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이곳은 부아다
허칠안은 백제성의 우뚝 솟은 둘레를 바라보았고, 웃으며 반문했다.
“그럼 이 전설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장 순무가 발을 들추고 먼 곳에 있는 백제성을 바라보며 이 유래를 얘기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진짜일 테지. 그렇지 않으면 사서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네. 가뭄과 홍수는 자주 있는 일이라 사관이 이런 일로 역사를 조작하지는 않을 걸세. 다만 그때 이후로 상서로운 짐승 백제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해.”
‘분명히 해외 몬스터겠지. 심지어 바다 괴물이니 구주에 여행하러 왔다가 큰 가뭄에 시달리는 운주를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아 환경을 변화시켰는지도 몰라…….’
허칠안은 ‘과학적인 관점으로 분석’하면서 말했다.
“대인 고견이십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계속해서 성벽을 조망하며 마음속으로 시 한 수를 떠올렸다.
<이른 아침 구름 사이로 백제성과 작별하고, 천 리 밖 강릉까지 하루 만에 돌아왔네. 강기슭에는 원숭이 소리가 멈추지 않고, 어느새 작은 나룻배는 첩첩산중을 지났네.>
‘천 리 밖 강릉까지 하루 만에 돌아왔다라…… 너무 사치를 부리는 거 아닌가. 나라면 오늘, 내일, 모레 1월 31일에야 미련 없이 돌아왔을 텐데.’
허칠안이 속으로 말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예전에 봤던 여행 광고를 떠올렸다. 금요일 퇴근 후 태국으로 직행해 하루 동안 소탈하게 풍류를 즐긴 다음 일요일에 귀국하라면서, 화이트칼라를 부추기는 광고였다.
그 광고대로라면 모두가 현대판 이태백이 되는 셈이다.
백제성의 문을 지키는 병사가 대오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조정에서 하달한 공문서를 본 후에 정중하게 통행을 허가했다.
허칠안은 성에 들어선 후 좌우를 살폈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 칼을 매거나 찬 행인들이 많이 보였다.
대봉은 무기 단속에 매우 엄격했다. 위로는 주부(州府)부터 아래로는 군현(郡顯)까지, 호송원같이 특수한 직업이 아닌 이상 성안에서는 일절 칼을 차고 다니면 안 됐다.
설령 호송원이라도 임무가 있을 때만 무기를 지닐 수 있었다.
‘운주의 특색인 셈인가?’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때 장 순무가 다시 차창의 발을 젖히더니 허칠안에게 말했다.
“칠안, 화물은 우선 돌려주지 말고 이 행상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게. 행상들에게 장부를 챙기라 한 다음 내일 역참에 와서 대조 확인한 후 도로 가져가게 하게.”
허칠안은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럼 조룡의 화물은요?”
장 순무가 말했다.
“당연히 그들에게 돌려보내야지. 조룡과 호송원 모두 살해당했으니 호송원의 가족들이 분명히 보상을 요구할 것이야. 지금 조룡이 이미 죽었으니 화물을 돌려보내는 건 그들의 손실을 메우는 셈이네.”
허칠안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인께서는 정말 잘 빠져나가시는군요.”
이 말을 들은 장 순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허칠안은 돌아서서 송정풍을 찾아가 그에게 알린 후 일을 하라고 분부했다.
“어째서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겐가.”
송정풍은 따르지 않았다.
“마치 내가 자네의 부하 같네그려. 우리는 분명 동등한 관계인데 말이야.”
허칠안이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순무 대인, 송정풍이 임무를 회피하며 억지를 부리니 그의 은자를 제하시지요.”
송정풍이 서둘러 말했다.
“가겠네, 가.”
그들은 돌아서서 주광효를 찾아갔고, 그에게 알린 후 일을 하라고 분부했다.
주광효가 답답해하며 말했다.
“칠안이 자네더러 하라고 한 거 아닌가?”
송정풍이 말했다.
“허칠안, 주광효가 임무를 회피하며 억지를 부리네.”
“…….”
주광효는 답답한 마음에 아무 말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다음 호분위 몇몇을 불러 일을 처리하러 갔다.
그러자 두 상놈이 한 데 모여 개탄했다.
