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126화 (126/712)

126화. 고족

“자네 역시 이미 청룡사를 다녀온 게로군. 그곳에서 항원의 신분을 알게 되었고.”

금련 도사는 결코 놀라지 않았고, 뒤이어 반문했다.

“사제?”

“청룡사에 법호가 항혜인 승려가 하나 있었는데, 일 년여 전에 예친왕의 적녀인 평양군주와 사사로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예친왕은 큰 충격을 받아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요. 이 일의 배후에는 훈귀와 문관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연관되어 있는 듯합니다.”

허칠안은 찻주전자를 잡고 차를 따라 마신 후, 목을 가다듬고 계속해서 말했다.

“항혜 승려는 평양군주를 데리고 수색망을 피하기 위해 기운을 차단하는 청룡사의 법기를 훔쳐 갔습니다. 저는 그 법기가 나중에 금오위 백호 주적웅의 손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고요.”

금련 도사는 인내심을 가지고 들으며,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때로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허칠안이 말을 마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는 항원을 통해서 항혜의 소식을 알아내, 추측이 맞는지 확인해 보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현재 제게는 유일한 돌파구입니다. 도사께서 기억하십니까? 항원이 말하길 사제가 납치당했다고 했죠. 그리고 청룡사의 주지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항혜는 사랑의 도피를 했다 했습니다. 항원이 청룡사를 떠나 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단서를 찾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내가 자네를 데리고 그를 찾길 바라는 것이군.”

“예, 부탁드립니다.”

* * *

밝은 달과 듬성듬성한 별이 펼쳐진 하늘, 수만 리 떨어진 남방의 어느 밤.

경성의 겨울철 추위와 건조함에 비하면, 고족이 거주하는 남방은 기후가 습했다. 설령 일 년 중 가장 추운 계절이라 해도, 이곳에 사는 고족은 얇은 옷을 입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리나(麗娜)는 가볍고 얇은 헝겊신을 구겨 신은 채였고, 무릎까지만 오는 치마 아래로는 늘씬하게 쭉 뻗은 종아리가 보였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정교했고, 눈썹은 약간 짙었으며, 옅은 푸른빛 눈동자는 역동적이면서도 순진함이 감돌고 있었다.

연갈색의 피부는 그녀의 건강함과 넘치는 야성미를 부각시켰는데, 마치 한 마리의 표범 같았다.

100명이 넘는 큰 부대가 황야를 누비며 횃불을 들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깡충깡충 뛰어가는 리나는 부대와 다소 이질감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이번에 수련하기 위해 부족의 어르신들을 따라나선 터였다. 목적지는 고신이 깊이 잠든 극연이었다. 고족에는 7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고신의 수혜자이자 수호자의 역할을 했다.

‘고신이 회생하는 원인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면, 천지회에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럼 모든 구성원이 내게 빚을 하나씩 지게 되는 거야. 전제는 이 원인이 고족에게 위협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리나의 맑고 아름다운 눈이 웃기 시작했다.

“리나, 좀 진지하게 굴어.”

앞에 가던 오라버니 막상(莫桑)이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여동생을 꾸짖었다.

그는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자로, 리나의 외모와 비슷했으나 왼쪽 얼굴에 있는 깊은 상처는 그의 영준함을 해쳤고 매서운 눈빛은 그를 거칠고 고집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리나는 오라버니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고, 되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오라버니는 못살게 굴 새언니가 있는데 오라버니만 처가 없으니 매일 나만 못살게 구는 거야.”

막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묵묵히 걸었다.

리나는 오라버니를 따라가다가 해죽거리며 그에게 찰싹 붙어 어깨동무를 했다.

“듣자 하니 대봉의 여인은 젊고 생기가 넘치고 얼굴은 찐빵보다도 하얗대. 막상 오라버니, 내가 아내 하나 뺏어서 돌아올게.”

막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내가 예쁜 게 무슨 소용이냐. 나는 손으로 표범도 때려잡는 여자가 필요해.”

“하지만 내 친구가 말하는 걸 들었는데, 대봉 진북왕의 왕비도 아리땁고, 장공주도 아리땁고 그리고 인종 도수도, 모두가 경국지색이래.”

막상이 문득 돌아보더니 꼴깍 침을 삼켰다.

“그럼 네가 나 대신 친구에게 물어봐라. 도대체 얼마나 예쁜지……. 아니다, 너한테 그런 친구가 어디 있단 거지?”

리나는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깡충깡충 앞으로 뛰어갔다.

“천고(天蠱) 할머니, 저 좀 기다려주세요…….”

리나는 자신의 부족을 벗어나 천고부(部)의 수장인 등이 굽은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천고 할머니는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을 들어 맑은 눈으로 리나를 쳐다봤다.

“꼬마 아가씨, 무슨 일로 할머니를 찾아왔니?”

“할머니, 제 친구가……. 음, 친구의 친구가 요즘 이상한 일들을 겪었대요.”

리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적절한 어휘를 선택했다.

“그는 운이 아주 좋은데,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아요.”

리나가 천고족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묻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고신이 깊게 잠든 후에 그 정신은 심고(心蠱)로 변했고, 그의 기혈은 역고(力蠱), 그의 독은 독고(毒蠱), 그의 간은 약고(藥蠱), 그의 욕망은 욕고(欲蠱), 그의 눈은 천고, 그의 체액은 시고(尸蠱)로 변했다고 전해졌다.

이것이 바로 고족의 7개 부락의 유래였다. 그리고 고족에게는 한 가지 전설이 더 전해져왔는데, 고신이 회생하는 날에는 그 능력을 다 회수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러한 까닭에 고족에는 고신과 신불(*神佛: 신령과 부처)이 나란히 상고 시대에 기이한 짐승으로 회생하는 걸 바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고신의 눈을 대표하는 천고는 천지만물과 자연의 섭리를 관측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천고부는 역법(曆法)의 제정을 맡았고, 고족은 천고부의 지시에 따라 농사를 짓곤 했다.

