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서신 (1)
“회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임안이 눈을 재빠르게 굴리며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문밖을 바라보았다.
“하급 관리가 말을 전하러 갔단다. 회경은 좀 늦게 올 거야.”
태자가 웃으며 말했고, 이어 기침을 했다.
“오늘은 사천감에서 특제 비법으로 제조한 치킨스톡을 판매하는 날이라 궁에도 좀 보내왔더구나. 그래서 본 태자가 맛을 좀 보라고 연회를 베풀어 동생들을 초대한 거야.”
사실 진작 며칠 전에 사천감에서 치킨스톡 한 무더기를 ‘조공하여’ 황궁의 어선방으로 보낸 참이었다. 그 탓에 몇몇 황자와 황녀는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조미료의 맛을 누렸다.
그가 이 핫이슈를 언급하자 황자와 황녀들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치킨스톡 맛은 정말이지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어. 다만 금방 목이 마르긴 하더라.”
“어제 아바마마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 담백한 음식이야말로 건강을 지키는 길이야.”
몇몇 황자들이 말하면서 슬그머니 입을 삐죽거렸다. 그들은 원경제가 곳곳에 뿌린 양생 이념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중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보온병에 구기자를 달여 넣을 생각을 하는 법이거늘, 젊은 사람이 양생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임안은 좌우를 둘러보면서 동글동글 매끈한 아래턱을 치켜올렸다.
“치킨스톡을 누가 발명했는지 알아요?”
그녀는 이 순간 가식적인 여우로 변했다.
황자와 황녀들은 정말 몰랐다. 황궁 안에서 이 사실을 아는 건 세 사람뿐이었다. 태자, 임안 그리고 회경. 세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형제자매들이 캐묻자, 여우는 아래턱을 더 높게 치켜들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며 말했다.
“허칠안이에요, 제 부하.”
그녀는 핵심을 뒤 구절에 두고 강조했다.
“허칠안?”
사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회경의 사람 아니더냐?”
사황자는 회경의 친오빠다.
“지금은 제 사람이에요. 그가 제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어요.”
여우는 자신이 회경의 사람을 뺏어온 행위를 과시했다.
형제자매가 보기에 그녀는 시종일관 회경에게 무시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 어렵사리 한 판을 만회해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허칠안이 뛰어날수록 더욱 기뻤다. 성취감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었다.
모든 황자와 황녀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고, 사황자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친여동생의 사람을 빼앗은 임안이 아주 못마땅했다.
그는 황후가 낳은 적자로 지위가 본래 가장 높아야 하지만, 태자의 자리는 결국 서자에게 넘어갔다. 바로 현재의 태자이자 임안의 친오빠에게.
동시에 원경제는 다른 자녀들을 차별 없이 대하면서도, 유독 임안을 끔찍이 아끼고 회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 점은 사황자를 더욱 자신 없게 했다.
황후는 회경이 강하고 포악한 게 젊었을 때의 부황과 아주 비슷하며, 재주는 훨씬 뛰어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만약 남자였다면 아마 부황의 미움을 더 샀을 것이다.
“허칠안이 누구 사람이라고?”
이때, 문밖에서 회경의 오만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 빛깔의 치마를 입은 황장녀가 왔다.
임안의 오만방자한 기세가 단숨에 ‘훅’ 꺾인 걸 모든 황자와 황녀가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먼저 굴복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금세 졸아붙어서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당 반씩 해!”
그녀는 기세등등한 말투를 썼지만, 내용에서는 쫄렸다는 티가 팍팍 났다.
회경은 ‘허’하고 소리를 냈다.
그녀는 허칠안이 여기저기서 환심을 사려 드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를 눈감아주며 용인한 주된 이유는, 임안이 어리석은 동생이라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사람을 뺏는 건 단지 그녀를 화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회경은 다른 황자가 감히 이렇게 그녀의 사람을 빼앗는다면 반격했을 터였다. 임안을 상대하는 것처럼 단순히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사정을 봐주지 않고 반격했을 것이다.
회경이 임안 앞으로 걸어가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비켜라. 이 자리에 내가 앉아야겠다.”
