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여군신(女軍神)
허칠안은 호기루에서 나온 뒤 춘풍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송정풍과 주광효 그리고 이옥춘에게 알렸다.
송정풍과 주광효의 표정이 갑자기 경직됐다. 송정풍은 칼로 탁자를 내리치고 욕설을 내뱉더니, 춘풍당 안에서 원을 그리며 조급하게 걸어 다녔다. 주광효는 원한이 더욱 깊어졌으며,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옥춘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평양군주 사건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네. 상백 사건을 확실히 밝혀내기가 어려워졌어. 자네가 감정에게 청하지 않는 이상 사천감의 망기술로 4품 이상의 관리를 고발할 수도 없고 말일세.”
‘감정을 찾아갈까? 감정이 도우길 원할지 아닐지는 둘째치고, 설령 원한다 해도 원경제가 믿으려 할까?’
허칠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 늙다리를 찾아갈 일은 없어.’
* * *
“채미 누님, 제가 감정을 봬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저를 팔괘대에 데려가 주실 방법 없나요?”
허칠안은 관성루에서 손에는 크고 작은 보따리의 먹을거리를 든 채, 전생의 아부쟁이와 꼭 닮은 미소를 지었다.
저채미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허칠안이 제물로 바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안 돼. 스승님께서 문을 닫고 계셔. 이미 팔괘대의 통로도 금해서 아무도 올라가지 못해.”
“방법이 없나요?”
“없어.”
“우리 스승님께선 언제 나오시나요?”
저채미는 그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우리 스승님이야?’
그녀는 말했다.
“길게는 수개월, 짧게는 보름 정도. 팔괘대에서 성상(*星象: 별자리의 모양)을 관측하고 계신 것 같아.”
……허칠안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게 바로 인과응보다. 종일 먹튀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한테 먹튀를 당하는 날도 오는구나. 안 돼, 이렇게 손해를 볼 수는 없어…….’
그는 은자 두 냥으로 산 먹을거리를 전부 탁자 위에 올려 둔 다음 말했다.
“집에 있는 여동생이 월경을 시작해서 복통을 참기 어려워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채미는 이 말을 듣더니 허리를 비틀고 쿵쾅거리며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잠시 뒤에 도자기 병 하나를 갖고 돌아왔다.
“아플 때 한 알 먹으면 즉시 효과가 나타날 거야.”
이 소저는 식탐이 많기는 하지만, 아주 손이 크다. 단약이 비싸든 비싸지 않든 아낌없이 다른 이에게 주니 말이다.
* * *
운주의 아득히 펼쳐진 산맥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촌락이 산을 끼고 있었으며, 끝없이 달린 등불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장식했다.
난공불락의 촌락에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맨 처음에 촌락을 형성했을 때 관아에서는 병사를 파견해 토벌하려 했으나, 몇 번 실패하자 그들도 눈감기로 했다.
운주에서는 비적의 난이 심각했다. 민가를 습격하여 약탈하는 유적(*流賊: 떠돌이 도둑)과 산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백성들은 빈곤에 시달린 지 오래였으며, 관아에서도 수십 년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르니 다들 이런 생활에도 점점 익숙해졌다. 혼돈 지역에는 혼돈 지역만의 살아가는 방법이 생기는 법이었다.
막 밤이 되었다. 매서운 산바람이 쉴 새 없이 불더니, 삽시간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루 위에서는 보초를 서는 산적이 빗겨 들어오는 차디찬 빗방울을 견디며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촌락을 바라봤다.
오늘 촌락에서는 또 한 건 크게 하여, 상대(*商隊: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 한 무리, 비단, 찻잎, 자기를 약탈해서 돌아왔다……. 귀중품도 적지 않았다.
새로 온 육당가(六當家)는 이 촌락에 전적으로 의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예가 출중하고, 협공술에 정통하며, 군사 훈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듣자 하니 그들은 군대 출신으로 예전에 대봉 경성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둔하고 부패한 조정이 못마땅하여, 산속으로 들어와 산적패가 되길 택했다고 한다.
