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얕디얕은 부자간의 정(情)
“아마 친구의 친구가 아니라, 네 그 친구가 매일 은자를 줍는 사람일 것이다.”
천고 할머니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꼬마 아가씨를 쳐다봤다.
리나의 붉고 윤기가 흐르는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옅은 푸른빛의 눈동자는 멍해졌다.
뜻밖에 삼호가 그녀를 속이다니. 그가 사람을 속이기를 즐기는 나쁜 놈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삼호가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에 가득 찬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다.
부족의 어르신들이 말하길, 지식인은 모두 절개가 굳고 강직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천고 할머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둥근 달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전에 도둑 둘이 어떤 목적을 품고, 대부호의 집에 침입하여 매우 중요한 물건을 훔쳐 갔어. 그 물건은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이고, 물건을 훔친 도둑들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지.
대부호 집안 사람들 중에는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걸 아는 자도 있고, 지금까지도 이 일에 대해 모르는 자도 있지.”
리나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뭘 훔쳐 갔는데요?”
천고 할머니는 그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설명해주는 대신, 아주 중요하고, 또 중요한 물건이라고만 반복해서 말했다.
* * *
고족의 100인 정예 부대는 아주 빠르게 극연에 도착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열곡(裂谷)이었다.
열곡에 가득 찬 유독한 기체는, 다량의 독을 머금은 식생(植生) 및 각종 독충과 맹수를 빨리 자라게끔 재촉하고 있었다. 여기는 고족에게 ‘원재료’를 끊임없이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천연 독충 양식장이었다.
리나는 이곳에 한 번만 와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외곽에서 고충(蠱蟲) 잡았을 뿐, 이렇게 깊이 들어와 본 적은 없었다.
대오는 유독한 기체와 독충의 교란을 방역하기 위해, 몸에 구충 가루와 벽독단(闢毒丹)을 뿌리고선 덤덤하게 앞으로 향했다.
독고부의 부족 사람들은 물 만난 고기인 것처럼 혈색이 좋았다.
앞 사람이 밟고 지나간 작은 길을 따라 열곡으로 깊이 들어가니, 점점 풍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흑갈색의 땅에는 괴상망측한 기형 식물이 가득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무성한 가지와 풀숲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독충들이 불청객 때문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
갑자기 누군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무명옷을 입은 한 남자의 피부가 온통 빨갛게 변해 있었다.
“여자, 나는 여자가 필요해…….”
그는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남자 동료에게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그를 안았다.
하지만 옷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그는 급해서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남자는 나무를 껴안고, 여자도 나무를 껴안았다…….
리나는 이들이 욕고(慾蠱)독에 중독됐다는 걸 알았다.
고족 사람들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심지어는 손가락질하며 웃기까지 했다.
욕고부의 부족 사람들은 흩어져 중독된 각 부족 사람들을 응급 처치했다. 그들은 포대 자루에서 말거머리같이 생긴 까만 연체 벌레를 꺼내, 중독자의 가슴, 목덜미 그리고 바짓가랑이 안에 두었다.
‘말거머리’는 피부 표면에 달라붙어 구기(口器)를 혈관에 꽂고, 미친 듯이 피를 빨아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말거머리들은 딴딴하게 팽창하면서 뿌듯하다는 듯이 피부 표면에서 떨어져 나갔고, 중독된 부족 사람들의 증상은 즉시 호전됐다.
비교적 빨리 기가 빨리는 허약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지구력이 강한 사람들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열곡의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맞닥뜨릴 고충은 더 많았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몸통이 소 같은 대형 벌레, 온몸이 아름답고 화려한 나비, 12개의 눈이 달린 뱀, 산송장인 동물 무리, 3개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 수컷 들개 등등이 그러했다.
마지막 대오는 평지에서 멈췄는데, 이곳은 어떠한 식물도 없이 바위들만 겹겹이 우뚝 솟아있었다.
독극물이 가득한 가운데, 리나는 높고 큰 석상을 보았다. 헐렁한 도포를 입고 높은 관모를 쓰고 한 손은 등 뒤에, 다른 한 손은 배에 올린 채 고개를 약간 숙이고 극연의 갈라진 틈을 바라보는 남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7명의 부족 수장이 호흡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 석상으로 걸어갔다.
“막상, 저 사람 누구야?”
리나가 오라버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거칠고 고집스러운 성미의 막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자의 이름은 모르지만, 너도 아마 그의 칭호는 들어봤을 거야…….”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유가 성인이다.”
* * *
뜰 안, 촛불 한 점만이 그 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나는 줄곧 항원의 행방을 찾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가 아직 성안에 있다는 것만 알 뿐,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네.”
금련 도사는 침상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사께서 지서를 통해 위치를 추적할 수는 없나요?”
허칠안은 ‘구호’가 처음에 지서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실시할 수 있고,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론적으로는 금련 도사가, 실종된 지 열흘 가까이 된 육호를 이미 찾아냈어야 했다.
“내가 추측건대 육호의 지서는 봉인된 것 같네.”
‘……엥? 봉인된 거면 어떡하라고? 정말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허칠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한, 이 열흘 동안 외성의 절반을 걸어 다니며, 가장 어리석고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찾아다녔네. 만약 항원의 지서 파편이 나와 서른 장(丈) 안의 거리에 있다면, 설령 봉인됐더라도 나는 바로 감지할 수 있네.”
