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카나리아 공주
“둘째 공주마마, 그러실 필요가 뭐가 있나요. 소직은 한낱 야경꾼일 뿐인데.”
허칠안은 속으로 우리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너만큼 재미있지 않아. 다들 나랑 얘기할 때 안절부절못하거든.”
임안이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발가락을 흔들었다.
“나는 책 읽기를 싫어하고 거문고, 바둑, 글, 그림 다 못해. 황궁에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야. 어릴 때는 태자 오라버니가 나를 데리고 놀았지만, 지금은 내가 찾아가면 눈살을 찌푸리면서 항상 일이 있다고만 해.”
‘카나리아처럼 화려한 새장에 살고 있는 정말 가엾은 공주다……. 하지만 회경공주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지 않나……?’
허칠안은 생각해 보다가 곧 납득하였다.
회경은 병사와 군마를 주면 스스로 천하를 누릴 수 있는 여장부였다. 그녀는 서책을 두루 읽어 학식이 풍부하고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원경제의 모든 자녀 중에 회경공주의 재능과 역량에 비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임안은 달랐다. 그녀는 포악하며 제멋대로인 공주로 꾀를 부릴 줄 몰라, 본성이 흉악하면서도 길들이기 어려운 자에게 속기 쉬웠다.
허칠안은 주체적으로 ‘본성이 흉악하고 길들이기 어려운 자’ 명단에서 자신을 뺐다.
“그건 사실 간단해요. 공주마마께서 본인의 저택으로 이사 가셔서 머무시면 돼요. 황성이 궁성보다 재미있으니까요.”
허칠안이 말했다.
임안은 봉호가 있는 공주였기에 황성에 자신의 저택이 있었다.
“그럼 네가 내일 임안부로 나를 만나러 오너라.”
임안공주가 말했다.
* * *
임안공주는 점심 식사 전에 맞춰 가마를 타고 경수궁에 도착했다. 진 귀비가 오늘 경수궁에 식사 자리를 마련하여, 사람을 보내 아들딸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태자는 진 귀비가 정성껏 차려 준 음식을 먹으며 갑자기 물었다.
“궁 안의 하급 관리들이 수다 떠는 걸 들었는데 위연이 황후마마께 특제 비법을 보내 황후의 식욕 부진을 고쳤다고 합니다.”
진 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 뭐라고 하더라…… 치킨스톡? 듣자 하니 요리할 때 소량만 넣어도 잊을 수 없는 맛이 된다고 하더구나.”
태자가 진 귀비의 갈망을 눈치채곤 말했다.
“어마마마도 드셔 보고 싶으시면 제가 황후마마께 가서 좀 얻어 보겠습니다.”
진 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회경이 가서 달라고 했는데도 황후마마께서 내어 주지 않으셨다고 하더구나.”
모자(母子) 둘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임안공주가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보며 사실 확인을 했다.
“치킨스톡이라고 한다고요?”
태자가 그녀를 보더니 물었다.
“너도 들어봤느냐?”
임안은 생각 없는 사람이라 내궁의 소식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허칠안이 제게 뭘 줬는데 치킨스톡이라고 했어요.”
그녀가 여종을 불러 말했다.
“궁에 가서 가져 오거라.”
* * *
일각 뒤, 여종이 저택에 두고 온 도자기 병을 가지고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태자는 도자기 병을 낚아채 나무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았다. 약간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는데 그냥 맡기만 했을 땐 별다른 점이 엿보이지 않았다.
“주방에 가서 이걸 음식에 넣고 다시 데우라고 하거라. 이 치킨스톡을…… 저희도 맛을 볼까요?”
태자의 제안에 어머니와 여동생이 찬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녀가 다 데운 요리를 받치고 돌아왔다. 모자 셋은 젓가락을 드는 대신 궁녀를 쳐다봤다.
궁녀가 먼저 은침으로 독이 있는지 시식한 후,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모든 음식을 하나하나 다 먹어보았다. 태자는 더 먹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도 더 먹을 수는 없었고, 그녀가 아쉬운 마음에 음식을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기다린 후, 궁녀가 별 탈이 없자 태자가 재촉하며 말했다.
