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야화(夜話)
허평지는 뇌를 거치고 얘기하지 않은 조카를 노려봤다.
“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숙부는 켕기지도 놀라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숙모 역시 의심하거나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표정의 심리학에 정통한 허칠안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사람이 가장 무방비 상태일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속마음과 가장 부합하는 법이었다.
허칠안은 자신이 숙부의 사생아라는 선택지를 제일 먼저 지웠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데에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릴 때 숙부의 동료가 집에 손님으로 온 적이 있는데 그때 허칠안을 가리키며 “얘가 자네 아들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허칠안을 가리키며 “자네 딸 정말 예쁘군.”이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냐고? 이는 허칠안과 허평지의 이목구비가 비슷하다는 걸 의미했다.
유전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둘은 혈연관계인 것이다.
“농담이잖아요. 저는 여태껏 낳아주신 부모님을 뵌 적도 없고, 숙부와 생긴 게 이렇게 닮았으니까요.”
허칠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참, 숙모는 제 어머니를 보신 적이 있나요?”
숙모가 대답했다.
“당연히 본 적 있지. 네 어미가 너를 임신했을 때, 내가 한동안 돌봐준 적이 있었단다. 네 어미는 참 부드러운 사람이었어, 너와는 다르게…….”
숙모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습관적으로 조카를 갈굴 뻔했네.’
“그럼 숙부 형님은요?”
허칠안은 고개를 숙이고 삶은 달걀을 먹으며, 곁눈질로 숙부를 관찰했다.
허평지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반응을 보이며 언짢아했다.
“네 아버지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네 조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형제 둘은 서로 목숨을 의지하며 자랐다. 네 아버지는 나보다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났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해관전역 때 목숨을 잃었어.”
허칠안은 더는 다른 걸 묻지 않고 얼른 끼니를 해결했다. 그리고 능라 비단 오백 필은 본채에 둔 채, 자신은 금괴가 가득 담긴 상자를 받쳐 들고 뜰로 돌아왔다.
‘황금을 집안에 두면 안전하지 않다. 오후에 야경꾼 관아에서 그렇게 많은 동료들이 목격했으니, 만일 악의라도 품고 몰래 기습하여 훔쳐 간다면 도리어 숙모와 동생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거야.
위연은 지종의 도사를 막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동안 허부 근처에 야경꾼을 파견해서 은밀히 보호하고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동시에 야경꾼을 위협할 수도 있어…….’
허칠안은 몸을 솟구쳐 높은 담을 뛰어넘었고, 상자를 지서 파편에 집어넣었다.
* * *
목욕을 마치고 향유를 바른 숙모가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고개를 기울인 채,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허평지는 멀지 않은 곳에 깔린 침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연기(練氣)를 토납했다.
“매일매일 그렇게 수련하는데, 당신이 수련에 성공한 걸 본 적이 없네요.”
숙모가 아름다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허평지는 아주 길게 숨을 내뱉더니 눈을 떴다. 비록 토납한 후에도 혈기왕성했으나, 눈빛 깊숙한 곳에는 오히려 암울함이 그득했다.
그는 일찍이 연기경 전봉에 이르렀으나, 아무리 수련해도 기기가 강해지지 않았다. 연신경으로 향하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당신, 만일 돌파하신다면……. 다음 경계에는 승진하실 수 있나요?”
숙모가 허리를 쭉 세우며 묻자 허평지는 답했다.
“그건 당연하오.”
숙모는 머리를 다 말린 후 수놓은 신발을 벗어버리고 침상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녀가 긴 두 다리를 꼬고, 베개를 껴안은 채 토로했다.
“허칠안 그 자식이 우쭐거리는 꼴이란. 능라 비단과 내성의 저택만 아니었어도 참지 않고 시원하게 욕을 퍼부어줄 텐데 말이에요……. 어느덧 다 컸네요.”
처음 남편의 손에서 그를 받았을 때는 젖먹이 고양이처럼 작기만 했던 것이 기억났다.
