 둘에게 해로울 뿐입니다.”
‘그녀는 현실 속의 이미지와 인터넷상의 이미지가 아주 다르군. 인터넷에서는 더 활발하고 염세적인데 현실에서는 진지하고 엄숙한 편이군. 음, 엄숙한 이미지가 군대 지휘에 어울리니 아마도 위장일 것이다. 그렇겠지?’
허칠안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허칠안은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몸을 일으켜 방으로 돌아갔다.
주광효와 송정풍은 멍한 눈빛과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매(魅)는 뭐고 정기를 빨아들인다는 건 또 뭔가?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들은 방금 나온 단어를 떠올렸다.
‘소소 낭자?’
허칠안은 금세 술주전자를 들고 돌아와 ‘쿵’하고 탁자 위에 두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술주전자로 향했다.
송정풍과 주광효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이묘진은 눈을 가늘게 떴고, 술주전자에 새겨진 것이 도문의 봉령부(封靈符)임을 알아봤다.
허칠안이 주전자 뚜껑을 비틀어 여니 푸른 연기가 주전자 입구에서 하늘하늘 피어올라 매우 아름다운 자태의 미인으로 변했다. 그녀는 먼저 허칠안을 매섭게 노려본 뒤 노발대발하며 나무랐다.
“역겨운 놈. 배고파 죽겠네! 죽겠어!”
이어 이묘진을 본 그녀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억울한 모습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주인님, 저 대신 나서 주세요. 저 역겨운 자식이 저를 괴롭히고 모욕했어요. 주인님이 더 늦었더라면 저는 그의 사생아를 가졌을 거예요. 엉엉엉…….”
‘소소 낭자…….’
주광효와 송정풍은 1월의 저온에 조금씩 경직되기 시작했다.
쿵!
이묘진은 주전자 뚜껑을 다시 덮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허 대인의 큰 베포에 감사드립니다. 이 일로 제가 신세를 졌으니 다음번에 무슨 요구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 주세요.”
허칠안이 그제서야 미소를 보였다.
“이 장군님, 별말씀을요.”
이호의 승낙은 아주 값어치 있었다. 오랫동안 곁에 머무를 수 없는 매(魅)로 승낙을 얻어 냈으니 이익이다.
그는 역참을 나서는 이묘진을 배웅하러 문 앞까지 걸어 나가 물었다.
“이 장군의 신분과 수련 품계로 봤을 때 매(魅) 하나가 아쉬울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묘진이 헤아리며 말했다.
“매(魅)는 보통 귀신이 아닙니다. 반드시 음년(陰年) 음월(陰月)에 태어난 여자여야 하고, 죽은 뒤에도 처녀의 몸이어야만 매(魅)로 거듭날 수 있지요.”
‘음년(陰年) 음월(陰月)은 어느 해 어느 달이야?’
허칠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은 척했다.
“하지만.”
이묘진이 말머리를 돌리며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설령 짐승을 키운다 해도 감정이 생겨나지요. 안 그렇습니까?”
허칠안은 웃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더 이상 그렇게 어색하고 낯설지 않았다.
이묘진이 기회를 엿보다가 물었다.
“허 대인께서 저를 좀 더 배웅해 주실 수는 있을는지요?”
허칠안이 훈남 같은 미소로 답했다.
“기꺼이요.”
그가 말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꼼짝하지 않고 그곳에 앉아 있는 송정풍과 주광효가 보였다. 뒷모습이 고독하고 쓸쓸했다.
“가시죠!”
허칠안의 미소가 점점 더 밝아졌다.
* * *
그들은 널찍한 거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이묘진은 등에 은색 창을, 허리춤에는 장검을 매고 있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내디디는 모습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허칠안은 계속 고개를 돌려 이 천종 성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녀의 풍격은 경찰학교를 다닐 때 짝사랑했던 친구를 떠올리게 했다.
귀까지 오는 똑 단발에 뚜렷한 이목구비, 깨끗한 얼굴 그리고 카고바지를 입은, 곧게 쭉 뻗은 두 다리.
허칠안은 머릿속으로 그 경찰학교의 얼짱과 비교해 봤다. 그래도 백마를 타고 은색 창을 매고, 선홍색의 피풍을 걸치고 갑옷을 입은 이묘진이 몇 수 더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묘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허 대인, 강호의 아들딸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지만, 저도 결국에는 소저인지라 대인께서 이렇게 쳐다보시는 건 아주 실례입니다.”
‘퉤, 역시 이 남자는 호색가군. 더럽다.’
이묘진은 허칠안을 연회에서 처음 봤을 때는 호색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단순하지 않은 색마.
‘색마라는 인상을 바로잡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대중 평론의 피해야…….’
그래도 허칠안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장군님이 제 적과 매우 닮았습니다.”
‘퉤!’
이묘진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 얼굴에는 웃음을 띠었다.
“이 백제성은 경치가 아름답지만 허 대인께서도 순무를 따라 걸어오면서 황량한 광경을 적잖이 보셨을 겁니다.”
“실로 탄식을 금치 못했습니다.”
“통상적으로 한 주(州)의 도지휘사사가 관할하는 위소(衛所)는 20~30군데지만, 운주 도지휘사가 관할하는 위소는 15개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묘진이 자문자답했다.
“운주는 인구가 적고, 비적의 난이 심각하여 대규모로 병력을 주둔할 수가 없습니다. 병사가 없다면 어떻게 비적을 토벌하겠습니까?”
