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137화 (137/712)

137화. 구음진경(九陰眞經)

안방.

매화꽃이 수놓아진 긴 치마를 입은 부향이 손에는 책 한 권을 든 채 나른한 자세로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색 포도를 맛보며 재자가인(才子佳人)의 세속적인 화본(話本)을 읽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과일 쟁반 안에는 포도, 사탕수수, 바나나, 대추 등 온통 제철 과일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는 여종은 침상에 쭈그리고 앉아, 부향의 희고 보드라운 발가락을 받쳐 들고, 발바닥의 혈 자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가씨, 최근에 정신도 없고, 기분도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허 공자님 생각에 그러시나요?”

“내가 그런 나쁜 놈을 생각해서 뭐 하니?”

부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매일 밤 다도회 때마다 저한테 밖에 나가서 허 공자님 왔는지 물어보라고 하시는 건데요?”

여종이 슬그머니 웃으며 묻자, 부향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과일 쟁반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 아래의 남자는 다 꼴불견이야, 꼭 이 사탕수수처럼.”

“사탕수수?”

“맨 처음에는 달아. 달아서 사람의 마음을 녹이지. 그런데 먹다 보면 마지막에는 찌꺼기만 남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고.”

부향이 입을 삐죽거렸다.

단아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벗어버린 그녀의 자태는, 더욱 산뜻하고 생동감 넘쳤다.

여종은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설령 찌꺼기라고 해도 달 때는 정말 달잖아요. 아가씨가 매일 밤 그를 모실 때면 신음이 아주 호쾌하던걸요.’

원래 잘 지내고 있었건만, 부향은 여종 때문에 말문이 터지자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네 생각에, 허랑은 어떠니?”

여종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완전 최고죠…….”

그러자 부향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여종을 발로 툭툭 치며 뾰로통하게 눈을 뜨곤 말했다.

“너는 그 사람이, 다른 남자와는 다르다는 게 느껴지지 않니?”

여종은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하더니 찬성하며 말했다.

“그는 확실히 다른 남자보다 온화하고, 저희를 얕보는 거만한 태도도 없지요. 다만 아가씨를 뚫어져라 쳐다볼 때는 밖에 있는 그런 남자들과 다를 게 없죠.”

“여기 오는 이들은 다 여색을 좋아하잖니.”

부향은 오히려 그런 부분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포도를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최근에 교방사에 반수칠언(半首七言)이 퍼졌는데 <소영횡사수청천, 암향부동월황혼>에 못지않게 놀라운 시라고 하더구나. 듣자 하니 궁에서 퍼졌다던데.”

여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다도회 손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황자 전하들과 공주마마들이 주령을 했을 때 지은 시인데, 어느 황자 전하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를 짓는 재능이 출중하다고요.”

이때 키가 큰 시녀가 뛰어 들어오더니, 다급한 눈빛을 한 채로 보고했다.

“아가씨, 허 공자가 방금 교방사에 오셨는데…….”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몇 초 동안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부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말했다.

“술과 안주를 대령하고, 그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전해.”

허칠안은 거의 열흘이나 찾아오지 않았다. 달빛 아래 꽃밭에서 그녀를 귀요미라고 부를 땐 언제고 흥미가 떨어지니 푸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어차피 한 남자일 뿐이니 그 남자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시녀가 연신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명연 낭자의 사람이 도중에 허 공자님을 가로챘어요. 지금은 이미 명연 낭자의 뜰로 갔고요.”

“뭐?!”

부향이 벌떡 일어나더니 눈썹을 치켜세우고 이를 갈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청지원(靑池院)으로 가자.”

* * *

우아하게 장식된 금청(錦廳).

허칠안은 미소를 지으며 춤추는 기녀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란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보수적이지 않으면서 화려하고 속되지도 않은 차림새였다. 맑고 깨끗한 눈동자에 뾰족한 아래턱까지. 일 년 내내 춤을 추어서인지 교방사의 다른 여인들에게는 없는 활력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의 몸매는 비율이 아주 좋았다.