“광효는 정말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일세.”
“그러게 말이야. 침상에서든 공무를 볼 때든 말이야.”
* * *
도지휘사사 양천남은 올해 40대 초반으로 정직하고 부드러운 지식인이다. 그의 또 다른 신분은 5품 무사다.
양천남은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했다. 그는 무예 연마와 독서를 좋아하여 원경 12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가학(家學)의 연원이 깊어 병서를 숙독하고 병부에서 공무를 돌봤다.
원경 16년에는 운주로 파견되어 비적 토벌에 공을 세웠고, 그 덕에 차츰차츰 도지휘사 자리까지 올라 운주에서 가장 권세 있는 셋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당처(堂處)에 앉아 공무를 살피던 양천남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몇 초 후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몸에 갑옷을 걸친 여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하급 관리는 이를 가로막지 않았다.
그녀는 키가 크고 늘씬한 체형이었으며, 허리에 패검(佩劍)을 차고 등에는 은색 창을 맸다. 날카롭고 갸름한 얼굴에 정교한 이목구비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연약함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기개가 넘쳤다.
그녀는 긴 말총머리를 높게 묶어 매끈하고 예쁜 이마가 드러났다.
“순무가 성에 진입했어.”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첫 마디는 아주 명쾌하게 문제의 핵심을 바로 가리켰다.
양천남의 표정이 잠시 굳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제명에 죽지 못하는 원경제. 온종일 도를 닦아 인간 세상에서 제왕이 장생을 꿈꾸다니, 정말이지 허황된 망상이야.”
그녀가 입을 벌리고 욕을 퍼부었다.
“@#@#*…….”
“묘진(妙眞)!”
양천남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묘진은 냉소를 지었다.
“나는 나랏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뭐.”
그녀는 은색 창을 벽에 기대고 손님을 모시는 자리의 찻상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패검을 무릎에 가로로 내려놓더니 물었다.
“순무가 있으면 병권을 내어 주는 게 대봉의 법도야. 그대는 어떻게 할 작정이야?”
“법도가 그렇다면 그에 따라야겠지.”
양천남이 말했다.
이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게.”
양천남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호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자네에게 목숨 바쳐 일하길 원하니 억울하지는 않군. 비연 여협객, 본관이 자네의 호의를 받아들이겠으나 분수를 지키시게. 수행 대오에 막강한 4품인 금라가 있어. 강호로 나오면 뜻을 품은 영웅호걸이지.”
이묘진은 정말로 개의치 않았다.
“뭐가 두려워. 3품도 안 되는데 인해전술을 당해 낼 수는 없어.”
* * *
‘운주의 음식은 좀 얼얼하고 매운 편에 향신료 넣는 것도 좋아하는군. 나는 이곳의 요리가 싫다. 매운 음식을 자주 먹으면 치질에 걸리지 않나?’
허칠안은 역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먹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당(大堂)에는 야경꾼과 호분위가 전부 모여 있었다. 한 탁자에 8명이 앉자 간신히 수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
백제성에는 역참이 네 군데 있었는데 이곳이 가장 컸다. 큰 마당과 바로 인접한 세 층짜리 건물이 두 채 있었고, 역승(驛丞) 한 명과 역졸 일곱 명이 있었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양앵앵도 역참에서 묵어야 했다. 그녀는 홀로 탁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젊은 부인의 몸매는 매혹적이었다. 앉았을 때 치마가 달라붙어 풍만한 곡선을 그렸다.
허칠안은 송정풍이 엉덩이를 주시하는 모습을 발견하자 탁자 밑에서 그를 걷어찼다.
“뭘 보나?”
그는 한 차례 질책하더니 자신도 몇 번 쳐다보았다.
“좀 보면 어떤가? 다른 이들도 다 본다네.”
송정풍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들이 이렇다. 예쁜 여자를 보면 자신의 시선을 절제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몇 번씩 훑기 마련이다. 아내가 곁에 있어야만 아주 굳센 의지로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참지 못하겠군. 안 보겠네, 안 보겠어.”
송정풍이 중얼거렸다.
