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214화 (214/712)

214화. 서신 (2)

바깥에 있던 궁녀가 시위 손 안의 서신을 받아 문을 연 궁녀에게 전달했다. 그런 다음 몸을 옆으로 기울인 채, 침상 맡에 앉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보이는 임안을 쳐다보고선 눈치껏 물러갔다.

문을 연 건 허칠안에게 엉덩이를 맞은 그 아리따운 궁녀였다. 그녀는 서신 봉투를 뜯고 펼쳐서 훑어보았다.

총명한 궁녀는 첫 마디만 보고 더는 읽지 않았지만, 누구의 서신인지까지 추측해 냈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마마, 개자식이 보낸 서신이에요.”

임안은 즉시 고개를 돌려 편지지 두 쪽을 훑어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무 길어. 안 볼래.”

임안공주다웠다. 두 궁녀는 뒤에서 웃으며 서신을 탁자 위에 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비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마마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

궁녀가 나가자마자 임안은 탁자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곧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는 투덜거리며 탁자로 걸어가 서신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회경의 말을 듣고 좀 화가 났다. 개자식은 겉으로만 충직한 척하더니 알고 보니 종일 교방사에 빠져 사는 호색가였다. 그녀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유를 알지 못해서 돌아온 후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통상적으로 보자면, 그녀는 지고한 임안공주였으므로 수하에 시위가 수두룩해도 그자들의 생활 태도가 어떠한지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앞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가 앉은 자세는 정기가 넘쳤는데 어릴 때부터 좋은 행동거지, 앉은 자세, 걸음걸이를 길러온 덕분이었다.

“……밤은 길고 잠이 오지 않습니다. 마마의 웃는 모습과 목소리가 눈앞에 있는 듯 귓가에 울려 퍼집니다. 보름 동안 보지 못해 무척 그립습니다.”

“퉤!”

임안은 침을 내뱉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형식적이지 않은 첫머리는 상대방의 의존과 그리움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자신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임안공주는 이런 수법에 가장 잘 넘어간다.

그녀는 낭만을 좋아하는 소저다. 다시 말해 카리스마 넘치는 회장님은 이 시대에서 싹을 틔울 수 없었다. 현대였다면 임안은 로맨스 소설의 광팬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어서 읽어 내려갔다. 서신에는 아주 다양한 기기괴괴한 일들이 쓰여 있었다.

예를 들어 운하에서 물귀신이 사람을 해하려 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녀의 개자식이 제 생명을 돌보지 않고 사람을 구하러 강으로 뛰어들어 여러 차례의 접전 끝에 그 가엾은 시위를 구해냈다고 했다. 시위는 베푼 은혜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절을 했지만, 개자식이 그를 부축하여 일으킨 후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말했다.

“남자의 무릎 아래에는 황금이 있네!”

‘정말 말을 잘해.’

임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볼수록 빠져들었다.

그녀는 이런 기괴한 일들을 즐겨 봤다. 충분히 흥미롭고 놀라우면서도 섬찟하고 자극적이었다.

문밖에서는 곁에서 시중드는 두 궁녀가 몰래 문틈 사이로 지켜보고 있었다. 임안공주는 놀랍게도 탁자에 앉아 무언가에 홀린 듯 살짝 웃다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또 겁에 질린 표정을 짓기도 했다.

조용히 물러나 두 사람은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공주마마 기분이 다시 좋아지신 거야?”

“음, 그래 보여. 서신도 아주 열심히 읽으시잖아.”

“언니, 서신에 뭐라고 써 있었는데?”

“묻지 마. 주인님의 일은 함부로 묻지 마. 너 궁 안의 상궁이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어?”

“허칠안은 정말 능력자야. 그를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그에게 이렇게 마음을 쏟으시다니…… 음, 이런 말은 아무데서나 함부로 하지 않을게.”