임안이 고개를 드니 회경의 눈만 보일 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회경은 그녀를 기죽게 했다. 이 언니는 그녀보다 더 재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엄도 있었다. 부황의 총애를 제외하면 그녀는 회경보다 잘난 구석이 없었다.
임안은 여린 아가씨였다. 회경에게 이렇게 무시당한 뒤 억울함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방법이 없다. 싸워도 이기지 못하고 말다툼하면 황녀의 신분을 잃는다. 게다가 회경은 지식인이라 상스러운 말을 내뱉지도 않는다. 임안은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태자는 ‘기침’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띄우러 나왔다.
“회경, 임안을 상대하지 말아라. 네가 언니잖니.”
회경은 그제서야 임안을 놓아주고 괴롭히지 않았다.
* * *
밥을 먹을 때 태자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오늘 어서방에서 생긴 일은 들었니?”
사황자가 즉시 대답했다.
“경계비와 조운 관아요?”
태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조운 관아의 일을 우리가 참견할 필요는 없어. 응당 조당의 제공들과 아바마마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허나 경계비 일은 훌륭하더구나.”
사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식이록, 민지민고, 하민역학, 상천난기!”
“좋은 시군요!”
회경의 눈이 반짝였는데, 청아하고 수려한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그녀는 원래 잠자코 있었지만,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핵심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취후불지천재수, 암향부동월황혼’보다 더 좋았다.
‘무슨 시시한 시야. 조금도 정취가 없는데…….’
반면 임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회경이 사황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시는 누가 지은 거예요?”
그녀는 여태껏 궁중의 소식에 관심 두지 않았다.
태자가 대신 대답했다.
“허칠안이다.”
“좋은 시야!”
임안이 두 손으로 탁자를 ‘탁탁’ 치면서 큰소리로 칭찬했다.
“그의 성격답네요.”
회경이 씩 웃었다.
“뭐가 그의 성격답다는 거람? 마치 그를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임안이 습관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회경은 본래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 황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허칠안 이자는 악한 일이나 악한 사람을 증오해. 사소한 일은 상관하지 않고 일의 핵심에 손해를 끼치지 않지. 입만 번지르르하고 허울만 좋은 지식인들과는 달라.”
“그가 은라를 칼로 벤 일을 말하는 것이냐?”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저께 위 공과 한담을 나누다가 이자의 얘기가 나왔습니다.”
회경이 황자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위 공이 말하길 허칠안이 야경꾼에 들어온 이래로 한 푼도 횡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가 사소한 일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임안은 회경이 그녀의 충견을 헐뜯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회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회경공주가 말했다.
“허칠안은 교방사에 빠져 외박이 잦아. 영매소각의 기녀 부향과의 관계가 얕지 않거든.”
임안 얼굴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그녀가 다정다감한 도화안을 크게 뜨고 큰 소리로 말했다.
“헛소리!”
그녀는 말없이 밥을 몇 숟가락 퍼먹더니 음식이 맛이 없어진 것 같아 젓가락을 내던지고 성질을 부렸다.
“안 먹어.”
그녀는 일어나 치맛자락을 들고 자신의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를 데리고 떠났다.
* * *
임안이 화가 나서 갔지만, 이 일이 식사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태자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술잔을 들고 연회를 계속 이어나갔다.
회경은 연회가 끝난 후 자신의 궁원(宮苑)으로 돌아와 차 한 사발을 꿀꺽꿀꺽 마신 뒤, 규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토납했다.
그녀는 최근에 남몰래 연기경으로 승직했다. 그날 위연을 찾아가 ‘한담을 나눈’ 건 이 일 때문이었다.
회경은 타고난 자질이 좋았지만, 줄곧 참고 견디며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수련 품계를 적당히 끌어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된 이유는 올해 한 해 동안 원경제가 공주들의 혼사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황이 도를 닦고, 황후는 불계(佛系)였다. 그러니 원경제가 언급하지 않으면 그녀도 신경 쓰기 귀찮아했다. 황후는 늘 이러했다. 천하의 백성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돌봐야 하는 황후는 자신의 직무와 신분에 조금도 열을 올리지 않았다.
“전하, 부상(府上)에서 서신 한 통을 보내왔습니다. 청주에서 부친 것이라 합니다.”
