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133화 (133/712)

133화. 취원단

허칠안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황성을 떠났다. 내성의 널찍한 거리를 한참 질주한 끝에, 드디어 위연의 마차가 보였다.

뒤에서 아주 빠르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은 위연의 호위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는 허칠안임을 확인한 후에 다시 경계심을 풀었다.

“위 공, 위 공……. 소직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허칠안이 큰 소리로 말하자, 위연의 목소리가 찻간에서 들려왔다.

“마차를 멈추거라.”

강율중은 즉시 말고삐를 잡아당겨 멈췄다.

허칠안이 말을 몰아, 마차 창가로 와서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위 공, 소직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허칠안이 창가의 발을 젖혔을 때, 뚜렷한 이목구비에 귀밑머리가 하얀 나이 든 미남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네 이 간헐적으로 보고하는 버릇은 언제 고칠 텐가?”

허칠안을 나무라고 나서야 그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

“항혜의 다음 목표가 병부상서나 왕 재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만약 불의의 사고가 생긴다면, 위 공께서 골치 아파질 것입니다.”

허칠안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 * *

장부.

병부상서 장봉은 마차를 타고 처소로 돌아와, 마중 나온 집사에게 물었다.

“역아(易兒)는?”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병부상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에게 1각(*刻: 약 15분) 내로 단정하게 차려입고 서재로 오라고 하거라.”

이에 늙은 집사는 조심스럽게 장 상서의 눈치를 살피며 명령을 받들러 갔다.

장봉은 서재로 돌아와 피풍의를 벗어 시종에게 건넸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댄 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1각이 지날 무렵, 장봉의 적장자 장역(張易)이 시간을 재며 들어왔다.

“아버지, 저를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장역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고, 부은 눈두덩이와 깊은 다크서클은 그가 시간관리대사(*時間管理大師: 밤에 잠도 안 자고 무엇을 하는지 모를 사람을 놀리는 말) 신분임을 나타냈다.

“귀중품을 챙겨 즉시 경성을 떠나거라.”

장 상서는 반복해서 되뇌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네?”

“지금 바로 가거라!”

장봉의 눈빛이 매섭기도 했고, 장역은 원래 아버지를 무서워했으므로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저택 하인들의 도움으로 장역은 옷, 건조 식품, 금은 등 소지하기 용이한 물품 위주로 짐을 꾸렸다. 그리고 저택에서 먹여 살리던 십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외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마차가 내성 성문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문을 지키던 사졸이 신분을 물어보고선 그들을 막아섰다.

“폐하께서 6품 이상의 관원들과 그 식솔들은 경성을 떠날 수 없다고 황명을 내리셨습니다.”

* * *

해 질 무렵, 장공주의 처소에서 종일 풍류를 즐긴 저채미가 말을 타고 허부로 와 작은 뜰의 문을 두드렸다.

“채미 소저.”

이때 허칠안은 이미 차복을 벗고, 영월 동생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여동생 손에는 실, 오라버니 몸에는 옷.’

저채미는 허리춤의 사슴 가죽 소포에서 도자기 병 두 개를 꺼냈다.

“대력완 한 알에 은자 두 냥이야. 비싸니까 좀 아껴서 먹어.”

‘한 알이면 내 보름치 녹봉인데……. 저채미는 사실 숨겨진 부호……? 감정의 제자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내 손으로 키우고 싶다.’

허칠안은 이런 ‘재벌 2세’를 부러워했다. 물론 그에게도 구백 냥이 넘는 황금이 있었지만, 이 돈은 집을 사는 데 쓸 예정이었다.

“들어와서 차 한잔하시오.”

허칠안이 고혹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자, 저채미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흥’ 소리와 함께 짜증을 냈다.

“금방 해가 질 모양인데, 네가 이 시간에 나를 안으로 들이는 저의가 뭔데?”

저채미는 그를 한번 흘긴 후 말고삐를 잡고 멀어져갔다.

