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132화 (132/712)

132화. 예왕

위연이 간 후, 어서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신들이 느릿느릿 걸어왔다.

“유 공공, 위연과 폐하께서 무슨 말을 했는가?”

“대인 어르신들,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십시오.”

유 공공은 연거푸 손사래를 쳤다.

“유 공공이 할 수 있는 말만 골라서 얘기하면 되지 않는가.”

당조 재상의 중기(*中氣: 사람의 속 기운) 충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공공은 약간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여러 대신들을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건은 야경꾼 관아의 동라 허칠안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위 공께서 폐하께 드린 말씀도 모두 그한테 들은 정보입니다.”

‘허칠안?!’

뭇 대신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리둥절했다.

* * *

영보관을 나선 허칠안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국사의 아름다운 용모가 떠다녔다.

‘도를 닦는 여인은 다르다. 옥 조각 미인처럼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결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어. 지종 도수가 2품이니 인종 도수도 비슷하겠지……. 2품이면 선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리 아래의 말이 달가닥달가닥하며 기구 창고(器械庫)를 지나갔다. 허칠안은 수위에게서 예친왕부의 위치를 알아냈다.

‘상백 사건의 수사 방향은 바뀌어야 한다. 우선 진북왕을 조사하지 말아야겠어. 항혜와 평양군주의 일을 확실히 조사하고, 만족을 모르는 이 커플과 평원백부 사이에 어떤 은혜와 원한이 있는지 제대로 밝혀내기만 하면, 상백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보름까지도 필요 없고 며칠이면 될 것 같아…….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지.

금련 도사가 저녁에 나를 찾으러 올 테니 인종 도수가 무슨 상황인지 잊지 말고 물어봐야겠다. 분명 도사인데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야.’

허칠안은 말의 배를 겨드랑이에 끼고 빨리 달리게끔 재촉했다.

* * *

예친왕부.

허칠안은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그는 수위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금패를 꺼내 보이며 신분을 밝혔다.

“본관, 폐하께서 친히 임명하신 상백 사건의 수석 수사관이오. 예왕 전하를 만나 뵐 일이 있으니 수고스럽겠지만 나 대신 전해주시오.”

시위는 요패를 보더니 업신여기는 태도를 접고 황급히 저택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가 돌아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께서는 저를 따라오시죠. 저희 전하께서 만나시겠다 합니다.”

* * *

예왕부 부지 면적은 매우 넓어 대문에서 바깥 대청까지 족히 5분은 걸어야 했다.

허칠안은 바깥 대청에서 원경제의 남동생인 당조 친왕을 만났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흰머리가 일찍 났고, 창백한 얼굴색에 매우 비실비실해 보였다. 미간의 주름은 세로로 깊게 패어있어, 분명 40대 초반일 뿐인데 원경제보다도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자색 비단옷을 입은 그는, 이목구비가 제법이었다.

“동라?”

예왕은 손에 차 한 잔을 들고 가볍게 마시며 물었다. 목소리는 기운이 없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언제 황형께서 일개 동라를 수석 수사관으로 특별 임명했단 말인가?”

“외람되오나 예왕께서는 저에 대해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허칠안은 상백 사건이, 오늘날 경성에서 실검 1위인 톱뉴스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자연히 왕공 귀족부터 하급 장수까지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라고 여겼다.

‘그 사건의 수석 수사관인 나를 졸개들은 모른다 쳐도, 명색이 종실의 일원인 예왕이 모른다니?’

예왕이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났네. 들어본 적이 있어. 허나 본왕이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은 지 오래라 순간 떠오르지 않았네.”

‘평양군주의 실종이 그에게 매우 큰 타격을 준 것 같군…….’

허칠안은 속으로 탄식했다.

“자네는 무슨 일로 본왕을 찾아온 것인가?”

예왕이 하인에게 손짓하여 차를 따라 손님에게 권하라 명했다.

“소직, 상백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사온데, 조사하던 중 이 사건이 뜻밖에도 예왕 전하와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허칠안이 공손하게 말하자, 예왕은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본왕은 일찍이 반 은퇴한 몸이라 중상모략은 아닐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말해보거라.”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의 눈빛에는 경멸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허칠안이 한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일 년여 전에 청룡사에 항혜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한 여성 참배자와 사사로운 감정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들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조한 후 청룡사에 있던 기운을 감출 수 있는 법기를 훔쳐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 여인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 기운을 감추는 법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경성 관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시던 예왕이 고개를 들더니, 허칠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허칠안은 말했다.

“그 승려의 이름이 항혜라고 하더군요. 예왕께서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 여인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여인은 바로 전하의 적녀 평양군주입니다.”

쿵!

예왕이 쥐고 있던 청화(靑花) 찻잔을 무참히 깨트렸다. 그는 흉악함이 뒤섞인 격앙된 표정으로 분노에 차 말했다.

“허튼소리, 허튼소리 말거라! 평양은 어릴 때부터 학식이 대단하고 사리에 밝은 아이였다! 어찌 변변치 않은 승려 놈과 사사로이 도망칠 수가 있단 말이냐……! 여봐라, 여봐라. 이 도둑놈을 끌고 가 목을 베거라!”