이밖에도 천고부는 점괘, 관상 등의 비술(秘術)에도 능했다.

천고 할머니가 말했다.

“그건 분명 행운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일 것이야.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좋은 사람이겠구나.”

‘삼호는 좋은 사람인가? 아마도…….’

리나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운이란 은자를 줍는 거예요, 매일 은자를 줍는 게 다예요.”

그러나 금련 도사가 말하길, 그가 공덕을 닦은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은자를 줍는다고? 그게 무슨 운이란 말이냐. 꼬마 아가씨가 허튼소리를 하는군.”

천고부의 한 중년 남자가 크게 웃었다.

사방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는 대오의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 역고부의 여아는 정말 재미있군.’

“닥치거라!”

천고 할머니가 갑자기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녀의 굳어진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리나의 손을 움켜쥐고 힘을 주는 바람에, 리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네 그 친구는 어디 있는 것이냐? 빨리 말하거라, 빨리…….”

천고 할머니는 다급하게 캐물었다.

‘이건…….’

천고부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만 봤다. 그들은 이 여아의 우스갯소리가 천고 할머니를 어째서 이렇게까지 흥분하게 만든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막상이 까치발을 들고 멀리 쳐다보니, 앞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천고 할머니가 여동생의 손목을 잡고 큰소리치며 무언가를 묻고 있던 것이다.

역고부의 수장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력이 왕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보자.”

“천고 할머니, 무슨 일이십니까?”

리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장대한 기골에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 얼굴선이 굵은 중년 남성이 걸어들어왔다.

키가 족히 9척은 돼 보이는 그는 군계일학으로, 주변의 고족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있었고, 팔뚝은 리나의 허리보다도 굵었다.

그가 걸을 때면 눈빛이 날카롭고 사나워, 그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몸이 구부정한 천고 할머니는 이 남자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천고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살짝 끄덕였고, 이내 리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아, 말해보렴.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잖니.”

할머니는 조급해했다.

‘할머니가 왜 이러는 거지? 할머니도 삼호처럼 매일 은자를 줍고 싶어서 그런가?’

리나는 천고 할머니의 격한 반응이 좀 불쾌했다.

천고 할머니가 가려고 하지 않자, 부대도 멈춰 섰다. 천고부 정예들의 눈빛이 리나에게로 옮겨갔다. 다른 부락의 사람들도 이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모른 채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천고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천고부의 한 젊은이에게 말했다.

“가서 각 수장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비하라고 통지하거라. 자, 우리는 저쪽에 가서 얘기하자꾸나……. 용도(龍圖), 자네는 따라오면 안 되네.”

용도라 불리는 역고부의 수장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 천고 할머니에게 먼 곳으로 이끌려 가는 딸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다른 5개 부의 수장이 한데 모여들었다. 그들은 용도 곁에 서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멀어져 간 노인과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용도, 무슨 일인가?”

역고부 수장, 용도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천고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네.”

수장들이 일제히 뒤를 쳐다보았다.

“리나가 할머니께 우스갯소리를 했을 뿐인데, 할머니께서 이리 흥분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뭐라고 하던가?”

“리나의 친구가 매일 은자를 줍는다 했습니다.”

“…….”

* * *

천고 할머니는 횃불을 들고 한 그루의 나무 아래로 향했다. 이곳은 부대와 거리가 멀어, 뒤편으로 미세한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하늘에 걸린 초승달은 밤하늘에 순백색의 빛을 흩뿌렸고, 횃불은 천고 할머니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비쳤다. 그녀는 더 이상 초조해하거나 흥분하지 않았고, 차분한 상태였다.

“할머니에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얘기해보렴.”

리나는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제가 최근에 한 친구를 사귀었는데요, 그 친구의 친구가 영문을 모르겠으나, 항상 돈을 줍는다고 했어요. 이유를 몰라 고민스럽다고 하더라고요.”

천고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사실 확인에 나섰다.

“어떻게 은자를 줍는 거지? 얼마는 줍는다고 하더냐? 은자를 주운 것 외에 다른 특이한 점은 없다더냐? 일의 경중을 가리지 말고 내게 확실하게 얘기해주련.”

리나는 천진난만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건 저도 몰라요. 어쨌거나 친구의 친구 일이니까요. 하지만 삼…… 제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은자를 줍기만 하면 풍족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것 같았어요.”

리나는 호기심이 생겨 만물을 관측할 수 있고, 아는 것이 아주아주 많다는 천고 할머니에게 그저 생각 없이 한 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매일매일 은자를 줍는다는데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삼호가 대봉 경성에 있으니 그의 친구도 그곳에 있겠지…….’

리나는 확실치 않은 듯 답했다.

“아마도 대봉 경성에 있는 것 같아요.”

“대봉 경성?!”

천고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가능해. 그래선 안 돼. 대봉 경성에 있다는 건 불가능해……. 당치 않는 소리야…….”

천고 할머니는 흰 눈썹을 찌푸리며, 긴가민가하다가 놀라기를 반복했고 이에 따라 표정도 계속해서 바뀌었다.

“할머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리나는 자신이 상당히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해낸 것이다.

‘만약 단지 돈을 줍는 사소한 일이었다면, 천고 할머니가 외진 곳까지 나를 끌고 와 얘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이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황당하기도 했다. 대봉 경성에서 발생한 우스운 일이, 천고 할머니에게는 이렇게 진지하고 이렇게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니.

흡사 그녀가 얼떨결에 괜찮은 친구를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 천고 할머니와 오랜 세월 생이별하게 된 아이를 발견하게 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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