허칠안은 그녀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뜰 문을 닫았다.

‘상백 사건이 끝나면 조촐한 버전의 치킨스톡을 만들어서 한번 베풀어야겠어.’

* * *

본채에서 저녁밥을 먹은 뒤 청아하고 상큼한 여동생과 한참 동안 잡담을 나눈 허칠안은 자신의 작은 뜰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 안에서 반 시진을 토납했다.

“야옹~”

별안간 그는 맑고 은은한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문 열려있습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니 황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우아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꼬리를 높이 세운 고양이가, 누르스름한 눈으로 허칠안을 빤히 쳐다보며 사람의 언어를 내뱉었다.

“낙옥형이 뭐라고 하던가?”

‘……금련 도사 당신, 무슨 새로운 세계의 대문이라도 연 거야? 아니면 특별한 취미가 있나?’

허칠안은 황갈색 고양이를 응시하며 말했다.

“취원단을 챙겨왔습니다.”

허칠안의 말을 들은 황갈색 고양이의 얼굴에, ‘안도의 한숨을 짓는’ 인간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취원단이 생겼으니, 여러 날 후에 내 수련의 경지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네.”

황갈색 고양이는 침착한 어조로 사람의 언어를 내뱉었다.

경성 같은 곳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이 없으면 위험했다. 조정의 앞잡이에게 발각되거나 마찬가지로 경성에 잠복한 암흑 조직 놈들과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취원단의 효능이 그렇게 좋은가? 잘됐다. 금련 도사가 회복한다면, 지서 채팅방에서 사담을 나눌 수 있겠군…….’

허칠안은 기뻐지는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모두 도문 출신인데, 도사님께서는 왜 인종에게 단약(丹藥)을 구하시는 겁니까? 지종은 단약 제조에는 소질이 없나요?”

황갈색 고양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별다른 어조를 띠지 않고 대답했다.

“취원단 원가가 황금 백 냥 정도일세. 또한 일부 약재는 은자가 있어도 살 수가 없지.”

‘내 지종 수준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인종이 돈이 많은 거라네……. 이건 정말 슬픈 이야기야!’

허칠안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오늘은 무슨 수확이 있는가?”

황갈색 고양이가 탁자 위로 뛰어올라 등불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두운 실내에 드러난 누르스름한 고양이 눈은, 기괴하고 무서워 보였다.

허칠안은 예왕부에서 얻은 정보와 자신의 추리를 털어놨다.

황갈색 고양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경청하더니, 무의식적으로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는 발을 핥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꾹 참고는, 티 나지 않게 앞발을 내리며 말했다.

“자네의 분석이 옳아. 항혜 승려와 평양군주의 도피 행각은 조정의 당파 싸움과 관련 있지. 단지 나는 항혜가 아직 살아있던 거라면, 왜 더 일찍도 아니고 더 늦게도 아닌 하필 상백 사건 직후에 나온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게다가 그의 실력과 수준이라면 상백 사건에 가담할 자격이 없잖은가?”

비록 의문문이었지만, 눈빛에 당혹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허칠안은 금련 도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배후에 다른 세력이 있습니다. 저도 본래는 그 세력이 진북왕인 줄 알았으나, 만약 반역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면 봉인된 물건을 풀어준 목적이 무엇일까요?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론은 평원백만 제거했을 뿐이니……. 설마 예왕이 봉인된 물건을 풀어 원수를 모조리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요?”

“자네 말은 평양군주는 이미 죽었고, 예왕이 딸을 위해 복수한다는 것인가? 이 가능성은 크지 않네. 예왕이 만약 이 일을 알았다면 친왕의 신분으로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복수할 필요가 없어.”

황갈색 고양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자네 사고의 방향은 늘 종실에 머물러 있는 거지?”

허칠안이 풀이 죽어 말했다.

“진북왕의 혐의가 갈수록 줄어드니 이건 뭐 정말 며느리가 이혼……, 아이고.”

