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비문의 여파
위연은 책을 널리 읽어 학식이 풍부하고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 이내 세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첫째, 한 몸에 두 개의 혼.
서역 불문에는 많은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득도한 고승은 좌화(*坐化: 앉은 채로 죽다)한 후 어느 아이의 몸속에서 회생한다고 한다. 그 고승은 기억이 온전할 뿐만 아니라 불법도 타고난다고 한다.
이는 고승의 잔혼(殘魂)이 막 태어난 아이와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원신은 선천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강대하고 신기한 점이 많기 때문에, 보잘것없을 때에도 이중 관상을 할 수 있다. 그들의 원신은 사실 미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몸에 큰 기운이 있는 자.
이런 사람은 극히 보기 드물다. 무릇 기운이 큰 사람은 모두 어느 한 방면의 강자이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도문의 도수, 사천감의 감정, 무신교의 주술사 등등이다.
셋째, 고수 연장자의 뒷받침.
이런 사람은 얘기할 거리가 없다. 좋은 운명을 타고 태어난 자는 시작점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콜록콜록…….”
남궁천유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금라들에게 대표로 떠밀렸다. 양연이 없으니 위 공의 수양아들은 그 자리에 남구천유뿐이었다. 위 공이 수양아들을 변방으로 내쫓자니 섭섭해할 듯했다.
“의부님, 제가 애써야 할 일이 있나요?”
남궁천유가 눈 딱 감고 말했다.
위연이 그를 쳐다보더니 접본을 덮고 차를 한 잔 따른 뒤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별거 아니네. 사소한 일이야.”
‘사소한 일? 방금 표정 관리도 못 할 지경이었으면서…….’
금라들이 속으로 빈정댔다.
그들은 위연의 기분에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흐트러짐 없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방금은 폭풍전야였다면 지금은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산들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듯했다.
‘서신에 적힌 게 좋은 소식인가 보군.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지?’
남궁천유는 호기심에 물었다.
“의부님, 서신에서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위연은 진심으로 웃기 시작했다.
“허칠안이 연신경에 충격을 가하고 있다네. 서신은 강율중이 운주 국경에서 부친 것이니 지금쯤이면 연신경 승직에 성공했겠군.”
위연은 이중 관상의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불가능해…….’
남궁천유는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다.
허칠안은 막 야경꾼에 합류해 문심관(問心關) 시험에서 의부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때 그와 양연이 바로 옆에 있었다.
남궁천유는 허칠안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때문에 그는 허칠안의 내력을 가장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자가 야경꾼이 될 때는 연정경 전봉이었다. 남궁천유가 보기엔 ‘호’하고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약한 존재였다.
의부가 이자의 잠재력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그도 인정하긴 했지만,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달도 안 됐는데 9품 연정경에서 7품 연신경이 되다니. 이미 은라의 최저 기준에 닿았다.
“양연이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졌겠지.”
남궁천유는 질투가 났다.
간결한 검의를 지닌 장개태 역시 그를 마음속으로 시샘했다. 그는 전에 허칠안을 휘하로 끌어들일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방법도 다 생각해 뒀다. 은자와 미인계.
다만 금라의 체면이 마음에 걸려 실시하기에 내키진 않았다.
“허칠안의 천부적인 자질이 이렇게 특출났던가? 시일이 좀 지나면 우리 관아에 금라 하나가 또 늘겠군.”
“그가 주 씨 그 일로 손해 보지 않아서 다행이야.”
자리에 있던 금라들은 놀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야경꾼 관아에 만약 4품 무사가 늘어난다면 전체적인 영향력과 실력이 한 단계 더 올라갈 터였다.
고품 무사는 드물고, 자신의 힘으로 배양하는 고품 무사는 더욱 드물었다.
남궁천유, 이 질투충을 제외하고, 자리에 있던 다른 금라들은 이 일에 탄식과 개탄을 금치 못했다.
이게 바로 좋은 콘셉트 설정의 장점이다. 대다수 야경꾼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 하나가 고품 무사가 되는 일이 더 받아들이기 좋다.
만약 음흉한 소인배가 고품으로 승직한다면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꺼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허칠안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는 상관없는 소녀를 위해 상급자를 칼로 벨 수 있는 자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그는 사실 내면의 도덕성을 지키려 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의부님은 그를 수양아들로 거두겠지. 속을 알 수 없는 양연은 나와 총애를 놓고 다투지 않겠지. 그 얄미운 허칠안은 교활한데…….’
남궁천유는 질투심이 들끓었다.
위연이 구석에 있는 물시계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물러가거라. 같은 실수가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천유, 마차를 준비하고 나를 따라 입궁하거라.”
반 시진 뒤면 소조회였다.
원경제는 아침 조회에 나오지 않는다. 아침 조회는 그가 좌선하며 도리를 깨닫는 시간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소조회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번씩 열뿐으로 그다지 잦지 않았다.
지난번 소조회는 4일 전이었다.
* * *
차바퀴가 푸른색 석판이 깔린 거리를 다지며 지나갔다. 남궁천유가 말고삐를 힘껏 잡아당기자 마차가 궁성 문 앞에 멈췄다.
남궁천유는 차판(車板) 아래에 걸어놓은 작은 의자를 가져와 마차에서 내리는 위연을 맞이했다. 그러고 나서 성을 지키는 금오위에게 말고삐를 건넨 후 위연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 * *
어서방, 흑발이 다시 자라기 시작한 원경제가 황금 의자에 앉아 모든 대신을 훑어보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 포정사사에서 전해온 접본을 짐이 이미 내각을 시켜 옮겨 쓰게 한 후 모든 경들에게 보냈소. 짐은 경들의 의견을 알고 싶소.”
