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경성을 떠나다
허칠안은 순리대로 임안의 저택에 머물렀다. 해 질 무렵, 허칠안은 공주의 저택을 거닐다가 저택 뒤 화원에 큰 연못이 있는 걸 발견했다.
연못가에는 오봉선(烏篷船)이 한 척 정박해 있었다.
“하, 그녀는 말로만 배에 누워 별을 보고 싶다고 얘기하지.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와 지리적 이점을 다 갖춰 놓고서 굳이 말로만 하는 건 뭐야……. 요즘 젊은이들은 입만 살았지, 실행력이 부족해.”
허칠안은 아무런 내색 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임안이 연회를 베풀어 그를 초대했을 때 제안했다.
“전하, 저희 장소를 옮겨 식사하시죠.”
공주는 눈을 반짝일 뿐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궁녀에게 탁자와 요리를 옮기라고 분부했고, 그 뒤 화원으로 가서 오봉선에 올랐다.
* * *
이내 궁녀들은 상을 차리고 숯불을 태웠다. 오봉선은 너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궁녀들은 연못가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궁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공주마마와 이 남자가 좀 가까워졌다. 낮에는 어떻게 해도 상관없지만, 밤에 연못에서 만나는 건 정이든 예의든 적절하지 않았다.
임안은 술 몇 잔을 마시더니 얼굴이 발개졌다.
“본 공주는 배에서 식사해본 적이 없어.”
촛불에 비친 그녀의 곱고 윤이 나는 얼굴은 결점 없는 아름다운 옥과 같았으며, 도화안은 마치 명주실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분명 탐스럽게 아름다운 고전 미인이었지만, 허칠안은 머릿속에서 그녀의 옷을 갈아입혔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녀는 선명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채, 청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발에는 하얀 운동화를 신고, 길고 쭉 뻗은 다리에 웨이브 펌을 한 모습이었다.
이내 밤의 장막이 내리고 초승달이 높이 걸렸다.
허칠안이 갑자기 말했다.
“누우시지요.”
임안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마음이 좀 동요해 생각지도 않고 뒤로 누웠다…….
“아이쿠.”
그녀는 머리를 갑판에 찧어 아픔에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멍해졌다. 땅거미가 진 하늘에 초승달이 걸려 있고, 듬성듬성한 별이 구색을 맞춰 적적하고 쓸쓸한 빛을 비췄다.
초승달과 별이 비치는 수면은 거울처럼 매끈매끈했다.
“취후불지천재수(*醉后不知天在水: 술에 취하면 하늘이 물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네), 만선청몽압성하(*滿船淸夢壓星河: 조용한 꿈에 가득 찬 배가 은하수로 인도하네).”
허칠안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푹 빠져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이 몽롱했다. 허칠안이 그녀를 바라보자니 새하얗고 우아한 턱선, 오뚝한 코, 조금 벌어진 앵두 같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같은 여자아이는 천성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살짝 취한 후의 자태는 그야말로 한없이 매력적이었다.
“별이 너무 적어. 나는 은하수를 보고 싶어, 은하수.”
그녀는 갑판에 누워 웃더니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렸다.
오늘 별이 적지는 않았지만, ‘은하수’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건 여름까지 기다려야 볼 수 있었다.
“정말 좋다…….”
그녀는 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감정은 관성루에서 팔괘대 가장자리에 서서 밤의 천체 현상을 관찰하다 귓바퀴를 움직였다.
몇 초 후, 진법 문양이 밝아지면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백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침착하게 무어라 읊었다.
“손에 밝은 달을 움켜쥐고…….”
그가 반쯤 얘기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목구멍이 틀어막힌 듯 어떻게 해도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 양천환은 자신이 다시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 얌전히 물었다.
“스승님, 저를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를 등지고 있는 감정이 흰 수염을 날리며 말했다.
“운주에 가서 보거라…….”
감정은 비밀을 소리에 담아 전했다.
사제 둘이 서로를 등졌다. 그 상태로 양천환이 떠보았다.
“몰래 갑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또 당부하실 말이 있으신지요?”
“구주에 숨은 고수는 뛰는 놈 위의 나는 놈 천지니, 밖에 나가서는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말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하지 말거라.”
“스승님,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 법. 그 말은 아무 데서나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얻어맞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 * *
이른 아침, 임안공주는 잠에서 깼을 때 온몸이 따뜻했다. 그녀는 편안하게 허리를 폈다가 발가락으로 ‘콰당’하고 책상다리를 쳤다.
그녀는 망연히 흐리멍덩한 눈을 뜬 채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때는 태양이 아직 뜨지 않았다.
임안공주는 밤새 숙취에 찌든 것 같았다. 눈빛은 망연함에서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왜 눈앞에 보이는 것이 비단이 수놓아진 침상 발이 아니라 동이 튼 하늘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소 천진난만한 ‘끙’ 소리와 함께 작게 신음했다.
이내 어젯밤의 장면이 주마등처럼 그녀 머릿속에 스쳤다. 그녀는 밤에 허칠안과 못에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여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단칼에 동라의 제안을 승낙했을 터였다. 그리고 임안공주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공주이니, 이렇게 과감한 행동이 소문나면 하루아침에 명예가 떨어지기에 충분했다.
그 다음에 그녀는 아마 술을 좀 마셔서 더욱 경계심이 풀렸을 터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갑판에 누웠을 것이다.