* * *

임안은 여운이 남은 채로 마지막까지 읽었다. 물귀신 이야기는 이미 끝났고 개자식은 청주의 연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홍련이라고 하는데 불같이 요염한 모습이 소직으로 하여금 붉은색 치마를 입은 마마의 독보적인 자태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서신을 읽던 임안의 동글반반하고 빛나는 얼굴에 붉은 노을이 자욱해졌는데,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영 켕기는지, 문가를 힐끔힐끔 보더니 편지지를 손바닥 안에 쥐었다.

“그, 그는…….”

임안공주의 갸름한 얼굴이 쿵쿵 미친 듯이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는 후끈 달아올랐다.

‘감히 나한테 이런 서신을 쓴다고?’

동라 주제에 공주를 꼬신 일이 일단 발각되면 죽음으로써 죄를 물어야 했다. 임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신을 찢어 증거를 없애고 싶었다.

하지면 그녀는 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엄마 배 속에서 나온 이후로 공주는 처음으로 이런 성격의 서신을 받아보았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자극적이며 허칠안이 하는 말이 듣기 좋았다.

그래도 제법 영리한 임안은 밝고 새까만 눈을 굴리다 방법을 떠올렸다. 그녀는 바싹 말라 쪼글쪼글해진 꽃잎과 서신을 한데 두고 아주 두꺼운 책 속에 끼워 두었다. 진 귀비가 그녀에게 선물한, 하나뿐인 책이었다.

“좋아. 이렇게 하면 발견할 수 없겠지!”

임안은 한숨을 내쉬고,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 둘이 뜰에 있다가 공주마마의 부름을 들었다.

“옷을 갈아입게 들어와. 본궁 붉은 치마로 갈아입을 거야!”

궁녀들은 소리 내서 대답한 뒤 방으로 들어가 임안공주의 환복을 시중들었다. 그녀의 지시로 불같이 붉은 예쁜 치마로 바꾸어 입혔다.

임안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사뿐사뿐 도니 치맛자락이 마치 꽃이 핀 듯했다.

“절세미인의 자태를 보라고!”

그녀는 아래턱을 치켜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

“…….”

궁녀들은 영문을 모른 채 서로 쳐다봤다.

“마마, 화 풀리셨어요?”

한 궁녀가 떠보았다.

“무슨 화?”

임안이 반문했다.

“그 개자식이요.”

궁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임안이 버들눈썹을 치켜세우고 씩씩거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개자식이니? 개자식이 네가 부를 수 있는 호칭이니? 너는 허 대인이라고 불러야 해.”

‘나의 개자식은 다른 사람이 부르지 못하게 할 거야.’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 * *

부향이 영매소각에서 흰 무명 치마를 입고 머리를 산발한 채 아직 치장하지 않은 상태로 대바구니를 들고 뜰에서 매화를 꺾었다.

아름다운 매화가 정원에 그윽했다. 그녀는 흰 치맛자락을 바닥에 질질 끌었으며 새하얀 손목에 대바구니를 걸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꺾은 매화가 한 떨기 한 떨기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다른 팔을 들어 가지를 꺾었다.

매화와 미인이 어울려 돋보였다.

여종은 뜰 안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자니 눈과 마음이 즐거웠다. 지금 아가씨는 점점 담백해지고 있었다. 매일 춤을 연습하고, 거문고를 타고 매화를 감상하며 우아한 짓만 골라 했다.

다도회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간단히 한잔하러 나갔다가 손님을 방치하고 떠났지만, 손님들은 화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열렬한 사랑을 보냈다.

지금은 부향 기녀의 얼굴은 한 번 보기만 해도 남자들이 며칠 동안 큰소리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암향부동월황혼’에 이어 또 다른 시 한 수의 인기가 꽤 좋았다. ‘미인권주렴, 심좌빈아미(*美人卷珠簾, 深坐顰蛾眉: 아름다운 여인이 주렴을 걷고 홀로 앉아 눈썹을 찌푸리네)…….’

교방사에서 널리 알려 이 시로 고사를 지었다.

허 대인이 남다른 재주로 부향 낭자를 울렸다가, 낭자를 기쁘게 해 주려 조급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에는 독한 술 세 잔을 연거푸 마신 후 술기운을 빌리니 영감이 샘솟아 이 시가 세상에 나왔다.