“며느리가 이혼?”

황갈색 고양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든 탑이 무너진다고요.”

허칠안이 대답했다.

황갈색 고양이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말이 아주 듣기 좋군.”

만약 항혜가 나타나지 않았고 봉인물이 계속 숨어 있었다면, 허칠안은 진북왕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상대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현재 항혜 승려의 모든 행위는 봉인물의 잘난 체와는 서로 부합하지 않았다.

좌우간 황제를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허칠안이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덕에, 안개에 뒤덮여 있던 상백 사건이 가까스로 절반 정도는 파악됐다. 이 외에는 허칠안이 24K 타이타늄합금으로 된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황갈색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의견을 제시했다.

“빈도는, 자네가 어쩌면 잘못 짚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

허칠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진북왕이든 예왕이든 모두 종실이지. 자네가 그들을 의심하는 건 상백 밑에 봉인된 물건에 대해 원경제 한 사람만이 알고 있기 때문 아닌가?”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갈색 고양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감정과 원경제를 배제하고, 불문도 알고 있네.”

허칠안이 고개를 저었다.

“불문은 그해 주동자 중 하나입니다. 상백의 봉인이 해제된 후, 청룡사의 반수 주지 스님께서 서역행을 가신 걸로 보아 이에 대해 중시하고 있는 듯하고요.”

“요족.”

고양이가 내뱉은 간략한 두 글자는, 허칠안에게 깨달음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

‘나는 줄곧 배후 주모자를 황실 종친으로 한정 지었지. 만약 봉인된 것이 초대 감정이고 이 추측이 합리적이라면…….

하지만 만약 초대 감정이 아니라면, 그럼 상백 봉인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원경제, 감정, 불문뿐만이 아닌 거겠지. 내가 놓친 또 다른 세력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봉인물 그 자체가 속한 세력이라는 건데. 오백 년을 봉인되어 있었어도 소멸하지 않고, 극도로 두려운 최강자. 이런 인물은 수련을 느슨히 하지 않겠지……. 요족인 건가? 음, 이 부분은 고증이 필요하다.’

허칠안은 꺼내놓은 도자기 병을 황갈색 고양이 옆에 두고,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제가 오늘 국사를 만나 뵈니, 음,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습니다.”

황갈색 고양이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자네가 생각한 선풍도골(*仙風道骨: 선인의 풍채와 도사의 골격)이 아니었겠지.”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황갈색 고양이가 덧붙여 말했다.

“아마도 교방사의 여인들보다도 훨씬 매력적이라 군침을 질질 흘렸겠지.”

‘천만에. 단지 나를 범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을 뿐이야…….’

허칠안이 문득 말했다.

“역시나 그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허칠안이 만나 본 미인은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금껏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들떠, 머릿속에 온통 야릇한 생각만 떠오른 적은 없었다.

이건 어쩔 수 없이 국사의 문제일 터였다.

황갈색 고양이는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했다.

“자네는 인종을 왜 인종이라고 하는지 아는가? 낙옥형이 왜 국사가 되려 했는지? 음, 낙옥형은 전임 인종 도수의 딸이었네.”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서 뭐 하려고? 사실 그 여인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암시 주는 거야?’

허칠안은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도문 삼종 중에 천종만이 사사로운 정과 욕구를 끊고, 인종과 지종은 정상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도사께서는 자손이 있으십니까?”

황갈색 고양이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젊었을 때는 있었으면 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정도 시들해지더군.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사랑한다는 건 정말이지 저속하기 짝이 없지.”

‘정말 저속하기 짝이 없을까? 중년이 되니 몸이 말을 안 들어 보온병에 구기자나 달여 넣는 건 아니고?’

속으로 비아냥거리던 허칠안이 말했다.

“도사께서는 이미 저급한 취향에서 벗어나셨으니 그저 우러러 탄복할 따름입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도사님 같으면 참 기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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