* * *
이때 촌락에서는 축하연이 열렸다.
당가(當家) 여섯과 몇몇 작은 우두머리들은 숯불이 활활 타오르는 실내에서 진탕 마시느라 바빴다. 그들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그릇을 추켜들었다.
옷을 반쯤 벗은 여자들이 억지로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녀들은 모두 끌려온 여인들로 평범한 백성의 딸도 있었고, 심지어 부호의 딸도 있었다.
당가와 작은 우두머리들을 용모가 괜찮은 여인을 골라내어 자신들을 시중들게 했고, 용모가 평범한 여인은 촌락의 다른 형제들이 누리게 했다.
주적웅은 탁자 앞에 앉아 습관적으로 등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기백이 흐르는 모습이 여색을 좋아하는 산적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곁에도 아주 아리따운 여인이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주적웅은 그녀를 쳐다보기도 귀찮았다.
그는 여자라면, 정말이지 한 번 손댈 의향조차도 들지 않았다.
주적웅은 일가족을 이끌고 운주에 왔다. 아내와 아들은 촌락에 있지 않았고, 운주에서 가장 큰 백제성(*白帝城: 공손술이 구축한 성으로 공손술의 호가 백제이므로 그 성을 백제성이라 칭함)에 살고 있다.
그곳은 운주에서 얼마 안 되는 낙토(樂土)로 비적과 도적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대당가(大當家)는 얼굴이 온통 구레나룻이라 거칠고 난폭해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세심한 연신경 전봉 고수였다.
“주 아우님, 여기 여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소?”
대당가는 주적웅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상대 무리에 꽃처럼 아리따운 여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뭇간에 갇혀 있다지?”
“그렇습니다, 대당가. 그 계집, 몹시 예쁘던데요.”
“대당가, 촌락의 여인과 그녀를 비교하자면, 정말이지…… 진흙과 백설탕 차이 정도입니다.”
주적웅은 머릿속에 그 여인의 빼어난 미모가 떠오르자 가슴이 불처럼 뜨거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납치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외모가 어떠한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만일 처음 온 게 아니라면, 지금쯤 그 여자는 이미 그에게 겁탈당했을 터였다.
대당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봐라, 그 여인을 끌고 오너라. 오늘 밤에 육당가 마음대로 하게 두자꾸나. 그 여인은 그가 납치하였으니 응당 그가 먼저 경험해야 하지 않겠느냐.”
나머지 당가는 이견이 없었다. 누가 먼저 경험하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조만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이끌려 왔다. 겹겹이 층이 진 새하얀 긴 치마를 입은 그녀의 피부는 겨울의 눈보다 희었으며, 눈은 크고 빛났다.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였다.
그녀는 숲속의 가냘픈 사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이들이 그녀의 미색에 빠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안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제가 어느 나리를 섬기면 될까요?”
주적웅은 침을 삼켰다. 그는 상대가 탐스럽게 아름답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녀를 탁자로 끌어당겼다.
주적웅은 미인을 품에 안고 애타게 갈망해온 듯 만지며 물어뜯었다. 주위의 산적들은 이를 보더니 질투심과 더불어 그 대신 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나리가 주적웅인가요?”
돌연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내 이름을 알다니…….’
주적웅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욕망은 순식간에 사라져 없어졌다. 이때 그는 품 안의 미인이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생기를 잃어 가는 걸 보았다.
그녀는 삽시간에 사람 키만 한 종이 인형으로 변했다.
“깔깔깔깔…….”
실내에 메아리치는 여인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도록 했다.
쾅…… 창문으로 광풍이 불어와 방 안의 촛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칼을 빼 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대당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 요괴가 농간을 부리는 것이냐!”