단순한 시는 영혼이 없었지만, 고사가 생긴 후 바로 흥미진진해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들은 부향이 재주와 운이 있는 여인이니, 그녀와 많이 교류하면 자신도 허칠안처럼 후세에 전해질 시를 지어 자손 대대로 명성을 떨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봉판 자작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낭자는 허 대인이 경성을 떠난 후 늘 한숨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사흘 간격으로 한 번씩 사람을 보내 허 대인이 경성으로 돌아왔는지 소식을 알아보았다.

이때 마당 입구를 지키던 머슴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손에는 서신 한 통을 쥐고 멀리서부터 흔들며 말했다.

“부향 아가씨, 청주에서 온 서신입니다. 허 대인이 보낸 것이에요!”

허칠안은 공주들에게 부치는 서신에는 이름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부향과 집에 보내는 서신은 꺼릴 필요가 없었다.

부향은 본래 홀로 재미를 즐기고 있던 터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대바구니를 내던졌다. 매화도 버리고 치맛자락을 들고 뛰어가 맞이했다. 여종에게 서신을 전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머슴아이 손에서 서신 봉투를 뺏었다.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갑자기 선물을 받아 뜻밖의 기쁨을 누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허랑이 내게 서신을 보내다니…….’

부향 마음속에 환희가 들끓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래도 그 남자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코, 적당히 놀면 그만인 진지하지 않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깨달음으로 인해 몸이 공중에서 떠다니는 듯 아찔했다.

“아가씨…….”

여종이 작은 소리로 일깨웠다. 낭자 얼굴의 미소는 지나치게 바보 같았다.

부향은 그녀의 말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치마를 들고, 한 손으로는 서신을 챙겨 아주 빠른 발걸음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 * *

그녀는 문을 닫은 후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신을 뜯었다. 그리고 서신을 보면서 침상으로 걸어가 침상 맡에 앉았다.

그녀는 분홍 입술을 오므리고, 한 글자, 한 구절 보았다. 서신이 길지 않아 너무 빨리 읽어서 없어질까 봐 겁났다.

부향은 허칠안이 청주의 교방사에 가지 않았단 얘기를 듣자 괜히 기뻤다. 부향은 그가 보고 싶을 때 손톱 손질하는 걸 잊지 말라는 내용을 본 터라 어리둥절하다가 그제서야 이해했다.

“쳇!”

부향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개진 채로 퉤 내뱉더니 서신이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가슴에 품고,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도톰한 입술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 * *

사천감 쪽은 서신을 다소 늦게 받았으나 마침 식사 시간에 도착했다. 저채미는 연금술사로 승직하기 위한 노력을 다음 해 분량까지 다 써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내년부터 게으른 사람이 되려 했다. 몇 년 지난 뒤에 다음 품계로 승직할 테니 어쨌든 그렇게 힘들지 않아도 되리라.

동글반반한 계란형 얼굴이 좀 홀쭉해져 턱도 뾰족해졌다.

그녀는 식당에 앉아서 사형, 사제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저채미는 밥을 먹기 전에, 허칠안이 자신에게 보낸 서신을 먼저 볼 계획이었다.

그녀는 음식 얘기를 보고 좀 신났다.

“우주에 결구배추 햄이라고 하는 맛있는 음식이 있더이다. 햄은 남방 특유의 음식으로 북방에서는 구하기 힘들지요. 청주에 맛있는 음식이 수만 가지이니 제가 하나하나 다 말씀드리게 해 주시오…….”

저채미는 눈을 크게 뜨고 꿀꺽꿀꺽 침을 삼켰다. 이 서신을 다 보고 나니 사천감의 평범한 음식이 단숨에 맛없어진 듯했다.

그녀는 뜻밖에 음식을 삼키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밉살스런 허칠안…….”

저채미는 탁자를 치며 일어나더니 화가 잔뜩 나서는 밖으로 나갔다.

“채미 사매 어디가?”

“저 청주에 갈 거예요, 그리고 우주도!”

“응?”

“주루에 갈 거예요. 사천감의 음식은 안 먹을래요. 형편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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