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대사건
저채미가 말했다.
“여귀의 음기가 너무 세서 공정(共情)하려면 음기를 감당할 수 있는 몸이 필요한데 여인의 몸에는 좋지 않으니 네가 해. 무사는 혈기가 왕성하니 후유증이 없을 거야.”
“좋습니다!”
저채미가 풍수반을 떼어 입술로 여닫았다. 그러자 태극어가 서서히 회전하면서 옅은 검은 안개가 튕겨 나와 풍수반 표면 3촌(寸)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검은 안개는 쉬지 않고 도망치려 발버둥 쳤지만 풍수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안개는 매번 청광에 의해 벽에 튕겨 태극어 위쪽으로 돌아왔다.
저채미가 손가락을 구부려 가볍게 튕겼다.
“가라!”
검은 안개가 허칠안의 미간 사이로 돌진하여 들어갔다.
허칠안은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한기가 등에서부터 올라왔다. 이내 원한과 광기,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념이 감지됐다.
광분한 사념은 그의 원신과 충돌했고, 신체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다 별안간 여귀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잠잠해졌다……. 아니, 그녀는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이에 허칠안은 원혼을 억누르려던 생각을 접고 여귀의 의식을 찬찬히 감지했다.
‘그녀가 신수 승려의 존재를 감지했나…… 승려는 깊이 잠들어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여귀를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이 원혼을 감쌌고 두 사람은 공정(共情)에 성공했다. 이내 낯선 장면들이 떠올랐는데 마치 영화를 상영하는 듯했다.
* * *
여자는 본래 태강현 부호의 딸로 아리따운 외모 덕에 청혼하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녀는 일반적인 인생의 궤도에 따라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 평온한 나날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번의 외출로 인생이 바뀌었다. 으슥한 골목에서 인신매매 상인이 그녀를 생포하여 경성의 한 대저택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저택에는 그녀와 같은 여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들은 같은 일을 했다. 그건 바로 매일 밤 저택을 드나드는 손님들과 잠자리를 가지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바치는 장난감과도 같았다.
그들은 서로를 ‘대인’이라 칭했는데 누가 봐도 벼슬아치였다. 관포를 벗은 대인들은 짐승보다도 더 짐승같이 저택의 여인들을 함부로 다뤘다.
여귀는 아주 많은 대인의 시중을 들었다. 그녀의 마음은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찼지만 죽음이 두려워 치욕을 참고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
이렇게 몇 해가 흘렀고 그녀는 한 손님의 눈에 들어 그만의 연인이 되었다. 그 뒤에는 상황이 나아졌다.
탐라하(塔姆拉哈)라고 하는 그 손님은 건장한 보통 체격으로 크고 둥근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남자였다.
그녀가 죽은 건 어느 날 우연히 탐라하와 어느 거물 사이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화 중에 ‘운주’, ‘화포’, ‘무기’ 등의 단어가 언급됐다.
대저택의 뒷마당에는 화생정(化生井)이 하나 있었다. 그 우물 안에는 자결하거나 손님에게 학대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많이 묻혀 있었다. 여인들은 죽임을 당한 후 그 우물 안에 버려졌다.
그녀는 죽은 후에 악귀가 되어 우물에 갇혔으며, 인연이 흘러가는 대로 우물 바닥의 암류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
그녀는 암류에 넘쳐흐르는 원기로 자양(滋養)하여 지금까지도 소멸하지 않고 영혼을 보존할 수 있었다.
허칠안은 이 기억의 파편에서 익숙한 얼굴을 많이 봤다. 특히 그는 여자가 죽기 전날 밤, 그녀의 시선을 통해 탐라하와 대화를 나눈 거물을 보았다.
‘제당 공부상서!’
* * *
“후…….”
허칠안은 눈을 뜨고 가슴속의 울분을 토했다.
이 공정(共情)은 정말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공정을 하는 사람은 여자 귀신의 원망, 고통, 절망 등 감정에도 영향을 받는다.
