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양천환
요녀는 나지막하게 울부짖더니, 백의의 남자를 향해 매우 흉악한 몰골을 드러냈다. 요녀는 과감하게 창문으로 달려들어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이내 보이지 않는 공기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얼마나 서러울까.”
백의의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그는 오히려 요녀를 불쌍히 여겼다.
뒤이어 그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니 발밑에 진문(陳紋)이 펼쳐지며 금세 요녀를 덮쳤다.
진문 안에는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허상의 쇠사슬이 펼쳐졌고, 요녀의 손목과 발목을 휘감아 그 자리에서 구속했다. 요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살려두십시오!”
허칠안은 거만함에 찌든 이 고수가 요녀를 죽일까 봐 아주 겁이 났다.
백의의 고수가 뒷짐을 지고 서서 말했다.
“자네가 허칠안인가?”
“소생 그러하옵니다. 대인께서는…….”
“사천감의 양천환. 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야.”
백의의 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정말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나 허칠안은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알고 보니 양 선배님이셨군요,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뭐?”
백의의 남자가 아주 기뻐하며 물었다.
“채미 사매가 알려준 건가? 아니면 송경, 그 편집광?”
“두 분, 두 분 모두입니다…….”
허칠안은 상대가 감정의 어느 제자라는 걸 눈치챘다.
“제 동료가 선배님께 통지한 것입니까?”
“그 동라?”
백의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가 이주향 전에 이곳에 요족이 있다고 사천감에 통지했네. 우리는 지금까지 줄곧 뜰 밖에 있었고.”
‘잉? 그럼 왜 진작에 나서지 않은 거지……?’
허칠안이 입을 벌리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속마음을 간파한 듯 백의의 남자는 말했다.
“진정한 영웅은 항상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내 생각에 너는 XX 정신병자 같은데…….’
허칠안은 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천환도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게.”
허칠안은 숨을 내쉬고, 휘청거리며 일어나 진법 안의 요녀를 노려보았다.
“너는 만요국의 잔당이냐, 아니면 북방의 요족이냐?”
요녀는 냉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상의 쇠사슬이 갑자기 더 옥죄어 들었다. 기기 전호(電弧)가 요녀의 몸을 따라 흘렀고, 요녀는 고통에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다.
“이봐, 내가 만든 고문 진법은 육신과 원신을 비틀 수 있지. 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과 요족은 많지 않아.”
백의의 남자는 뒷짐을 지고 선 채로 태연하게 말했다.
요녀의 호박색 눈동자에 극단적인 공포가 서렸다.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만, 만요국, 나는 만요국의 호녀(狐女)다.”
“상백 사건은 너희 짓이냐?”
“그렇다.”
“항혜도 너희 사람이고?”
“그렇다.”
“너희의 목적이 무엇이냐.”
“상백을 폭발시키고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는 것이다.”
“안에는 무슨 물건이 있느냐.”
“모른다……. 나는 정말 모른다.”
허칠안은 백의의 남자를 쳐다봤고, 그가 말이 없자 요녀를 믿기로 하고는 계속해서 물었다.
“내가 세 가지 질문을 더 하겠다. 첫 번째, 이미 봉인물을 빼냈는데, 왜 아직도 항혜를 이용해 혼란을 일으키는 거지? 평원백을 살해하고 병부상서부를 야간 습격한 일 말이다.
두 번째, 너희들과 손을 잡은 세력이 누구냐?
세 번째, 왜 나를 겨냥하는 것이지?”
요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에 두 질문에 대해선 나도 몰라. 나는 경성에 잠복해 명령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뿐이야. 다른 일에 관해서는 전혀 모른다. 너를 공격한 건, 얼마 전에 동라 허칠안이 교방사에 들어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숨을 앗으라는 지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의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허칠안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교방사에 숨어 있던 요족이 바로 이 요녀……. 받은 지령은 나를 죽여 멸구하라는 것. 내가 계속해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고 있으니 뿌리부터 위협을 차단하고 나를 제거하려는 건가? 좋아. 적어도 수확이 없는 건 아니다. 역시나 항혜가 이번 사건의 돌파구이다.’
“마지막 질문은, 명연 낭자도 한패인가?”
요녀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때 기기 전호가 ‘착’하고 폭발하니, 그녀의 얼굴빛이 크게 바뀌었다.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명연은 아무것도 모른다.”
“선배님, 질문 끝났습니다.”
허칠안이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요녀는 내 공훈이 될 수 있을까?’
“좋아. 이 요녀는 내 공훈이니 내가 데리고 가겠네.”
백의 남자가 자연스럽게 말했다.
‘잉? 아니, 님은 고수시잖아요. 이 대답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데…….’
허칠안은 잠시 멍 때리다가 대답했다.
“네, 좋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잠복하고 있는 요족이 더 있습니까?”
“내가 도착했으니 도산지옥도 낙토(*樂土: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땅)가 될 것이네.”
양천환은 오만하게 거드름을 피웠다.
“교방사는 안전하네.”
허칠안은 비록 이 사람의 머리는 좀 이상한 것 같긴 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두 번 쉬어라.”
양천환이 갑자기 지시했다.
허칠안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다. 그가 숨을 두 번 쉰 후에 고개를 드니 백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허칠안은 명연 낭자의 호흡과 심장박동이 모두 정상인 걸 확인한 후, 청지원을 나섰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왜 나한테 고개를 숙이고 숨을 두 번 쉬라고 한 거지?’
허칠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매소각에 들어섰고, 자연스레 안방으로 이끌렸다. 그러자 울어서 눈이 복숭아가 된 부향이 보였다.
그 기녀 아가씨는 침상 머리맡에 몸을 기대고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허칠안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설명하기도 귀찮아 솜이불을 감아올리고 잠을 청했다.