호부상서가 제일 먼저 대열에서 나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우주만의 특수한 사례라 여겨집니다. 대봉 각 주의 조운 관아에 전부 첩자가 있다는 장항영의 말은 사실무근입니다.”
공주 급사중이 맞장구쳤다.
“장항영의 말은 증거가 부족하여 믿기 어려우니 우주 조운 관아만 철저하게 조사하면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뒤이어 여러 관원들이 나서서 발의에 지지하며 조운 관아를 조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조운 두 글자는 예로부터 골칫거리였다. 조운과 연관된 이익 집단은 지나치게 방대하다. 경성부터 지방까지, 위로는 조정부터 아래로는 강호까지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중에 연루된 사람도 아주 아주 많았다.
원경제는 당대 재상을 보며 물었다.
“왕 경의 생각은 어떠하오?”
재상 대인이 읍을 올리며 말했다.
“신은 우주 조운을 철저하게 조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연, 자네는 무슨 의견이 있소?”
원경제가 위연을 쳐다보았다.
“신은 재상 대인의 의견과 일치합니다.”
위연이 대답했다.
모든 관원이 위연을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었다.
왕 재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위연을 한 번 쳐다봤다. 그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뜻이 통했지만, 사실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경찰이라는 이 중요한 시기에 누가 감히 조운 관아를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제안하겠는가. 그건 대봉 관리 사회를 스스로 배척하는 것이다.
두 호적수는 이렇게 저급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면서도 상대가 실수하길 바랐다.
원경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아주 깊어 기쁜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청주 포정사가 접본 하나를 전해왔소. 양공이 청주 각 관아에 경계비를 세우고 비문에 이식이록, 민지민고, 하민역학, 상천난기를 새겼다고 하오. 청주 포정사는 이 시가 어리석고 둔한 자들을 일깨우고 백관을 경고하는 효력이 있다고 여기어 조정에서 책임지고 각 주에서 이를 본받아 경계비를 세울 것을 권했소. 여러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어서방에 있던 제공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뒤로 귀에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좋은 시군, 좋은 시야!”
한 급사중이 흥분하여 앞으로 나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시는 그야말로 신묘하면서도 절묘합니다. 이 시야말로 저희 대봉에 있어야 할 시입니다. ‘암향부동월황혼’이나 ‘만선청몽압성하’가 아니라요. 신은 열정이 끓어오릅니다. 폐하께서 각 주에서 모범을 삼아 각 관아에 경계비를 세우라 명하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
현장에 있는 제공들이 이 급사중의 주청에 맞장구쳤다. 이익 다툼에도 당쟁에도 연관되지 않으니, 제공들은 단숨에 홀가분해져 용감하게 발언하고 각자의 의견을 내세웠다.
하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찬성 의견을 주장한 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양공이 명성을 떨치는 일이 못마땅했다. 어쨌거나 이 청주 포정사는 운록서원의 지식인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더 많은 사람은 조정이 이렇게 하길 바랐다. 이렇게 하면 사적이 전해져 조정에서 나라의 인심을 살핀다는 이미지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인이 명성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최근 몇 년간 민간부터 사족(士族)까지, 백성부터 향신(鄕紳)까지 원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경계비를 세우는 일은 조정의 명성을 좀 만회할 수 있었다.
왕 재상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말했다.
“신은 청주 포정사사를 본받길 제안 드리는 바입니다.”
원경제도 사실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비록 도를 닦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고 도가 지나칠 정도로 국고를 축냈지만, 스스로를 좋은 황제라 생각했다.
“양공 대유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구려. 이 시가 짐의 제위 기간에 탄생하였으니 반드시 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것이오. 짐은 각 관아에 경계비를 세우려 할 뿐만 아니라 직접 글을 쓸 것이니 짐의 친서를 가지고 가서 탁본하시오.”
원경제가 웃으며 말했다.
“양공은 그해 과거에 급제한 인재로 시사에 특출나오.”
왕 재상도 따라 웃었다.
위연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이식이록, 민지민고, 하민역학, 상천난기라…… 이는 허칠안이 그날 문심관에서 썼던 시가 아닌가? 어째서 양공의 것이 되었지? 아니면 본래 양공의 시인데, 허칠안이 그의 사촌 동생 허신년에게 들은 것인가?’
위연은 이내 이 추측을 부정했다. 시재(詩才)를 논하자면 양공 백 명이 허칠안 하나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 시는 최근에야 나타난 글이다. 순무 대오가 남하하면서 분명 청주를 거쳤을 것이다. 다시 말해 허칠안이 청주에 가면서 이 시가 다시 청주에서 전해진 것이다.’
위연은 납득이 되자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에 의혹이 생겼다.
‘이 시는 허칠안이 지은 것인데 어째서 폐하께서는 방금 등한시하신 거지? 고의인가 아니면 청주 포정사사가 일부러 허칠안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인가? 접본은 청주 포정사사에서 경성으로 보냈으니 이런 접본은 통상적으로 관아의 하급 관리가 대필한다. 어쨌거나 포정사가 어떤 일이든 직접 할 수는 없지. 다시 말하면 하급 관리가 포정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원작자를 등한시했다는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그때 가서 접본을 쓸 때 소홀했다고 말하기만 하면 어물쩍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일단 정해지면 양공의 명성은 이 시와 함께 널리 퍼질 것이다. 그때 가서 양공이 사후(事後)에 설명한다 해도 소식이 퍼질지가 문제고, 또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도 문제다. 허칠안의 문명(文名)이어야 마땅하다. 누구도 뺏을 수 없어. 역시 너무 격조가 높아, 젊은 놈이.’
위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뱉고 대열 앞으로 나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