쿵쿵쿵!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어귀에서 허칠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부, 까먹고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어요.”
숙모는 깜짝 놀라 황급히 휘장을 내리고 이불 속으로 움츠렸다.
허평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서재로 오거라.”
“아닙니다. 숙부께서 나오세요. 문 앞에서 몇 마디 드리고 갈 겁니다.”
숙모는 이불을 끌어안고 휘장 뒤에 숨어 엿들으려 했는데 숙부와 조카 둘이 몇 마디 속닥속닥하는가 싶더니, 이내 남편이 금방 돌아와 문을 탁 닫았다.
“무슨 얘기 했어요? 저 애가 당신한테 몰래 비상금을 줬지요?”
숙모가 휘장 안에서 머리를 내밀고 허평지를 바라보았다.
허평지의 눈시울이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기에, 숙모는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나리?”
“드디어 희망이 생겼소…….”
허평지가 눈을 감고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연신경 희망.”
숙모는 붉은 입술을 꽉 오므렸다.
‘……칠안이 덕분에요?’
* * *
허칠안은 뜰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치 영감이 떠오른 것처럼, 문 앞에 서서 몇 초를 가만히 있더니 가볍게 밀어 열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탁자로 걸어가 초에 불을 붙였다. 가느다란 불꽃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피어 나와 방 안의 어둠을 몰아내고 등황색 빛을 한 겹 더했다.
침상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도사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도비(道簪)를 꽂고 있었지만,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올올이 늘어진 채였다.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인자해 보였다.
“오셨습니까.”
허칠안이 미소를 띠며 인사하자, 금련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화답했다.
“내가 왔도다.”
“오시지 말았어야 합니다.”
허칠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련도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 오늘 밀회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아니, 나는 그냥 드립친 건데. 구룡(*九龍: 중국의 무협 소설 작가)의 소설을 좀 읽으셔야겠어!’
허칠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도사께 농담한 겁니다.”
“상백 사건 조사는 어찌 되어 가는가?”
금련 도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사람은 누구나 괴벽이 있었으니 말이다. 천지회 구성원들도 모두 개성이 강했다.
허칠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건은 매우 복잡하고, 너무 많은 세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조사해낸 많은 단서는 다 뒤엉켜있고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여러 해 동안 경……, 아니 포졸로 근무했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문제는 맞닥뜨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cctv에 의지한단 말이야!’
그는 속으로 덧붙였다.
허칠안은 지금부터 수집한 단서와 자신의 추측 전부를 금련 도사에게 알릴 작정이었다.
천지회에 합류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금련 도사와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상대가 맹우(盟友)로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상백 사건은 금련 도사의 이익과는 관계가 없기도 했다.
‘음, 만약 그가 피난하러 경성으로 도망쳐 왔다는 건 단지 표면적인 이유였고, 사실상 상백 사건을 벌이려 포석을 깔기 위함이었다면? 조 현령을 멸구한 것도 그자라면, 그야말로 보스몹이다!’
그래도 허칠안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잃지 않았다. 현재 누구를 봐도 나쁜 놈 같고, 누구를 봐도 약삭빠른 인간 같았기 때문이다.
“자네 진북왕이 배후의 조종자라고 의심하는 것인가? 그가 북방의 요족과 동북의 무신교와 손을 잡고 황위 찬탈을 도모한다고? 그래서 상백을 폭발시키고 초대 감정을 풀어주었다?”
금련 도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허칠안이 반문했다.
“이 모든 건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초대 감정이든 혹은 진북왕이든 명확한 증거가 없지 않은가? 진북왕은 일 년 내내 변방을 지키고 있네. 빈승은 진북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가 반역을 도모했다고 경솔하게 단정 짓는 건 다소 독단적이야.
게다가 진북왕은 3품 무사이기 때문에 장차 2품과 맞서는 게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네. 그가 황제가 되길 원하는지와는 다른 문제야. 허허, 물론 예로부터 권력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빈승이 그가 반역을 꾀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것 역시 일종의 독단일세.”
