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벼락부자
바깥 대청, 네 식구는 밥을 먹는 중이었다. 허영월은 오늘도 큰 오라버니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밥을 먹다가, 이상하게 허칠안이 보고 싶어져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큰 오라버니는 며칠 동안 제때 와서 밥을 먹은 적이 없네요.”
흔들리는 촛불에 그녀의 긴 속눈썹이 반짝였고, 수려하고 갸름한 얼굴은 난옥(暖玉)처럼 반질반질 윤이 났다.
뽀얗고 갸름한 얼굴, 청순하고 연약한 자태. 만약 교복을 입힌다면 모두의 심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학교 퀸카일 터였다.
“큰 오라버니가 먹을 음식을 좀 남겨야겠어요.”
허영음과 허영월은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허영음의 입장에선, 오라버니가 집에 없으니 그녀의 음식을 뺏어 먹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허영음은 짧고 굵은 손으로 젓가락을 집었다. 그녀에게는 젓가락질을 아주 빠르게 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며칠 뒤면 녹봉이 나오죠?”
숙모가 허평지를 쳐다봤다.
허평지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사실 이미 이번 달 녹봉을 다 까먹은바였다. 연말이 되면 동료들과 술 한잔 걸치고 선물을 주고받으니, 나가는 게 돈이지 않겠는가!
‘……어쨌든 칠안이 아직 장가간 건 아니니 우선 녹봉을 빌려서 당분간은 좀 때워야겠군.’
허평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연말이니 영월, 영음, 칠안, 신년에게 옷을 지어주어야 하는데, 은자가 또 부족해요.”
숙모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지난달 운록서원에 가기 전에는 집에 그래도 몇십 냥의 은자가 비축되어 있었는데 한 달이 지나니 텅텅 빈 채였다.
숙모는 그 자리에서 허평지와 얼굴을 붉히며, 허평지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실토하도록 종용했다.
“칠안과 신년을 걸고 말하겠소. 은자는 모두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 쓴 거지, 절대로 놀고먹는 데 쓴 게 아니오.”
숙모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허칠안은 밉상이었지만, 성격이 강직하여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고, 허신년은 지식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예의 바르고 착실하며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
“그래봤자 은자 몇 냥뿐이지 않소.”
허평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숙모는 그를 보며 말했다.
“저 운금(*云錦: 구름무늬를 수놓은 고급 비단) 한 필 사고 싶어요.”
허평지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현재 집안의 경제 사정이 1척(尺)에 1냥이나 하는 운금(*云錦: 구름무늬를 수놓은 고급 비단)을 살 수 있는 정도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숙모가 그에게 셈을 해 보이며 설명했다. 신년이 만약 춘시에 합격하게 되면 신분이 달라질 터였다. 그럼에도 늘 입던 그 도포를 입을 수는 노릇이었고, 아무리 진귀하다 해도 한 벌로는 턱도 없다고 말했다.
또 영월이도 시집갈 나이가 됐으니, 농 안의 치마도 다 새로 바꿀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허평지는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탁!
숙모가 젓가락으로 탁자를 치니 모두 일제히 쳐다봤다.
숙모는 다시 무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밥 먹자.”
허평지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세은 사건 때 탈탈 털어 살림살이를 모두 내놓지 않았소. 첫 달에 먹은 쌀과 밀가루도 동료에게 물어 빌린 거요. 부인, 내년까지만 기다려주시오. 내년엔 반드시 살 수 있을 테니.”
숙모는 붉어진 눈시울을 그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고개를 떨궜다.
* * *
“조심하시게, 조심……. 담에 부딪히지 말고. 더러워지면 이 늙은이가 자네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문지기 장씨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좋지 않은 허평지가 나와 눈살을 찌푸리며 보니, 저택의 하인들이 한 필 한 필 쌓여 있는 비단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문지기 장씨의 지휘하에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
숙모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창밖으로 화사하고 아름다운 비단이 옮겨지는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켜봤다.
“정말 예쁘다…….”
허영월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녹아도 눈을 크게 뜨고 침을 흘리며 바라봤다.