그는 다시는 청지원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으나, 한밤중에 돌아갈 수도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영매소각에서 쉬어야 했다.
* * *
이튿날 아침, 허칠안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베갯머리에 사람이 없었고, 솜이불 안에는 여인의 그윽한 향기만 남아있었다.
그는 힘이 풀린 사지로 몸을 지탱했다. 마치 1000m 달리기 시험을 마친 다음 날 아침 근육이 뻐근한 상태 같았다.
“또 늦잠 잤네……. 하지만 정상 참작 가능한 지각이야. 나는 교방사에 사건을 조사하러 온 거니까.”
허칠안은 가부좌를 틀고 토납하여 세포의 피로를 풀어주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몸을 회복시켰다.
불과 주천을 두 번 운행하고 나니, 쑤시고 당기던 근육이 활력을 되찾았다.
그때 부향이 몸종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 값비싼 장신구로 단장한 상태였지만, 새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은 다소 수척해 보였다.
눈은 여전히 발갛게 부어 있었고, 너무 운 나머지 애교살이 부풀어 있었다.
“허 공자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녀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소원해진 마음이 녹아있는 형식적인 미소였다.
“공자님께 오리고기 죽을 끓여주라고 제가 주방에 일렀어요.”
“그쪽에 둬.”
허칠안은 몸종의 손에서 세면도구를 받아 빠르게 세수하고 양치질을 마친 후, 탁자로 돌아와 오리고기 죽을 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의 요녀는 만요국 잔당이다. 다시 말해 이 일은 북방 요족과는 무관하다는 거고, 진북왕의 혐의도 거의 풀렸다……. 만요국 잔당의 목표가 봉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
허칠안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만약 목표가 봉인물이라면 만요국 잔당은 지금쯤 봉인물을 챙겨 도망쳐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 계속 경성에 남아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요족의 목표가 단지 봉인물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 큰 계략을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봉인물은 단지 목표를 완성하는 데 이용할 수단일 뿐.
상백 사건의 맥락을 어느 정도 정리해보자면, 배후의 주모 세력은 첫째, 조정의 개자식들, 둘째는 만요국 잔당이었다.
목표: 불명확
봉인물: 알 수 없는 강자의 단수(*斷手: 잘린 손)
이 사건에 연루된 요소·인물·세력: 만요국, 평원백, 병부상서, 사천감, 황실, 평양군주, 항혜 승려, 금오위 백호 주적웅…….
돌파구: 단수(*斷手: 잘린 손)된 강자, 항혜 승려, 평양군주
‘단수(斷手) 강자의 신분만 제대로 파악하면 만요국 잔당의 진정한 목적을 역으로 알아낼 수 있겠다. 그런 후, 항혜와 평양군주 중 한 명이라도 잡으면 사건의 내막을 알아낼 수 있다…….’
허칠안은 죽을 다 먹은 후 만족스러움에 탄식했다.
그는 그제야 부향과 어울려줄 여력이 생겼다.
“화났는가?”
그의 물음에, 부향은 웃음 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허 공자님, 저를 놀리지 마세요. 일개 기녀가 무슨 자격으로 공자님께 화를 내겠습니까.”
‘그래, 허랑에서 허 공자로 바뀌었다 이거지……?’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기지개를 켰다.
“따뜻한 물을 준비하거라. 목욕을 해야겠다.”
부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 여종더러 그의 목욕 시중을 들라 지시하고는, 본인은 몸종을 데리고 기분 전환하러 나갔다.
허칠안은 따뜻한 물로 목욕한 후, 옷차림을 단정히 했다. 그는 동라를 매고 패도를 차고 나서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붓과 먹을 준비하거라.”
여종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 * *
“아가씨, 허 공자님께 너무 쌀쌀맞으신 거 아니에요?”
교방사 골목을 걷던 여종이 나지막이 말했다.
부향은 전방을 주시하면서 고개를 저었고, 약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몰라. 내가 그에게 속신해주면 안 되냐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그가 거절했어.”
여종이 잠시 침묵하더니 허칠안을 대신해 설명했다.
“허씨, 돈 없죠? 아가씨의 매매 계약서는 못해도 은자 삼사천 냥은 될 거예요. 지금은 두 배로 뛰었을걸요.”
부향이 시선을 거두어 땅바닥을 쳐다봤다.
“요 몇 년 동안 나도 은자를 꽤 많이 모아서, 사실 가능한 일인데…….”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속에 나란 존재는 사실 너희들과 다를 게 없어. 예전에는 내가 믿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속였는데 어젯밤 일로 나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됐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은 한때 누군가를 속절없이 흠모하는, 야속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향은 그렇게 걷다가 저도 모르게 청지원 밖에 이르렀는데, 떠들썩한 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야경꾼 차복을 입은 두 명의 동라가 명연 낭자를 포박하여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기생 어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며 시종일관 해명했다.
“야경꾼 나리들, 이건 분명히 오해예요, 틀림없이 오해입니다!”
명연 낭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저 억울해요, 저 억울하다고요…….”
이 두 동라는 부향이 아는 자들이었다. 항상 허 공자와 함께 영매소각 다도회에 왔던 그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송씨였던 것 같고, 하나는 성이…….’
그 남자는 너무 과묵해서 그녀가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어젯밤만 해도 명연은 멀쩡했는데. 맞다, 허 공자가 어젯밤에 왜 갑자기 영매소각으로 돌아온 거지……? 설마 명연이 어젯밤에 허 공자의 미움을 샀나? 그래서 오늘 처벌받는 건가?’
그녀는 즉시 이 생각을 부정했다. 이 남자에게 크게 실망하긴 했지만, 허칠안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