대청 밖에 있던 시위대가 단숨에 뛰어 들어와, 빈틈없이 허칠안을 둘러쌌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발톱을 치켜세우고 포악하게 날뛰는 늙은 아버지를 보며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이런 소식은 어떤 아버지가 들어도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예왕에게 이 얘기는 에피타이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시위대가 몰려든 후, 방금까지 펄쩍 뛰며 노발대발하던 예왕은 갑자기 맥이 풀렸는지 시위대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그래. 전혀 놀랍지 않아. 평양이 실종되기 전 내가 딸에게 혼사를 거론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평양은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었네.”

예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황당무계하던지. 무릇 혼인 대사는 부모의 명(命)이오, 중매쟁이의 말(言)인데 어찌 한낱 여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까? 다른 자가 그녀를 기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어찌 알겠느냔 말이다.”

‘내가 비록 혼사가 부모의 명이자 중매쟁이의 말이란 건 동의하지 않지만, 이 시대의 자유연애는 확실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살던 그 시대처럼 만나고 헤어짐이 당연한 상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은 뒤 순간 분노가 치밀어 딸의 뺨을 한 대 때렸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이 실종됐네. 분명 그 변변치 않은 놈에게 납치당한 것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맨 처음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염치도 모르는 딸이 종실 망신을 다 시켰다며 많이 원망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평양이 보고 싶어졌네. 그녀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내 곁에 돌아와 ‘아바마마’라고 한 번만 불러준다면, 다른 건 전부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더군.”

‘……어쩌면 다시는 그녀를 못 볼지도 모르겠군. 그날 밤 항혜와 평원백 적자의 대화 중에 항혜가 한 번 죽었던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항혜는 여전히 이렇게 살아있지. 하지만 그와 사사로이 도망친 평양군주는?

그 여인이 직면한 결말은 세 가지 중 하나다. 첫째, 죽었다. 둘째, 다른 이가 잡아두고 있다.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동시에 벌어졌거나.’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예왕 전하의 상처를 들춰내려는 의도도 아니고, 평양군주와 사사로이 도망친 남자가 누구인지 말씀드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허칠안이 말했다.

예왕은 멍해지더니 이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허칠안 앞으로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한 손으로는 그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내 딸의 소식을 아는가? 평양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어!!”

허칠안이 눈살을 찌푸리자, 예왕이 진정하더니 두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본왕이 추태를 부렸군.”

그는 허리를 곧게 펴더니 갑자기 몸을 굽혀 읍을 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 대인이 본왕을 도와 딸아이를 찾아줄 수만 있다면, 본왕이 대인에게 아주 큰 빚을 지는 것이겠지. 이 빚은 나중에 반드시 보답하겠소.”

“제가 여기에 온 것이 바로 이 일 때문입니다. 평원백부 일가 전멸 사건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아직.”

예왕은 다소 놀랐다.

허칠안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왕야께선 평원백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그 역시 훈귀 중 한 사람이지. 예전에는 그래도 자주 왕래하였으나, 평원백의 야심이 불타오르면서 손에 쥐고 있는 권력에 만족하지 않고 문관과 내통하는 바람에 다른 훈귀들에게 버림받았네.”

허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해서 말했다.

“왕야께서는 내각에 들어갈 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왕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실제로 폐하께서 작년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지. 현재 내각은 왕정문(王貞文)의 천하다. 다른 당파와 위연이 견제하며 균형을 잡고 있지만, 형식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나는 종실이자 뒤로는 훈귀 세력이 있으니, 폐하께서 나를 내각에 들여보내 고인물을 좀 정화시키고자 하셨네.”

‘원경제도 참으로 대단하다. 일 년 내내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걸핏하면 흥청망청 돈을 써 재산을 탕진하지만, 십여 년을 정사에 태만했어도 여전히 높은 곳에서 조정을 통제하고 있다니. 그의 권모술수는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겠어…….’

허칠안은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왕야께선 현재 저택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럼 이득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재상 왕정문과 병부상서 장봉이지……. 허, 그것은 본래 내 위치였지만.”

예왕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나누고 나니, 그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허칠안도 알고 싶었던 정보를 얻었기에, 몸을 일으켜 공손히 작별인사를 했다.

* * *

말발굽 소리가 경쾌한 이 쌩쌩한 말은 허평지가 몇 년 동안 몰던 말로, 지금은 조카 허칠안이 물려받아 타고 있었다.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달라졌지만, 말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고 온순함과 유쾌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허칠안의 마음은 그리 홀가분하지 않았다. 예왕의 말에 따라 미루어 짐작해보면, 평양군주와 항혜가 사사로이 도망친 일은 어쩌면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일 터였다.

정치하는 자들이 무슨 수라고 못 쓰겠는가?

예왕의 정적들이 ‘널 어찌하지 못한다 해서 네 딸까지 어찌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나?’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항혜의 복수도 다른 측면으로는 이 점을 증명했다.

‘누구일까? 왕 재상? 장 상서? 역시 그 두 사람 다인가…….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어. 문관 집단과 훈귀 집단의 아귀다툼이 상백 사건과 또 요족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야? 음, 원경제를 제외하고 상백 밑에 물건이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지?

큰일이다. 항혜의 다음 복수 대상은 재상 아니면 병부상서인 것 같군.’

허칠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곧장 말의 배를 힘껏 겨드랑이에 끼고 가장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 궁성으로 향했으나 궁성 입구에서 가로막혔다.

“위 공께서는 아직도 궁에 계신가?”

“이미 떠나신 지 반 시진 가까이 됐습니다.”

성을 지키는 우림위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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