유독 허영음만이 변함없이 절개를 굳게 지키며, 음식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그만 얼굴을 그릇에 파묻고 있었는데, 음식으로 가득 찬 양 볼이 불룩했다.
“어, 어디서 온 것 들이냐?”
허평지가 멍한 표정으로 묻자, 문지기 장씨가 거친 천을 펼쳐 바닥에 깔고, 하인들에게 비단을 내려두라고 지시하면서 대답했다.
“큰 공자님께서 가져오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큰 공자님께 하사하신 것이라 합니다.”
‘폐하께서 하사하셨다? 상백 사건을 해결한 것인가?’
이는 허평지가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어도위 백호는 평소에 외성에서 근무하였기에 내성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상백 사건이 내성에서는 그 소문이 자자하나,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은 관련 정보를 접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연기경에 근 20년을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숙부는 마음이 암담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 울적함을 기쁨으로 날려 보냈다.
“칠안은?”
“문밖에 계십니다……. 폐하께서 모두 오백 필의 비단을 하사하셨습니다.”
문지기 장씨가 기뻐하며 말했다.
투두둑!
그때 숙모가 들고 있던 젓가락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오백 필……?’
숙모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이 견직물은 종류가 다양했다. 곱디고운 능라(*綾羅: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와 무늬 비단 등이 있었고, 그 짜임과 무늬가 정교했다. 숙모는 비단 점포를 자주 가는 편이라 눈썰미가 남달랐는데, 여기에 있는 그 어떠한 견직물들이건 점포에서 파는 값비싼 비단보다 얼마나 좋은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렇게 값비싸고 정교한 비단이 무려 오백 필이라니…….’
숙모는 뜻밖에 굴러들어온 행복에 머리가 아찔했다.
허영월은 물론, 모친만큼 감격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여자라면 모두 늘 옷에 애정을 쏟지 않던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언니가 한눈판 사이에 음식을 독차지한 허영음은 이 대열에 끼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니 말이다.
“내가 돕겠다!”
허평지는 앉아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한편 허칠안은 마차 옆에 서서, 송정풍과 상백 사건을 해결한 후 교방사에 놀러가자며 상의하고 있었다.
“교방사에는 스물네 명의 화기가 있지 않은가. 나는 부향 낭자만 만나보았지. 다음번엔 하나하나씩 찾아가야겠네.”
허칠안이 기대 섞인 어조로 말하자, 송정풍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네……. 부향 낭자와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닌가? 자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녀를 속신하는 것일세.”
“자네…….”
허칠안 역시 이상한 눈빛으로 송정풍을 쳐다보며, 왜 옛날 사람들은 늘 공공의 재산을 사사로운 데 쓰는 걸 즐기는지 납득할 수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음, 첩의 지위가 노비에 비하면 좀 높기는 하다만, 그들의 눈에는 기생집 처녀를 속신하는 건, 마치 후대(後代)의 남자가 말도 할 줄 모르고 밥도 먹을 줄 몰라 공기만 먹고 사는 여자친구를 사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기녀는 공기가 새지도 않을걸.
처와 첩은 다른 개념이야,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생집 처녀를 속신하는 건, 소개팅에서 외모가 출중하고 집안이 빵빵한 여자를 만났는데, 본인이 가정을 보살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삼관(*三觀: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일컬음)과 사상이 맞지 않아.’
허칠안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이 주제를 계속해서 끌어나가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숙부, 이것들은 옮기지 마세요.”
허칠안은 허평지가 나와서 일손을 돕는다는 말을 듣더니 얼른 소리쳤다.
숙부가 쳐다보자, 허칠안은 한 손으로 60근의 상자를 끌어다 두더니 말했다.
“이걸 옮기세요.”
허평지가 손을 내밀어 받았다. 꽤나 무거운 것 같아 열어봤는데…….
‘뭔데 이렇게 반짝여 내 눈을 멀게 한 거지?’
바깥 대청의 숙모는 예쁜 능라 비단에 홀딱 빠져선 여기도 만져보고, 저기도 만져보느라 바빴다. 그녀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허영월은 비단 위에 작은 손을 얹어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소녀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영월!”
숙모는 영월의 손을 쳐내며 언짢다는 듯 말했다.
“더러워지니 만지지 말거라.”