방금 장 순무는 이미 명령을 내렸다. 운주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임무가 있지 않은 이상 교방사에 가도, 역참을 벗어나서도 안 된다고.
허칠안은 손을 들어 힘껏 쥐었다.
“뭐하나?”
송정풍이 망연하게 물었다.
“이건 불멸지악(不滅之握)이라고 하는데, 자네도 몰래 배워 볼 수 있네.”
* * *
장 순무는 식사를 마치고 허칠안과 강율중을 불러 방 안에서 공무를 논의했다. 어사 출신의 순무 대인은 경험이 풍부한 두 금라를 보며 말했다.
“운주는 비적의 난 때문에 금도령(禁刀令)을 철회했네. 따라서 낮과 비교했을 때 밤이 오히려 더 안전하지. 야간 통행금지가 아주 엄격하거든. 강 금라는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본관을 보호해야 하네. 사건을 조사하는 일은 당분간 칠안에게 맡기지. 역참 내에 야경꾼이든 호분위든 자네가 마음대로 배치하시게.”
‘……됐거든. 정말 호구가 됐군.’
허칠안은 장 순무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무 대인이 뒤이어 설명했다.
“맨 처음 며칠 동안은 본관이 여러 사람을 응대하지 않을 수 없네. 나 역시 운주 관리 사회의 속사정을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알겠어…….’
허칠안은 이 이유를 받아들였다.
“이해했습니다. 소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 순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자네 어떻게 사건에 착수할 계획인가?”
“우선 부아에 가서 주민의 사후 유품을 달라고 한 뒤 그의 집에 가 보려 합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무덤을 파서 검시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장 순무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께서 그렇게 물으시길 기다렸습니다.”
허칠안이 웃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은 지 보름이 넘었으니 부패한 피부가 부풀어 올라 찌르기만 해도 부서질 것이고, 비리고 퀴퀴한 추깃물을 배가 부를 때까지 마실 수 있을 겁니다.”
강율중은 방금 배불리 밥을 먹은 상황이었기에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장 순무는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소직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칠안은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 * *
그는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송정풍과 주광효를 포함한 동라 네 명, 서로 잘 아는 은라 한 명, 호분위 여섯 명을 불러 모았다. 그런 다음 말을 타고 부아로 내달았다.
주민은 편제된 조정의 명관이었다. 무릇 조정의 명관이 세상을 떠나면 부아에서는 검시를 담당하여 사인을 확인했다. 주민처럼 가족이 현지에 없는 관원은 부아에서 그의 유품 보관까지 책임졌으며, 유가족이나 조정에서 가지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허칠안은 말의 속도를 조절하며 이따금 역졸이 준 백제성의 감여도(堪與圖)를 보면서 한 시진 가까이 찾은 결과, 드디어 부아의 대문을 마주했다.
“관리 사회의 법도에 따라 이런 유물은 손을 거쳐 3할을 남기네. 탐욕스러운 자는 심지어 5할 가까이 남기지. 주민 경력의 유물은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군.”
당(唐) 씨 성의 은라가 개탄하며 말했다.
허칠안은 이런 암묵적인 관행은 처음 듣는지라 낯빛이 어두워졌다.
“대봉의 율법에 이런 사건에 관한 처벌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당 은라가 말했다.
“조정 명관의 유산을 몰래 삼키면, 재물의 귀중한 정도에 따라 가볍게는 곤장 50대를 치고, 무겁게는 곤장뿐 아니라 파면까지 하고 벌금을 부과하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물었다.
“야경꾼 관아도 이렇습니까?”
“어디 감히. 위 공께서 법령으로 금지했네. 게다가 우리 야경꾼은 저 벼슬아치들과는 다르지. 같은 조의 야경꾼들은 모두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우고, 같이 기루에 가는 친분이 있지 않은가. 누가 감히 몰래 삼킨다니, 형제라도 동의하지 않지.”
당 은라가 설명했다.
송정풍이 하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날은 칠안 자네가 희생했어. 누가 감히 자네의 위로금을 몰래 삼키면 이 몸이 반드시 그의 천한 목숨을 앗아가겠네.”
‘항상 네 말은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단 말이지…….’
허칠안은 이 실눈에게 비아냥거리기도 귀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