임안이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온통 취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취후불지천재수, 만선청몽압성하’의 정서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홀린 듯 취한 듯 넋을 잃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기 싫기도 하여 술기운을 빌어 깊이 잠들었다.
아주 포근했다. 엄동설한의 겨울에 배에서 잠들었지만, 그녀는 춥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어머니 몸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포근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걸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임안이 당황해서 몸을 일으켜 앉으니 몸 위에는 비단 이불이 덮여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들어 올리고 싶었으나 멈추었다. 대신 그녀는 긴장한 채로 이불 안에서 자신의 몸을 더듬어 옷을 다 입고 있는지 확인했다. 몸에 이상한 반응도 없었다.
임안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연못가를 지키는 궁녀들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단정한 임안공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연못가에서 지키고 있는 시위를 불러 오봉선에 뛰어올라 연안까지 노를 젓게 시켰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허 대인은 언제 갔더냐?”
“날이 밝기 전에 가셨습니다.”
궁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안은 좀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제의 그 따뜻한 느낌이 떠올라 자세히 비교해 보았다. 그런 뒤 이내 그녀는 이불 때문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어제 그가 법도에 벗어난 행위를 했느냐?”
“네.”
밤새 한숨도 못 자서 다크서클이 내려온 궁녀가 이때를 틈타 고자질하였다.
“그가 공주마마를 모욕하였나이다.”
“어?”
임안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줄곧 공주마마의 손을 꼭 잡고 있었어요.”
궁녀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떠나기 전에 노비에게 공주마마께 말하지 말라고 위협했어요.”
‘이렇게까지 과하게 굴었다고?’
임안은 버들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사람을 잘못 봤다는 창피함과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공주마마…….”
시위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
“어찌 우물쭈물하는 것이냐.”
임안이 불쾌한 듯 그를 쳐다봤다.
“날씨가 무척 추웠습니다. 공주마마께서 배에서 주무시려면 이불 하나만으로는 맹추위를 막아낼 수 없지요.”
시위가 설명했다.
“소직이 어젯밤에 똑똑히 봤습니다. 허 대인이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공주마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던 이유는 기기를 전달해 추위를 몰아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기기를 전달하고…… 밤새 잠을 자지 않았다고…….’
임안은 어리둥절하다가 자신이 어젯밤에 확실히 편안하게 잤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의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본 공주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냐? 본 공주에게 기기를 전달한 사람도 없었다.”
“그건…….”
시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밤새 쉬지 않고 기기를 전달하면 정력이 소모되는데 누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중품 무사나 고품 무사가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게다가 공주마마께서는 생활이 풍족하시니 그럴 필요가 없지요.”
임안은 입술을 깨물고 시위를 떠봤다.
“얼마나 힘든데?”
시위가 대답했다.
“소직이라면 진작 기력이 다하여 죽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촉촉한 도화안이 순식간에 출렁이더니 부드러워졌다.
“허, 허대인이 떠날 때 마치…… 지친 얼굴이었습니다.”
궁녀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노비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임안은 그 문제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갑자기 밖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가 오늘 아침에 경성을 떠나 운주에 간다고 했어. 지금 몇 시야? 본 공주가 그를 배웅하러 가야겠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에 영문을 모르는 물결이 이는 듯했다. 그녀는 그 후레자식이 매우 보고 싶었다.
“전하, 이미 묘시가 지났습니다…….”
궁녀가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
“게다가 일개 동라를 배웅하는 공주마마가 어딨습니까! 소문나면 공주마마께도 그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제멋대로인 임안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는 기껏해야 아바마마께 한 차례 욕먹으면 되지만…… 만약 일이 나의 명예와 정절과 관련된다면 일개 동라는 분명 배척당하겠지…….’
임안이 궁녀와 시위를 힐끗 쳐다봤다. 동글반반한 미인의 얼굴에 보기 드문 황실 자제의 위엄이 드러났다.
“본 공주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니 어젯밤의 일은 밖에 퍼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전부를 때려죽일 것이야.”
“네.”
* * *
경성에서 운주까지는 여정이 길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운주로 향하는 흠차(*황제를 대리하여 파견된 관리) 대오는 육로를 버리고 수로를 선택했다.
관선(官船)이 파도를 헤치며 나아갔고, 돛이 세차게 펄럭였다.
허칠안은 갑판 위에 서서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크고 작은 배들이 강을 항해했는데, 관선도 상선(商船)도 있었다.
“자네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과로했나 보구먼.”
강율중이 갑판으로 와 그와 나란히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허칠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제 교방사에 갔나?”
“……음.”
허칠안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가 교방사에 간 것도 부향과 이별 전 교류를 가진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피곤한 이유는 임안공주에게 정력을 빼앗겨서였다. 이런 일은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자네 보게, 아직은 아주 젊고 시야가 좁아.”
강율중이 두 손으로 난간을 받치고 노련한 기사처럼 미소를 지었다.
“운주에도 교방사가 있네. 강남(양자강 하류 이남 지역) 여인은 몸이 유연하고 목소리가 부드러워 경성의 여인들과는 그 자태가 다르지. 나중에 자네를 데리고 체험하러 가야겠군.”
“다릅니다.”
허칠안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사랑에 빠졌나?”
강율중이 의아하게 여겼다.
‘이게 사랑에 빠진 일신년 무슨 상관이야, 무임승차랑 관련 있지…….’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강 금라께서 한턱내신다면요.”
“뭐라고?”
강율중이 어리둥절했다.
“강 금라께서 한턱내면 같다고 칠게요.”
허칠안의 표정은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