허영월은 볼멘소리를 했다.
“어머니가 뭣 때문에 기뻐하세요? 이것들은 폐하께서 큰 오라버니에게 하사하신 것이지 어머니 물건이 아니에요.”
치명타였다.
숙모는 점점 웃음을 잃어갔고,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경직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내가 그래도 칠안이에게 잘하잖니…….”
이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허영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잘하시죠. 큰 오라버니는 어머니가 키우신 밑 빠진 독이잖아요.”
“나쁜 계집애!”
숙모가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허영월이 비틀댔다.
이때, 모녀 둘은 허평지가 넋 나간 채 상자 하나를 받쳐 들고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숙모는 치맛자락을 들고 마중 나가 물었다.
“손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탁…… 탁…….
허평지가 상자를 열었다 다시 덮은 뒤, 숙모를 보며 말했다.
“눈이 멀었소?”
“멀었어요…….”
출가하지 않은 규방 아가씨가 지금은 어머니가 되어 아이 셋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지만, 숙모는 36년 인생에 이렇게 많은 은자, 아니, 황금은 본 적이 없었다.
허평지 또한 이렇게 많은 황금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 * *
“목이 너무 말라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느라 좋은 차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어요.”
“칠안이는 앉아 있으렴. 이 숙모가 우려주마.”
* * *
“삶은 달걀 먹고 싶어요.”
“숙모가 지금 바로 주방에 해달라고 시킬게.”
* * *
“우유는 없어요?”
“있지, 있고말고. 지금 바로 우유를 데워주마.”
* * *
허칠안은 식탁에 늠름하게 앉아 있었고, 평소에는 도도하던 숙모가 옆에서 정성스럽게 챙겨주고 있었다. 허칠안이 삶은 달걀을 먹고 싶으면 숙모가 어서 삶으라고 시켰고, 허칠안이 차를 마시고 싶으면 숙모가 우려주었고, 허칠안이 우유를 마시고 싶으면 숙모가 가져다준다고 했다. 숙모는 조카와의 앙금을 메우기 위해 애썼다.
“숙모, 너무 성의 없으시네요. 저는 숙모가 직접 해 준 달걀을 먹고 싶은 거라고요.”
허칠안이 흥흥거리며 말하자, 숙모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래, 숙모가 해줄게.”
삶은 달걀이 식탁에 올라왔고 허칠안은 먹으며 말했다.
“아이고, 옆 마당에 더러워진 옷들을 내던져놨는데 나처럼 이렇게 부모도 없는 재수 없는 놈은 스스로 빨 수밖에 없겠지…….”
……숙모가 이를 깨물며 말했다.
“칠안, 말을 섭섭하게 하는구나. 숙모는 너를 친자식처럼 생각한단다. 숙모가 빨아주마.”
‘기 좀 펴보자!’
허칠안은 마음이 탁 트이면서, 속에 담아뒀던 집념이 마침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숙부, 아니면 우리 이 저택을 팔고 내성에 대저택 한 채 사요.”
허칠안이 문득 제안했다.
그러자 숙모의 눈이 번뜩거리며 얼굴이 환해졌다.
‘저택을 판다……?’
허평지는 대청 내부의 장식품을 훑어보더니 갑자기 탄식했다.
“이 저택은 조상님께서 대대로 물려주신 건데 그렇게 팔자고? 나와 네 아버지는 모두 이 저택에서 자랐단다.”
“팔지 않으실 거면 말죠, 뭐. 은자 팔천 냥이면 내성에 더 넓은 저택을 사기에 충분해요.”
허칠안은 잔을 들어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숙부, 저 숙부와 다른 여자 사이의 사생아는 아니죠?”
“풉…….”
허평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숙였으나 허영음 얼굴에 술 한 모금을 내뿜고 말았다.
그의 본래 의도는 바닥에 내뿜는 것이었으나, 막내딸의 체구가 작아 하필 아이의 머리와 얼굴에 정통으로 뿜은 것이다.
허영음은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허영음은 꿋꿋하게 울지 않고 얼굴에 묻은 술을 혀로 핥아보다가는 맛이 없었는지 그제서야 ‘으앙’하고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