시위가 황급히 들어왔다.
부상이 가리키는 건 황성 안의 회경부다.
공주와 황자의 서신은 보통 황궁에 들어올 수 없어 각자의 부상으로 보내진다.
‘청주?’
회경공주는 자양거사가 그녀에게 쓴 서신이라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져오거라.”
시위는 정중히 서신을 건넨 후 물러났다.
회경이 서신 봉투를 벌리자 보인 첫 구절은, ‘이 서신을 쓸 때면 저는 이미 청주 국경에 도착하여…….’였다.
‘…….’
회경은 서신을 쓴 사람이 허칠안이라는 걸 바로 알았다. 서신은 아주 길었는데 무려 두 쪽에 달했다. 그녀는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이내 회경공주는 우주 조운 관아의 횡령 사건과 관련된 글을 읽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계속 읽어 내려가니 갑자기 진지함이 다소 사라졌다. 뒷부분의 내용이 상급자에게 사무를 보고하는 부하의 어조가 아니라 흠모하는 여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남자의 말투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진흙에서 나오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물로 씻어내도 요염하지 않죠. 덩굴이나 가지가 뻗지 않아 그 모습이 반듯하고, 멀어질수록 향기가 더욱 짙고 맑아져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벼이 희롱할 수는 없지요…….”
회경공주는 중얼중얼 반복하며 더없이 아름다운 미사여구에 빠졌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연꽃이 만발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혀를 찼다.
“허칠안이 학문에 전념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애석하다, 애석해…….”
회경공주가 말을 마치고 서신 봉투를 쏟아내니, 바싹 말라 쪼글쪼글해진 연꽃잎이 미끄러져 나왔다.
‘이 자식, 이 서신으로 나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거야? 황당한 놈이네.’
회경공주는 생각에 잠겼다.
‘본 공주가 만일 서신을 황궁에 전한다면, 그는 머리가 열 개라도 베기에 부족하겠지.’
그녀는 서신 봉투를 잘 접어서 자주 보지 않는 서책에 끼워 보관했다.
그런 후, 궁녀를 불렀고, 서신에 있던 연꽃에 관한 좋은 글귀를 써서 서재에 걸어두었다.
회경은 이 글자를 바라보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 *
“전하께서 왜 그러셔?”
“모르겠어. 태자 전하께 갔다가 돌아오신 후에 줄곧 울적해하시네.”
“아마도 장공주마마께 괴롭힘을 당했겠지. 그런데 이상하다. 만약 장공주마마께 무시당한 거라면, 마마께서는 지금쯤 한바탕 욕을 퍼붓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을 텐데 말이야.”
궁녀 몇몇이 뜰 안에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임안이 방금 막 성질을 부려 침실에는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 둘만 남았다. 다른 궁녀들은 불똥이 튈까 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마께서는 왜 회경공주마마에게 지기 싫어하시는 거예요…….”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가 타일렀다.
“언니 때문이 아니야!”
임안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 개자식 때문이라고.”
두 궁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개자식’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궁녀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마의 개자식은 경성을 떠난 지 보름이 넘었는데…….’
“그가 또 마마의 기분을 건드렸나요?”
“나도 몰라.”
임안의 표정은 우울했다.
“그냥 마음이 편치 않아.”
“???”
이때, 시위 하나가 뜰에 와 임안공주에게 회견을 청했다. 궁녀들은 임안공주마마 댁의 시위인 걸 보고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문을 두드렸다.
“마마, 시위가 회견을 요청합니다. 마마의 서신이 있는데 청주에서 보내온 것이라 합니다.”
‘청주에서 온 서신?’
임안은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인맥이 아주 좁았다. 황궁의 형제자매를 제외하면 종실의 형제자매 그리고 몇몇 대인들의 처(妻)가 이따금 여인의 규방에서 열리는 사적인 다도회에 참석하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쓰곤 했다.
하지만 여기에 청주는 포함되지 않았다.
“누가 보낸 서신이야?”
궁녀가 대신 물었다.
“모르겠어.”
밖에 있는 궁녀가 대답했다.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가 임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곤 돌아서서 소리쳤다.
“가져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