금련 도사가 분석하며 말했다.
“2품과 맞서는 것과 황제가 되는 건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허칠안은 자신만의 생각이 확고한 상태였다.
“이는 본디 제 가설입니다.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으나 제가 증거를 확보하게 되면 진북왕이 배후의 검은손인지 아닌지는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다만, 제가 조사를 이어가기가 어렵습니다.”
허칠안이 한숨을 쉬었다.
“비록 원경제께서 저에게 이 사건을 맡기셨으나, 진북왕은 대군을 장악한 친왕이지 않습니까. 제가 버젓이 그의 관저를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사천감의 감정이 꾀병을 부리고 있는데, 제가 관성루에 가서 그를 문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죠. 정말 처리하기가 곤란합니다, 도사님.”
“원경제?”
금련 도사가 실눈을 뜨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허칠안을 바라봤다.
“여러 해를 보내왔지만, 조정의 앞잡이가 감히 그렇게 그를 칭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네.”
도사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기이함이 묻어났다. 그가 쯧쯧거리며 말했다.
“내가 뭔가를 간과한 것 같군.”
“무엇을 간과하셨습니까?”
허칠안이 무심결에 물었다.
“시주께서는 반역자가 될 상(相)이오.”
늙은 도사가 평가했다.
’무슨 헛소리야. 내게 억울한 누명 씌우지 마!’
허칠안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진실된 어조로 말했다.
“저는 폐하께 충성을 다 바칩니다.”
금련 도사도 더는 헐뜯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 깊이가 너무 깊습니다. 도사께서 제게 일러주실 것이 있습니까?”
허칠안은 진심을 다해 가르침을 청했다.
“자네가 천지회에서 유가 제자인 척할 때면 아주 영리해 보이지.”
금련 도사가 빈정대며 야유했다.
‘당신은 우리가 문자를 주고받으며 옥신각신하는 걸 보면서,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겠지…….’
허칠안은 속으로 이 약삭빠른 인간을 비아냥거렸다.
“빈승이 자네에게 분석을 해주겠네. 자네가 방금 얘기한 내용 중에 이상한 점이 몇 군데 있다네.”
“말씀하십시오.”
허칠안의 눈이 이내 반짝였다.
그가 도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하길 선택한 건, 상대의 지혜와 풍부한 경험 때문이었다.
약삭빠른 인간은 비록 사람들에게 멸시받지만, 만약 맹우가 된다면 그들은 종종 안정감을 주는 법이었다.
금련 도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첫 번째로 문제가 있는 부분은 감정이 수수방관한다는 것이네. 만일 상백에 억눌렸던 것이 사천감의 초대 감정이라면 가장 애가 타는 건 아마 감정일 텐데, 그는 조용하지 않은가? 음, 이 간사하고 음흉한 것이 진작에 관성루를 떠나 암암리에 행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겠군.”
허칠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감정과 현(現) 감정은 물과 기름처럼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스승은 진압됐는데, 제자는 마음 편히 감정 자리에 올라 사천감을 장악했으니, 스승과 제자 간의 얕디얕은 정이 깨진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감정 일품의 실력으로는 인종 도수도 막을 수 없었다.
“두 번째 문제가 있는 부분은 원경제일세. 상백 사건이 발생한 둘째 날, 그가 성 봉쇄령을 거두지 않았는가. 허허…….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후환(後患)을 남기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야.”
허칠안이 즉시 답했다.
“이 두 문제에 대해 저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저는 어쩌면 성문을 열어 적을 유인하고자 함이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음, 저는 감정과 원경제에게 접촉할 수도, 그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너무 높은 곳에 계시는 분들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거일세.”
금련 도사가 말했다.
“자네가 나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이뿐만이 아닐 테지. 육호와 상백 사건이 관련 있는가?”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항원 승려의 사제가 어쩌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아무런 까닭 없이 연락이 두절된 후에는, 이 추측에 대해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