“본 태자에게 자라탕 한 그릇을 떠서 주거라.”
궁녀는 탕을 뜨면서 웃고는 말했다.
“전하, 안목이 훌륭하십니다. 이 탕의 맛은 잊기 어렵지요.”
태자는 음식을 지체 없이 받아서 한 입 먹어본 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맛이 다르다……. 어마마마, 임안, 얼른 드셔 보세요. 빨리 드셔 보세요.”
진 귀비는 오랜만에 마음을 연 태자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임안은 벌써 손을 댔다. 그녀는 자라탕을 먹지 않고 채소 요리를 집어 음미했고, 자기도 모르게 두 번째, 세 번째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진 귀비는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아들딸이 이렇게 즐겁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덕에 마음이 아주 흐뭇했다.
“좋은 물건이구나. 작은 병일 뿐인데……. 어선방(御膳房)의 요리사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인가.”
태자는 개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병을 소맷부리에 넣었다.
임안공주는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어 태자의 옷깃을 한사코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버들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제 거예요!”
“허칠안은 네 사람이 아니더냐? 그를 찾아가 달라고 하면 될 것 아니냐.”
태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손 놓거라.”
“손 안 놓을 거예요. 이건 제 거예요.”
남매는 옥신각신하다가 진 귀비에게 시비를 가려 달라 청했다. 그러자 진 귀비는 화가 나면서도 우스워 말했다.
“몇 살인데 아직도 아이처럼 그러니. 내가 보기엔 이곳에 두는 게 공평한 것 같구나.”
“…….”
태자와 임안은 고개를 돌리고 계속해서 우겼다.
* * *
“허칠안이 내게 준 물건이 알고 보니 이렇게 귀중한 거였다니.”
임안은 가마에 앉아 삼분의 일밖에 남지 않은 치킨스톡 병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허칠안을 향한 그 약간의 불만이 점차 깨끗하게 사라지는 듯했다. 허칠안이 그녀를 바보 취급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바보는 아니었다. 임안공주는 허칠안이 자신에게 빈대 붙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아 줄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이 동라는 돌아서서 회경의 손에 안착할 게 뻔했다. 게다가 그는 듣기 좋게 말하면서도 놀 줄 아는 사람이라 이대로 내치기에는 임안이 너무 아쉬웠다. 쓸모없는 서화와 은전은 내어 주면 그만이었다.
‘이 동라는 앞뒤가 다르고 아주 교활해서 확인을 좀 해야겠어…….’
임안이 즉시 말했다.
“돌아서 회경에게 가자.”
* * *
이내 임안은 회경공주의 궁원에 도착했다. 임안은 시위대의 차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임안이 새하얀 턱을 치켜드니 바깥 대청에 있는 얄미운 회경이 보였다.
미모가 출중한 두 공주는 제각기 빛났다. 회경은 새하얀 얼굴의 정교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왔니?”
“듣자 하니 위연이 황후마마께 특제 비법을 보내어 마마의 거식증을 해결했다는 소문이 궁 안에 쫙 퍼졌더라고요.”
임안이 박고가(博古架) 옆으로 걸어와 붉은색 치마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푸른 꽃병을 만지작거리며 내키는 대로 말했다.
“회경 언니한테도 있어요?”
“없어.”
회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없어요?”
임안이 순간 고개를 돌리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어여쁜 달걀형 얼굴로 ‘준준욕동(*蠢蠢欲動: 악인이 나쁜 일을 하다)’ 네 글자를 썼다.
회경공주가 그녀를 주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너를 속여서 뭐하겠니?”
“언니가 없으면 안심할게요.”
임안은 도자기 병을 꺼내더니 기뻐하며 흔들었다. 그녀는 하하하 크게 웃었다.
“저는 있거든요!”
“…….”
그녀는 회경의 표정이 이상함을 눈치채자 더 신이 났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얻어맞지 않으려고 회경의 표정을 보자마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잘난 체하면서 가 버렸다.
“본 공주는 갑니다, 나오지 마세요. 아, 맞다. 이건 허칠안이 본 공주에게 준 거예요.”
‘허칠안…….’
회경공주의 반들반들한 이마에 핏줄이 섰다.