대봉 군제에 따르면 도지휘사사 아래의 주부(州府)는 1급으로 ‘위(衛)’를 설립하고, 위마다 5600명씩 둔다. 주부 아래의 군현(郡縣)은 ‘소(所)’를 설립하고, 소마다 1100명씩 둔다.
위소는 15개의 주(州)에만 있을 뿐이지만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운주는 비적의 난이 심각한 지역이라 이치대로라면 위소가 25개는 넘어야만 합격이라 할 수 있었다.
“양전을 개간하고 군대에서 평소에 직접 경작하면 아마도 자급자족할 수 있을 겁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각지의 도지휘사사가 군전(軍田)을 소유하고 있어, 군대가 전쟁을 치르지 않을 때는 농민처럼 일을 한다.
이묘진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군인 봉급과 지급품은요?”
허칠안은 침묵하다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송구스러워요!”
그는 그제야 떠올랐다. 군대에 가면 봉급과 지급품을 준다. 먹을 밥이 있다고 충분한 게 아니다. 모집한 병사가 많을수록 봉급과 지급품도 많아진다. 만약 봉급과 지급품을 지급하지 못하면 군대에서 빈번하게 소동이 일어난다. 이런 사례는 사서에 비일비재하다.
“제가 운주에 온 지 일 년이 넘었는데 도지휘사 양천남과 손을 잡고 20여 차례 비적을 토벌했습니다. 그는 매번 최선을 다했지요. 저는 이런 사람이 산적과 결탁했으리라 믿지 않습니다.”
이묘진이 본성을 드러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허칠안을 쳐다봤다.
“허 대인께서는 이번 사건 수사의 중요한 인물이시죠. 대인의 태도가 순무의 태도를 결정하니 저는 대인께서 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시길 바랍니다.”
“이 장군 과찬이십니다. 저는 한낱 동라일 뿐입니다.”
허칠안은 적당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이묘진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제가 허 대인을 조사한 적이 있어 대인에 관해 충분히 아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네가 사건 수사에 정통하다거나 교방사의 여러 기녀와 관계를 가진다거나…….’
“허 대인께는 운록서원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사촌 동생이 있으신 듯한데?”
‘이호가 역시 삼호의 신분을 의심하는군. 신년이 바로 뜨거운 마음씨를 가진 지식인 삼호라고 의심하는 거야……. 이 기회를 이용해서 오해를 확대시켜도 무방하겠어. 어쨌든 신년은 서원에 있고 이호는 운주에 있으니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이렇게 하면 나는 신년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이호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 어쨌든 내 자신의 신분은 드러낼 수 없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후의 결과가 너무 두렵다.’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신년은 가슴 속에 포부가 가득 찬 지식인이죠. 운록서원 대유들의 눈에 들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서원의 계승자로 양성한다고 합니다.”
‘계승자로서 양성한다니…… 어쩐지 삼호가 운록서원의 구조를 많이 알고 기밀 정보들을 알고 있더라니…….’
이묘진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허 대인 역시 피가 끓고 계시네요. 의리가 강하고 의협심이 넘치십니다.”
이묘진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 절을 한다는 말처럼, 그녀는 허칠안에게도 미미한 호감이 생겼다.
허칠안은 그저 허허 웃었다.
‘내가 이때 칼 맞아 뒈질 원경제! 라고 하면 나에 대한 이호의 호감도가 폭발하겠지.’
* * *
두 사람은 몇 마디 나눈 뒤 작별했다. 한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갔고, 한 사람을 뒤돌아 돌아갔다.
이묘진은 으슥한 골목을 찾아갔다. 그녀는 술주전자를 꺼내 봉령부를 지워버리고 소소를 풀어 주었다. 이어 종이 인형이 튀어나와 그녀에게 부착물 역할을 충당했다.
종이 인형은 곱게 화장한 소소 낭자로 변했다. 얼굴은 슬픔과 원망으로 가득했다.
“주인님…….”
이묘진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그에게 무슨 말 했니?”
허칠안이 한마디로 그녀가 도문 제자의 신분임을 까발릴 수 있었던 건 분명 소소를 고문하여 얻은 정보 때문이었다.
소소는 손을 들고 엄지손가락을 누르며 의사를 나타냈다.
“조금만 얘기했어요.”
“조금이 얼마인데?”
“조금이 조금이지요.”
“말해!”
“별말 안 했어요. 주인님 신분이랑 나이랑 수련 품계랑 산에서 내려와 단련하고 계신 일이랑…….”
“?”
큰 물음표가 이묘진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너 이거 전부 다 말한 거 아니냐?”
* * *
허칠안은 역참으로 돌아왔다. 주광효와 송정풍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서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동료를 향한 불신이 가득했다.
“자네 왜 나에게 소소와의 일을 알리지 않았는가?”
“자네도 얘기하지 않았잖나?”
허칠안이 돌아온 걸 보자 송정풍은 풀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칠안, 자네 소소의 신분을 진작에 알고 있었는가?”
“알고 있었네.”
“그럼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건가?”
주광효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들이 나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했잖나.”
허칠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송정풍과 주광효는 그의 눈빛을 보더니 갑자기 마음이 불신으로 가득 찼다.
“그럼 우리가 소소와 찻집에서 생긴 일은…….”
송정풍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전부 다 자네들 환각이네!”
허칠안이 이실직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