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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144화 (144/712)

144화. 이야기 (2)

봄빛이 완연한 오후, 그렇게 그들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가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만나 자연스레 서로를 알아갔다.

항혜가 좌선할 때면 여인은 곁에서 몰래 숨겨뒀던 규중(閨中) 금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턱을 괴고 가볍게 부채질하며, 집중하고 있는 항혜의 얼굴을 보며 멍을 때렸다.

또 가끔은 강아지풀로 그를 건드려 그가 좌선에 열중하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수려한 승려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화를 내며 말했다.

“계속 이러면 소승, 문을 닫겠소.”

그녀는 늘 혀끝을 날름거리며 성의 없이 사과하곤 했다.

그들은 때로 함께 산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백봉산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봄이 올 때면 온 산에 야생화가 찬란하게 피었고, 그 안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꽃이 아름다운 건지 사람이 더 아름다운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점차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청룡사 승려들 사이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두고 육근(*六根: 눈, 귀, 코, 혀, 몸, 뜻)을 아직 깨끗하게 하지 못하여 색계를 깬 음탕한 승려라 떠들었다.

주지 반수는 불타 조각상 앞에서 그에게 세 가지를 질문했다. 여전히 부처님을 향한 경건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그 여인에게 뜻이 있는지, 속세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는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전했다. 부처님에게 여전히 경건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여인에게 뜻이 없고, 속세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처럼 부처님을 모시길 원한다고.

이에 주지 스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그녀와 다시는 말하지 말 것.

어째서 더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그녀를 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지 항혜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주지 스님이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평양군주로 예왕의 적녀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항혜는 역시나 더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가오면 눈을 감고 좌선했으며, 그녀의 희롱과 짓궂은 장난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기대를 가득 안고 왔다가, 실망한 채 쓸쓸히 떠났다.

“스님, 이 꽃 예쁘지 않아요? 저와 참 잘 어울려요.”

“…….”

“스님, 제가 악기를 연주하여 들려드릴게요. 특별히 집에서 챙겨온 겁니다.”

“…….”

“스님, 저 어지럽고 몸이 안 좋은데 신경 안 쓰이시나요?”

“…….”

“스님, 굳이 자신을 고독 속으로 밀어 넣어야겠어요?”

“…….”

그러던 그녀가 드디어 발을 끊었다. 무려 한 달 동안 청룡사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삶에서 철저하게 물러났다.

‘더는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 계속해서 부처님을 모실 수 있겠어…….’

그는 한시름 놓았다. 자신의 진심에 부처님께서 감동하셨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녀가 또 찾아왔다. 넋을 잃은 모습에 앙상한 얼굴로, 무척 초췌해 보였다.

“스님, 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염주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의 예왕은 마침 중요한 시기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그는 병부상서에 임명되고, 훈귀의 지지하에 내각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훈귀 종실이 재상에 임명되는 사례는 본조에서 보기 드문 편은 아니었다. 육백 년 역사를 통틀어 훈귀의 신분으로 재상에 임명된 사람이 무려 5명이나 됐다.

날이 갈수록 세력이 약해지는 훈귀 집단에게 이 일은 무척 중요했다. 예왕의 부상(浮上)으로 그들은 희망을 보았고 그에게 빌붙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격렬하고 치열한 투쟁 속에 있던 예왕은 평양군주의 혼사를 정했다. 딸에게 따뜻한 안식처도 찾아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인을 맺어 더 많은 지지를 얻으려는 심산이기도 했다.

“스님, 저와 사사로이 도망치겠습니까?”

“……좋소.”

마침내 항혜는 승낙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속마음을 똑똑히 보았고, 진실한 자신을 마주기로 했다.

그들은 도피 행각을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평양군주가 출입할 때는 항상 호위병이 동행했다. 그녀가 반 시진 넘게 실종되면, 시위대가 산을 뒤질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식이 예친왕부에 흘러 들어갈 게 뻔했다.

따라서 도주에 성공하고 싶다면, 그들은 기운을 차단하여 사천감 술사의 수색을 따돌릴 수 있는 법기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위한 새로운 호적과 그들을 도와 경성 관내를 벗어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했다.

그리하여 평양군주는, 그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며 믿을 만한 친구를 찾아갔다.

* * *

“평원백 적자, 그 친구가 평원백 적자라고?”

허칠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항원의 이야기를 끊었다.

이로써 모든 얘기의 조각이 맞춰졌다. 평원백은 수하에 조작, 밀항에 능한 거간꾼 조직을 하나 거느리고 있었다. 설사 평양군주가 거간꾼 조직의 존재를 몰랐다고 해도 두 집은 왕래가 잦은 편이라 평원백부의 수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게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예왕이 일찍이 말한 적 있었다. 평양백이 문신과 서로 내통하여, 훈귀 집단과는 점점 멀어졌다고 말이다. 평원백은 평양을 음해할 동기가 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훗날 평원백 일가 전멸 사건이 발생한 것이군……. 이 사건에서 병부상서부만이 무슨 역할을 맡은 건지 모르겠네.’

허칠안은 육호 항원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당신은 그들이 거간꾼 조직과 접촉했다는 걸 알고, 그들이 속아서 납치됐다고 확신한 거야?’

모든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어서, 그는 차마 묻지 못했다.

몇몇 금라는 허칠안의 말을 듣고는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항원을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항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가 단순한 평양군주는 조정의 세력 다툼이 그렇게 복잡한지 전혀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악랄한지는 더욱이 몰랐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와 경서를 읽으며 염불하던 승려가 도피 행각을 벌이기로 한 그 순간부터, 비극적인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평원백과 훈귀 집단은 사이가 틀어진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그는 아들을 통해 이 일을 알게 된 후 즉시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때 당시 병부시랑이었던 장봉과 호부 도급사중 손명종(孫鳴鍾)과 상의하여 평양군주를 경성에서 내보내 예왕을 치자는 계략이었지요.”