* * *
둘째 날, 기루 3인조는 기루에서 점심밥을 먹은 다음 이를 쑤시며 육친도 몰라볼 걸음을 내디뎌 관아로 돌아왔다.
정오에 반 시진 간의 휴식 시간이 있었기에, 세 사람은 관아로 돌아와 토납할 계획이었다. 오늘은 허칠안이 한턱내는 날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순수하게 음악을 듣고 밥만 먹었다. 다른 건 하지 않았다. 무사도 그렇게 여유 자금이 많지는 않았다.
송정풍은 허칠안에게 며칠 동안 무임승차를 한 일이 조금 미안했는지, 노점에서 파는 귤을 보고 말했다.
“자네 둘 여기서 기다리게. 내가 귤 몇 개 사오겠네.”
“꺼지게. 이 몸이 가서 살 테니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허칠안이 그를 붙잡았다.
“칠안, 천만에. 괜찮네.”
송정풍이 사겠다고 버텼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귤만큼은 꼭 내가 사야 하네. 자네가 굳이 사겠다면 다음번에는 자네가 한턱내게.”
허칠안이 화를 내며 말했다.
송정풍은 과연 멈췄다.
* * *
허칠안은 관아에 돌아가자 또 위연의 부름을 받았다.
‘위 아빠는 점점 더 나를 사랑하나 봐…….’
그는 기뻐하며 호기루로 달려갔고, 시위대에게 알린 뒤 다실에서 청포를 입은 위연을 만났다.
대환관은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자태가 훤칠하면서도 의젓했다. 그는 찻잔을 받쳐 들고 마시면서 반대편 자리를 가리켰다.
“자네가 차를 따르게.”
허칠안은 술을 잔뜩 마신 터라 차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한 잔 따라서 위연을 모시는 셈 쳤다.
“근무 설 때는 술을 마시면 안 돼.”
위연이 훈계했다.
“자네는 좀 정의로운 것 빼고 다른 건 전부 몹쓸 버릇이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내뱉고, 규율을 어기고, 교방사에 빈번하게 출입하고 말이야. 내가 만약 자네의 정적이었다면, 자네는 이미 환생하러 갔어야 하네.”
“……소직도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허칠안은 자신을 동생, 아니 아들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나아졌다.
“됐네, 강산은 변해도 본성은 바뀌기 어렵지. 한 사람이 이렇게 쉽게 바뀐다면 세상에 수천수만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겠지.”
위연은 늘 부하의 잘못을 잘 감싸주는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그도 정말로 허칠안을 추궁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가 급히 차 한 모금을 들이붓더니 권종을 한 권 내밀었다.
“자네 운주에 다녀와야겠어.”
‘운주?’
허칠안은 표정을 바로잡고, 권종을 펼쳐 훑어보았다.
“며칠 전, 야경꾼의 첩자가 밀서 한 통을 전달해 왔네. 밀서에는 운주의 도지휘사(都指揮使) 양천남(楊川南)이 은밀히 산적과 결탁해 군수 물자를 수송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화근을 만들어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고 있다고 적혀 있네.”
위연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말했다.
“밀서를 받은 둘째 날, 제당이 부랴부랴 손을 써서 ‘횡령 사건’을 만들었고 금라, 은라들을 말로 삼아 타협하라고 나를 핍박하였네.”
‘운주 도지휘사가 제당 사람이라고? 어쩐지 멀쩡한 제당이 왜 야경꾼을 치기로 결심한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배후에 이런 내막이 숨어 있었군. 만약 내 개똥 같은 행운이 없었다면 위연은 금라와 은라 천 명을 운주 도지휘사와 맞바꾸려 했던 건가? 위연도 참 모질다…….
맞다, 이호가 말한 적이 있지. 운주 비적의 난을 없애기 어려운 이유가 산적들이 땅의 형세를 다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했어. 거기에 모두가 군수 물자를 갖추고 있다면 예사로운 산적이 아니다. 이렇기에 배후에 누군가 지지하는 자가 있다는 말. 제당은 경성이 근거지라 분명 원격 조종을 할 수는 없을 것이고, 현지 고위 관리의 협조가 있어야 하겠지…….’
허칠안은 문득 모든 전말을 깨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