금련 도사가 자신 있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의심할 필요 없이, 이는 천지지보(天地至寶)가 본디 갖고 있는 위격(位格)이라네.”
‘있어 보이는 척하기는…….’
허칠안은 속으로 빈정대는 동시에 한시름 놓았다.
방법이 미련하기는 하나 효과만 있으면 됐다. 가장 두려운 건, 방법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만약 육호의 소식이 있으면, 내가 바로 자네에게 통고하겠네. 허허, 자네가 나서는 게 내가 나서는 것보다 더 낫겠지. 나 역시 야경꾼의 힘이 필요하네. 여기는 필경 야경꾼 구역인 경성이잖나.”
여기까지 얘기하자, 금련 도사는 뭔가 떠오른 듯했다.
“참, 위연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던가?”
“별다른 생각이 없으십니다. 저보고 열심히 하라고만 하세요.”
허칠안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이때, 그는 금련 도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가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칠안은 입가를 씰룩대고선,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사께서는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시는 겁니까?”
금련 도사가 말했다.
“위연이 자네를 야경꾼의 비밀 연락원으로 두고 싶어 하는 거 같군. 아니면 자네를 경성에서 내쫓거나.”
허칠안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금련 도사는 허칠안의 반응에 아주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지서 파편을 자네에게 줄 수 있었다는 건, 그가 자네를 아주 아낀다는 걸 의미하지. 그런데 사건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는단 말이야.
이는 자네가 원경제의 분노를 사 경성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는 걸 증명하네.”
허칠안은 오기가 생겨 위연을 위해 변명하고 싶었지만, 입가에 맴돌던 말을 뱉지는 못했다. 위연이 솔직하게 이런 생각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위연이 수수방관하는 편이긴 하나 가만히 두고 그대로 맡기는 것입니다. 위연의 관심과 개입 없이 제힘으로 처리하는 것이죠.”
“자네 위연을 너무 얕잡아보았군. 그자는 환관 출신으로 대권을 장악하고, 환관 출신으로 수만 명의 대군을 통솔하여 산해관전역을 승리로 이끌었네. 진북왕조차도 그에게 머리를 숙였어. 능력, 수완, 계략 모두 당대 일류란 말이지. 내가 감히 장담하건대 상백 사건에 대해 그가 자네보다 알고 있는 것이 훨씬 많을 걸세.”
“…….”
허칠안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연 얕디얕은 부자의 정(情)이었단 말인가?’
금련 도사는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허나 나는 위연이 왜 자네더러 경성을 떠나라고 강요하는지는 납득할 수가 없네. 그는 결코 첩자가 부족하지 않거든.”
방 안에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금련 도사는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끝내 떠나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또 다른 일이 있는가?”
“있습니다!”
허칠안은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가 평원백부에 한 차례 다녀오고 싶은데, 경계가 삼엄합니다. 제게도 들어갈 방법이 있기는 하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도사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자네, 평원백부의 적자를 찾아가고 싶은 게로군.”
금련 도사는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항원이 말하길 사제 항혜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다고 들었는데, 무차별적으로 찾아다니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항원을 찾지 못한 거라면, 우선 평원백에게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지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지 않았는가?”
“그에게 적자가 있지 않습니까.”
“현재 자네의 신분으로도 자발적으로 찾아가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금련 도사는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평원백은 필경 세습한 훈귀이지 않습니까.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폭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정상적인 수사는 손발이 묶이기 십상이니, 답을 얻고 싶으면 양지와 음지에서 서로 잘 협조해야만 합니다.”
허칠안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원신 영역에서의 도문은 그 이름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지배자입니다. 그에게 순순히 ‘협조’하라고 하며, 모든 정보를 얘기하라고 하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까?”
“……자네 뜻밖에 경험이 아주 풍부하군. 이는 자네의 예전 인생과 경력에 걸맞지 않네.”
금련 도사는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어떤 차는 새 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킬로 수가 어마무시하게 높답니다.”
허칠안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금련 도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 말은, 도사께서는 제 겉모습만 보셨지만, 무릇 한 사람의 인생은 권종에 적힌 글자보다 훨씬 다채롭다는 뜻입니다.”
허칠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리가 있군.”
금련 도사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마음을 편히 가지게. 내가 부신(俯身)하여 자네의 의식으로 들어가 보겠네.”
“도사께서는 또 원신 이탈하시려는 겁니까?”
허칠안이 경계하며 말했다.
“허허, 부상을 입어 실력이 많이 감퇴했으나, 내 음신은 멀쩡하니 내 실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을 걸세.
내성에 야간 통행 금지령이 내려 자네를 떳떳하게 따라갈 수가 없네. 보통 동라는 속일 수 있지만, 만일 금라에게 들킨다면 자네에게도 좋을 게 없지 않은가. 게다가 경성에는 숨어 있는 고수가 많아 야경꾼 말고도 위협적인 존재가 있을 수 있네.”
‘말은 그럴듯하지만, 내 원신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고 싶은 거 아니야? 참 너무하네……. 게다가 우리가 아직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허칠안은 곤란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금련 도사를 어느 정도 신뢰하기는 했으나, 상대방의 원신을 임의로 의식에 침입하게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금련 도사가 자신의 비밀을 엿보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전생의 기억이나 기녀 부향과의 사생활이라거나.’
금련 도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때 용마루에서 처량하고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허칠안은 별안간 웃음을 지으며 머리 꼭대기를 가리켰다.
“도사께서 욕보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