“평양군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강율중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으나 항원은 못 들은 것 같았고, 그저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뱀과 같아서 그녀를 경성에서 내보낸 후 평원백 적자는 도급사중 손명종과 병부시랑 장봉 두 사람의 자제와 한패가 되어 도중에 평양군주를 범하려 했습니다.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한 사람은 죽임을 당했고, 다른 한 사람은 비녀를 삼켜 자결했습니다. 악행을 은폐하기 위해 그들은 항혜와 평양군주의 시체를 야산에 묻었고, 기운을 감추는 그 법기도 함께 묻었지요.

대외적으로는 평양군주가 아무런 이유 없이 실종됐다고만 알려져 있고, 청룡사를 조사해봐도 두 사람이 사사로이 도망쳤다고만 알고 있었죠. 그들이 일 년 전에 죽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평양군주가 죽었다니…….’

금라들은 소리 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엄숙한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평양군주는 예왕의 적녀이자 원경제의 친조카였다. 군주를 살해하는 건 삼대를 멸할 대죄였다.

남궁천유는 칼자루를 쥐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항혜는 이미 죽었는데, 왜 일 년 후에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까?”

이 역시 모두가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사람의 죽음은 등불과 같아, 한번 꺼지면 다시 살아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항원은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다.

“그는 일 년 전에 죽었습니다. 누군가 비법을 사용해 원신을 육신에 봉인하여 지각이 없는 산송장이 되었죠. 이 일 년 동안 그를 지탱한 건 복수심이었습니다. 평양군주의 피가 맺힌 깊은 원한에 대한 복수. 여러분이 믿지 못하겠으면 관아에 데려가 검시관에게 검사하게 하면 되겠지요.”

“누가 그를 구했습니까?”

금라 하나가 질문하자, 항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 금라는 양연 등과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물었다.

“평양군주의 시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가 모셔가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는 주위의 은라에게 분부했다.

“항혜의 시체를 관아로 이송하거라.”

금라 몇몇이 항원을 호송하여 작은 뜰을 떠났다. 그들은 그에게 말 한 필을 주었고 일행은 위풍당당하게 성을 나섰다.

허칠안은 마음이 무거워진 채로 말 등에 올라탔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항원은요? 항원이 육체를 지배당하거나 통제당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의 어깨에 엎드려있던 회색 고양이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항원의 말은 틀림없네. 허, 내가 비록 점을 볼 수는 없지만, 내게는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방법이 있네.”

“항혜는 정말 죽은 건가요?”

허칠안은 믿을 수 없어 재차 물었다.

“그의 생사는 사건의 핵심이 아니야.”

회색 고양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본래 꼭두각시일 뿐이다. 마수가 사라졌으니, 배후에 있는 자에게 그의 생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네. 자네는 기뻐해야 해. 생각보다 사건이 쉽게 풀렸잖나.”

“도저히 기뻐지지가 않습니다. 항혜와 평양군주 모두 가련해요.”

허칠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전혀 웃음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항혜 사건에 문제가 있습니다. 배후에 있는 자가 일부러 무대 앞으로 끌어낸 것처럼요.”

* * *

태강현과 장락현이 경계를 서는 어느 야산. 항원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그 과정은 비효율적이고 더뎠다. 그는 금라들에게 항혜가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줬다고 말했다. 평양군주는 세 사람이 함께 에워싼 오래된 홰나무 뿌리 쪽에 묻혀 있다고 했다.

금라와 은라는 항원을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를 중앙에 두고 빙 둘러싸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반 시진이 지난 후 그들은 그 오래된 홰나무를 찾아냈다. 세 명의 은라가 홰나무 밑의 관목과 잡초를 베고, 삽 대신 패도를 사용해 잠시 파내니 검은 흙 사이로 백골이 희미하게 보였다.

“대인, 찾았습니다.”

은라가 흥분하여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파내거라!”

남궁천유가 침착하게 말했다.

평양군주의 유골이 조금씩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 평양군주는 일 년 만에 드디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육신은 이미 부패하여 백골만 남은 채였다. 너덜너덜해진 헝겊이 착 달라붙어 있었는데, 아마 죽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인 것 같았다. 그리고 유골의 후두와 흉복(胸腹) 사이에서 어두운 빛깔의 금비녀도 발견했다.

항원이 말한 대로 그녀는 비녀를 삼켜 자결한 것이다.

“아미타불.”

항원은 차마 더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비통하게 불호를 읊었다.

“다른 물건은 없기에, 이 유골이 평양군주임을 증명할 길이 없네.”

강율중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는 아주 일반적인 일입니다.”

금라들이 중얼거리고 있는 와중에, 허칠안이 홰나무 아래로 걸어가며 말했다.

“평양군주와 사랑하는 남자가 사사로이 도망쳤으니, 틀림없이 변장했을 것입니다. 남의 이목을 끌만한 귀중한 물품을 몸에 지니지 않았을 테지요.

우선 유골을 납관하여 관아로 이송하십시오. 그런 후 예친왕부에 사람을 보내 통지하시고요. 예왕께서는 어쩌면 이 금비녀를 알아보실 수도 있으니.”

유골을 납관한 후 모두가 산 밖으로 걸어갔다. 강율중은 허칠안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잘했군.”

말을 아끼는 양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처음으로 말했다.

“이 사건은 자네의 공이 가장 커. 설령 상백 사건의 내막을 밝히지 못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아마도 자네의 죄를 면해주실 것이야.”

허칠안이 마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문득 등을 칼로 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이 출처는, 주 금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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