여인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멈췄다. 하지만 몇 초 후 촌락의 모든 사람들은 처량하고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산속에 울려 퍼지고, 또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전설상의 귀신이다.”
주적웅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설상의 귀신, 또는 염귀(艶鬼)라고도 불린다. 전투력은 거의 없고, 미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데 능하며, 덫에 걸린 자의 영혼을 빨아들인다.
무사에게는 요괴와 맞서는 재능이 없다. 하지만 원기에 충격을 준다면, 모든 요괴를 막아낼 수는 있을 터였다. 주적웅이 진짜 신경 쓰는 존재는 염귀 배후의 주인이었다.
주적웅은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러 왔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바로 이때 북소리가 촌락 전체에 울려 펴졌고, 밖에서는 산적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습격했다, 적이 습격했다…….”
촌락의 당가와 작은 우두머리들은 무기를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폭우를 뚫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밖을 바라봤으나 밤의 장막, 비의 장막, 숲의 장막에 가려 시선이 차단됐다.
공중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고,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산적들이 화살에 맞아 땅에 쓰러지면서 비참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대당가는 화살을 이로 까며 속으로는 한시름 놓았다. 아래에서 위로 공격하면 화살의 힘은 결코 강하지 않다. 운이 너무 나빠 급소에 명중하지만 않는다면, 설령 화살에 맞았다 해도 전투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낙석과 동유(*桐油: 유동나무 씨에서 짜낸 기름)를 준비해라…….”
촌락은 지리적으로 우세하고, 낙석과 동유는 수비 법보였다. 그들은 촌락을 막 세웠을 때 이것들을 이용해 관아의 토벌에 맞서 가장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
대당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은빛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번개가 아니라 긴 창에서 내뿜는 날카로운 기(氣)였다.
우르릉 쾅쾅!
적시에 번개가 쳤다. 그러면서 밑에 있던 산적들은 은색 창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
그녀는 비늘 갑옷을 입고 뒤로는 진홍색 피풍을 걸치고 있었다. 투구는 쓰지 않았고, 허리까지 오는 묶은 긴 머리는 말총 같았다. 늠름하고 씩씩한 자태가 마치 위엄 있는 여군신 같았다.
여군신은 손으로 법결(法訣)을 그려 천둥을 불러왔다. ‘쾅!’하며 번개가 치자 그녀는 손을 뻗어 돌출부를 집더니 힘을 주어 내던졌다.
촌락 앞의 성루 두 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도문의 어뢰결(御雷訣)?’
주적웅은 찰나 오싹해졌다. 몸이 얼음 창고에 빠진 듯했다.
격렬한 천둥소리로 토벌 작전을 시작한 지 한 시진 만에 촌락이 무너졌다.
대당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범한 전투력의 군대를 관찰했다. 그들은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했으나, 어떠한 관아나 군대의 상징은 드러나지 않았다.
대오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들은 고작 4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약자가 한 명도 없어 가장 낮은 품계가 연정경이었다. 대당가는 그 사실에 깜짝 놀랐다.
연기경은 50여 명에 이르렀고, 연신경은 10여 명 남짓이었다. 동피철공경은 4명 있었다.
그리고 우두머리인 여군신의 경지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런 군대라면 작은 촌락에 맞서는 건 둘째치고, 운주에서 가장 큰 성인 백제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기에도 충분했다.
‘깃발도 없이 뛰어난 전투력에 여자를 필두로 하다니…….’
대당가는 마음이 가라앉는 한편, 운주에 떠도는 소문이 떠올랐다.
“당, 당신은…… 비연(飛燕) 협객?”
“무슨 비연 협객이냐, 못 들어주겠구나.”
손에 은색 창을 쥐고 있는 여군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주 아름다웠다. 정교한 이목구비, 불그스름한 입술, 오뚝한 코는 오관(五官)의 입체감을 부각시켰다. 다만 그 날카로운 기세가 그녀의 미모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