“제가 허 공자님을 한동안 지켜봤는데 안타깝게도 공자님께서는 교방사에 오시면 곧장 영매소각으로 향하시더라고요.”

명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원망하는 듯, 농담하는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오늘은 제가 드디어 기회를 잡았습니다.”

허칠안은 웃으며 “당돌한 미인은 무서우니까”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산을 때렸다.

‘이 기녀와 부향은 같은 급이고, 당초 부향의 몸값은 하룻밤에 은자 삼십 냥이었으니 이 기녀도 비슷하겠지. 아직 다도회의 은자를 계산하지 않았는데. 오늘 그렇게 많은 은자를 챙기지도 않았어. 황금은 적잖이 있지만 유통 화폐로 쓸 수 없으니 말이야.’

그렇게 두 사람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시녀 한 명이 급히 뛰어와 고개를 숙이고 고했다.

“아가씨, 부향 낭자가 왔어요. 저, 저희가 막지 못해요.”

명연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부향이 공자님께 마음이 깊어 남이 손댈 수 없는 진귀한 물건쯤으로 보이나 봅니다.”

허칠안도 마찬가지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말은 언뜻 보면 아부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사실은 이간질을 부추기는 이야기였다.

기녀가 자신을 남이 손댈 수 없는 진귀한 물건으로 여긴다니, 이 시대의 남자들 눈에는 그다지 명예로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허칠안은 기분이 나쁘거나 싫지는 않았다. 별다른 능력 없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이 정도 말솜씨 정도는 있어야지.

암투가 가장 심한 곳을 얘기하자면, 황제의 후궁이 단연 업계의 선두주자일 터였다.

허칠안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부향이 여종을 데리고 들어왔다.

기녀 아가씨는 어두운 얼굴이었는데, 아름다운 눈으로는 거센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아무런 기미 없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부향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랑께서 교방사에 오셨다고 들어, 저 역시 함께 즐기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명연 낭자와 함께 시중을 들겠사옵니다.”

과연 말솜씨가 대단했다. 청지원에 온 게 허칠안을 공개적으로 비난해 싸움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중을 들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부향은 허칠안에 대한 주권을 선포하여 명연을 무찌르고, 허칠안의 환심까지 샀다. 동시에 두 명의 기녀가 시중드는 걸 좋아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명연은 친절한 미소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어찌 일부러 오라고 언니를 귀찮게 하겠어요. 저와 허 공자님이 비밀 이야기를 좀 하려는데 언니가 이렇게 오시니……, 오히려 말하기 민망해졌네요.”

부향은 못 들은 척 치맛자락을 들고 자연스레 허칠안 옆에 앉았다. 그렇게 세심하게 술을 따라주고 안주를 집어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정리해주었다.

“허랑, 요즘 공무로 바쁘시죠?”

“그렇소만.”

허칠안은 기녀가 다정히 기대오자 가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 이따가 영매소각에 가셔요. 어깨를 주무르고 혈 자리를 짚어드릴게요.”

부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명연은 이를 악물었다. 빗자루를 들고 부향을 문밖으로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경우 없어! 남자를 필사적으로 곁에 묶어 놓고 교방사의 자매들과 나누지 않다니!’

이윽고 또다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는데, 앞서 왔던 그 시녀였다. 그녀는 이상한 표정으로 허칠안을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기녀 몇 명이 더 왔어요.”

“뭐라고?”

명연과 부향이 깜짝 놀라 무심결에 소리쳤다.

허칠안이 귀를 기울여보자, 바깥에서부터 재잘재잘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지나자 아리땁게 꽃단장했지만 요염해 보이지는 않는 미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녀들 중에는 여성스럽고 다정한 기녀도, 요사스럽고 열정적인 기녀도, 대갓집 규수 같은 기녀도, 대옥(黛玉)처럼 연약해 보이는 기녀도 있었다.