다행히 그는 매일 관상을 유지하고, 원신을 연마하여 의지력이 크게 향상됐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의외로 수확이 있는 것 같네…….”
저채미가 그를 바라보았다. 공정하는 사이에 그녀는 허칠안의 표정이 반복해서 일그러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때로는 사나웠고, 때로는 고통스러웠으며, 때로는 슬프고 분해 보였다.
물론 이는 그가 아니라 그 여자에게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저채미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내력이길래 한 여인이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것일까.
저채미는 손끝을 허칠안의 미간에 댄 채 여귀를 끌어냈고, 풍수반에 다시 봉인했다.
‘보아하니 그 탐라하는 중원 인사 같은데……. 서역 인종은 오뚝한 코에 눈가가 깊은 것이 특징이고, 남강 오랑캐는 푸른 눈이 특징이다. 북방 사람은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상고 시대의 기이한 짐승의 혈통을 물려받아 외형이 다소 비인간적이다…….
탐라하는 무신교 통치 지역의 인종 특징과 더 닮았다. 하지만 무신교가 어떻게 운주와 관련된 거지? 운주는 대봉의 동남쪽에 있다. 단순히 한두 마디 말뿐이지만, 공부는 줄곧 외부에서 무신교나 운주에 선진 무기를 운송한 것 같아. 이 일은 적과 내통하고 매국 행위를 한 격이다. 즉시 위연에게 보고해야 해…….’
허칠안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채미에게 사건을 짧게 간추려 말했다.
저채미는 다 듣더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생전에 갖은 고생을 다 겪고 죽은 후에 원한이 풀리지 않는다 해도 꼭 악귀가 되진 않아. 하지만 만약 그 수가 쌓이면 원기가 충천할 것이고 만약 내성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야경꾼이 진즉에 발견했겠지.”
“이 일은 조금 뒤에 다시 얘기합시다……. 아, 맞다. 거울 돌려주시오.”
허칠안이 말했다.
그는 지금 곧 공을 세울 작정이었다. 소위 ‘뇌물수수와 범법’의 죄명은 두렵지 않았다. 당연히 이제 거울도 저채미에게 맡길 필요가 없었다.
농담이었다. 안에는 구백 냥이 넘는 황금이 있었다.
* * *
허칠안은 저채미를 데리고 야경꾼 관아로 향했다. 그는 가는 길에 근무를 서고 있는 동라 넷과 마주쳐 검문에 걸렸다.
“나 일세.”
허칠안이 요패를 들춰 보였다.
“허 대인?”
동급이라도 허칠안은 위연이 낳은 첫 번째 사내라서, 몇몇 동라들은 그를 소홀히 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째서 아직 바깥을 돌아다니십니까? 오늘 형부 부아와 대리사에서 군대를 파견해 관아에 들이닥쳐 많은 동료를 잡아갔습니다.”
한 동라가 말했다.
“명단에 대인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대인께서 관아에 계시지 않아 급습을 비끼신 겁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시는 건 아닐는지……”
그의 말뜻은 아주 뻔했다.
‘도망가지 않으실 거죠?’
“어떤 사람들을 잡아갔나?”
허칠안이 묻자 금라 넷 중에는 강율중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은라 중에는 상백 사건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이옥춘, 민산, 양봉 세 사람이 있었다.
‘강 금라는 그럭저럭 올바르게 처세하는 편이라 설령 횡령했다 해도 아주 작은 양일 텐데 어째서 체포되었지? 그와 내가 사이가 좋아서 주씨에게 보복당하는 것인가. 춘 형은 정말이지 가엽다. 돈을 횡령하지도 않았는데 감옥부터 들어가다니…….’
역시 주씨의 사사로운 복수에는 목표가 있었다. 주씨는 허칠안의 측근들만 골라서 야경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위 공께서 틀림없이 그들을 구할 것이다! 이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 우리를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에휴, 말도 마세요. 사실 요 몇 년간 모두 깨끗하지 않았어요…….”
“쳇, 이 은라는 깨끗하지. 다른 이유로 들어간 거야.”