스타일이 각양각색인 일곱이었다.

하지만 몸매나 용모 모두 뛰어난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 공자님, 안녕하세요!”

기녀들이 한 줄로 서서 몸을 약간 숙이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부향과 명연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그들을 열정적으로 환대하였다.

금청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가 없었기에, 명연 낭자가 사람들을 바깥의 대청으로 안내했고, 시녀에게 좋은 술과 좋은 안주를 내오라 일렀다.

태연하게 담소를 나누는 9명의 기녀들은, 마치 정말 사이가 좋은 자매 같았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허칠안을 향하는 무서운 눈빛은, 그녀들이 암암리에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모두 약삭빨라서 허칠안의 몸을 탐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고, 기녀의 신분과 기개를 유지했다.

하지만 허칠안은 그곳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화약 냄새를 맡았다. 이때, 주위를 둘러보는 부향의 얼굴에서는, 약간의 조급함이 묻어나왔다.

‘어쩌라는 거지. 너희들 구음진경(*九陰眞經: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삼부곡에 등장하는 무공비급)을 한번 구경하고 싶은 것이냐……. 휴대 전화가 없는 게 애석하다. 휴대 전화가 있었으면 모멘트에 올려서 자랑할 텐데…….’

허칠안은 기녀들에게 추파를 던지면서 속으로는 괜히 비아냥거렸다.

그때 재능이 아주 출중해 보이는 기녀 하나가 주령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술이 세 바퀴 도니 허칠안의 표현도 지극히 평범해졌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시사(詩詞)가 나오지 않자, 그를 보러 온 기녀들은 매우 실망하였다.

주령을 제안한 그 재능있는 기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 ‘취후불지천재수(*醉后不知天在水: 술에 취하면 하늘이 물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네), 만선청몽압성하(*滿船淸夢壓星河: 조용한 꿈에 가득 찬 배가 은하수로 인도하네)’라는 반구칠언(半句七言)을 알아?”

기녀들이 갑자기 활기를 띠며 재잘거렸다.

“당연히 알지.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이니.”

부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황궁에서 전해진 것이라지.”

재능있는 기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누가 지은 시인지도 알고 있어?”

기녀들이 눈을 반짝이며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아(阿雅)는 알아?”

허칠안은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마셨다.

재능있는 기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 하지만 다른 일은 좀 알아. 교방사에는 없는…….”

그녀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차분하게 술을 마셨다.

“빨리 말해, 빨리!”

모든 기녀들이 안달 내며 다그쳤다.

부향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허칠안은 부향의 그런 표정을 보며, 전생에 여자친구와 단짝이 명품 얘기를 할 때도 비슷한 모습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아(阿雅)는 그녀들의 태도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웃었다.

“이 시도 주령을 하던 중에 탄생한 거래. 당시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황자 전하와 공주마마들이고.”

“장공주마마?”

기녀들이 추측했다.

만일 황자와 황녀들 중에 이렇게 훌륭한 칠언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분명 재주와 명성을 고루 갖춘 장공주 회경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것까지는 몰라.”

아아가 고개를 젓더니 허칠안을 쳐다보며 웃었다.

“물론 반수(半首)뿐이지만, 그 수준은 허 공자님에게 뒤지지 않죠. 하지만 저는 허 공자님의 시야말로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수 짜리 시를 떠올리면 성스러운 빛이 번뜩이지만 허 공자님의 넘쳐흐르는 재주에 비할 수는 없지요.”

“맞아요, 맞아요. 허 공자님, 근래에 가작(佳作)이 있으신가요? 저 공자님을 흠모한 지 오래예요.”

요염하고 다정한 태도의 또 다른 기녀가 추파를 던졌다.

다른 기녀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미소를 지으며 깊은 애정을 담아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경쟁자이면서도 협력자로, 허칠안에게서 귀중한 것을 짜내기 위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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