무능한 동라 셋이 격분하여 허칠안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서 친히 조사하라며 명령하셨다고 하니 위 공께서도 해결하기 어려우실 듯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늘 관아의 분위기가 유달리 긴장감이 감돌고 침울했습니다.”
허칠안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방법이 있을 걸세.”
동라 셋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관적으로 탄식했고, 곧 순찰하러 떠났다.
* * *
허칠안은 관아로 돌아오는 길에 호기루로 직행했는데 건물 밑에서 수위에게 가로막혔다.
“위 공께서는 이미 쉬고 계셔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이는 규칙입니다.”
수위는 허칠안을 알아봤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 깊었고, 위연은 이 시간에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얼른 가서 알리시게.”
허칠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허 대인께서는 내일 다시 오십시오.”
수위가 꿋꿋하게 답했다.
허칠안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수위를 내리치고 패도를 차 버렸다. 그런 뒤 그는 한 대 한 대 따귀를 때리며 외쳤다.
“알릴 것이냐 말 것이냐, 알릴 것이냐 말 것이냐…….”
곁에 있던 수위가 놀라서 얼어붙었다. 그는 허칠안을 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때, 때리지 마십시오…….”
바닥에 쓰러진 수위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계속해서 우는소리를 냈다.
“왜 소직을 곤란하게 하십니까. 조금 뒤에 위 공께서 죄를 물으러 내려오실 겁니다.”
허칠안은 위연의 오른팔이라, 그는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가 호기루에 강제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수위가 얼굴을 붉힐 일도 없을 터였다.
“이해하네. 모두 고충이 있지.”
허칠안은 귀싸대기를 때려 상대방의 고집을 꺾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듯 손을 거둔 다음 돈주머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냈다.
“이 속된 황백색 물건이면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겠지? 안 되겠으면 사람을 바꾸겠네.”
“됩니다, 되고 말고요.”
수위가 은자를 받았다. 그는 패도를 주워 쏜살같이 호기루로 들어갔다.
* * *
10분쯤 흐른 뒤 7층에 촛불이 켜졌다. 그러자 금세 수위가 내려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 공께서 올라오라 하십니다. 이 소저는…….”
“사천감의 술사네. 내 사람이야.”
허칠안이 저채미를 데리고 호기루로 들어갔다.
* * *
낮에는 하급 관리가 근무를 서서 건물 안은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그곳도 쥐 죽은 듯 적막하여 음침함이 감돌았다.
‘위연은 일 년 내내 건물 안에서 사는데도 적막함이 싫지 않은가?’
허칠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7층 다실에 이르렀다. 불을 때지 않아 실내는 따뜻하지 않았고, 건물 안에는 시중을 드는 하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위연은 청포(靑袍)를 걸치고,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탁자 가장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었다.
위연은 허칠안이 올라오자 내심 편안해하며 그에게 일을 시켰다.
“불을 때고 물을 끓인 다음 다른 초에도 불을 붙이거라.”
‘좀 추운가 보군. 하, 위연이 용의주도하긴 하지만 무예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것 같아……. 하하, 하늘은 공평한 법이지.’
허칠안은 시키는 대로 초마다 불을 붙여 널찍한 다실을 환하게 비췄다. 그런 뒤 그는 숯불을 위연 옆에 두고 구리 주전자를 얹었다.
“오늘 천유에게 자네더러 숨어 있으라고 통지하라 일렀는데, 관아를 샅샅이 둘러봐도 자네를 찾지 못했지. 허부에 가서 물으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군. 교방사에 가서 물었더니 그곳에 없다고 했고. 이렇게 늦게 나를 찾아온 건 횡령 사건 때문이 아니겠지.”
위연이 웃은 다음, 저채미를 보며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 동라는 채미 소저가 사모하는 자인가?”
저채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성에 별반 관심이 없어서 잠깐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찻상과 탁자를 번갈아 가며 훑어봤지만, 먹을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아주 재미없어 보였다.
“위 공, 제가 대사건을 발견했습니다.”
허칠안은 양반다리를 하고 위연과 마주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