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변화
호숫가, 높은 단상.
원경제는 물가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고, 영룡은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높은 단상 가장자리를 베고 누운 채였다.
한 사람과 한 짐승이 오랫동안 교류하던 와중, 원경제는 분노에 차 옷소매를 뿌리치며 떠났다.
위연은 안색이 어두운 원경제를 보며 위로했다.
“폐하께서는 어찌 짐승 한 마리에게 화풀이를 하십니까.”
“흥, 이 개자식이 점점 더 짐을 존중하지 않고 있잖은가.”
원경제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짐이 얘기하는데 본체만체하고 있다니.”
원경제는 당연히 영룡이 갑자기 발광한 원인에 대해서도 묻지 못했다.
“영룡은 아무런 까닭 없이 발광할 일이 없네. 위연, 황성의 수비를 강화하라는 짐의 뜻을 전하거라. 야간 통행금지 후에 어떠한 자도 황성을 출입해서는 안 된다.”
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원경제는 한참을 묵묵히 걷다가 갑자기 말했다.
“방금 저 짐승은, 왜 갑자기 분노를 사그라트린 거지?”
위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있는 성질을 다 부렸던 것이 아닐까요.”
그는 몰래 다른 가정을 하긴 했으나, 너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허칠안. 지난번에 영룡이 아무런 조짐 없이 성질을 부렸을 때 회경 곁에 허칠안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허칠안이 근처에 있지 않았다.
영룡이 발광한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게 많은 시위들도 제어하지 못했는데, 하필 허칠안 앞에 가자 순둥순둥해졌지.’
허칠안의 배경은 위연도 조사해본 적이 있으나 이력이 깨끗하고 평범했으며 이상한 점이 없었다. 굳이 그를 영룡과 같이 엮으려면 좀 억지스러운 데가 있었다.
영룡이 별안간 안정을 되찾은 건 ‘성질을 다 발산했다’거나 ‘임안공주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로 설명이 가능했다.
‘아마 폐하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한 군주와 한 신하는 가마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거닐며 궁성을 향했다. 원경제가 문득 말했다.
“진북왕이 몇 해 동안 경성에 돌아오지 않고 있구나.”
위연이 눈을 깜박이며 웃었다.
“몇 해가 흘렀습니다.”
원경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봄 이후에 그를 불러들이거라. 짐도 보고 싶구나.”
* * *
허칠안은 내성의 널찍한 큰길로 마차를 몰았다. 마차 앞뒤에는 각각 무장한 병사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찻간 안에는 위연이 앉아 있었고, 허칠안은 위연을 떠보기로 했다.
“위 공, 그럼 영룡은 어찌 된 일입니까? 이렇게 위험한 흉수(凶獸)를 황성에서 기르다니, 사람이 다칠까 두렵지 않습니까?”
위연의 온화한 목소리가 찻간에서 되돌아왔다.
“영룡은 본래 온순하네. 황실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룡을 만지지만 않는다면,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네.”
“예외는 없나요?”
허칠안이 생각나는 대로 물으며, 차분한 말투를 구사하기 위해 애썼다.
잠시 후 위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외는 없네.”
“…….”
허칠안은 침묵하다가, 이내 또 물었다.
“위 공, 제가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긴 한데, 사건을 더욱 미궁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소직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말하거라.”
“소직이 청룡사에 가서 비밀을 하나 알게 됐습니다. 청룡사에 법호가 항혜라는 한 승려가 있었는데, 일 년도 더 전에 절에 자주 오던 참배자와 서로 흠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청룡사에 있던 기운을 차단할 수 있는 법기를 몰래 훔쳐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참배자가 바로 오래전에 실종된 평양군주입니다.”
찻간에서 위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일전에 보고할 때 말하지 않았느냐?”
‘먼저 장공주한테 찾아가 허세 부리고 싶었으니까요……. 아, 아니. 호감을 사려고 그랬지…….’
허칠안은 약간 진땀이 났지만, 애써 얼버무렸다.
“쓸모 있는 단서라는 확신이 들기 전에 위 공께 그릇된 정보를 보고드리게 될까 염려됐습니다. 장공주마마를 만나고 나서야 평양군주의 사랑의 도피가 훈귀와 문관들 사이의 투쟁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소직은 지금도 평양군주, 항혜 승려가 상백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감히 단정 짓지는 못합니다. 비록 금오위 백호 주적웅이 기운을 차단하는 법기를 휴대하고 있으나 이자는 이미 경성을 빠져나갔으니, 청룡사의 그 법기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위연은 답이 없었다.
마차는 야경꾼 관아에 들어섰다. 허칠안은 작은 나무 사다리를 챙겨, 위연을 맞이했다.
위연은 양손을 소매 속에 모으고, 별다른 표정 없이 허칠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따라 호기루에 가세.”
‘훈계하려는 건가?’
허칠안은 어쩔 수 없이 따라 올라갔다.
* * *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호기루에 들어왔다. 위연은 허칠안에게 차를 끓이라 분부했고, 자신은 요망청(瞭望廳)에 앉아 경치를 바라봤다.
잠시 후 허칠안은 차가 다 끓었다고 소리쳤다.
사실 물을 끓이고, 찻잎을 우려내는 것이라 이 과정은 간단했다.
위연은 탁자 가장자리로 걸어와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첫 잔은 먼저 따라서 버려야 하네. 바로 마시면 안 되지. 너무 써서 차의 단맛이 느껴지지 않아.”
‘지금 날 가르치는 거야?’
“소직이 무식쟁이라 경험이 없습니다…….”
허칠안은 머릿속으로 달 아저씨(*達叔: 중국 영화배우 오맹달의 별명)의 오만한 표정을 떠올리면서, 주성성(*週星星: 중국 영화배우 주성치의 별명)의 비굴한 미소를 내비쳤다.
툭……. 위연이 소매 속에서 비단함을 꺼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열어 보시게.”
허칠안은 그의 말에 따라 비단함을 열어봤다. 안에는 용안(龍眼) 크기의 투명한 등황색 단완(丹丸)이 있었고, 짙은 약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건 폐하께서 하사하신 금단 아닙니까.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고 기기를 증가시키지요. 국사께서 몇 달간 정제하셨고, 화로 하나만큼의 양밖에 없지 않습니까. 천금으로도 살 수 없지요.”
위연이 비단함을 덮고는, 손가락을 구부려 함을 툭툭 쳤다.
“자네 것이네.”
허칠안은 믿기 어려워 멍해졌다.
“이 물건은 내게 소용이 없네. 고품 무사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아. 고심 끝에 현재 가장 수련의 경지를 끌어올려야 할 사람이 자네라는 생각이 들었네.”
위연이 웃으며 말했다.
“본좌가 아무런 목표 없이 자네를 키우겠다는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닐세.”
“위연 공!”
허칠안의 얼굴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희열과 감격이 드러났다. 그는 감개무량한 나머지 명언 한 구절을 스치듯 떠올렸다.
<끝까지 핥다 보면,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
“자네 금단을 소화시키면, 기기가 중단전에 가득 찰 걸세. 그때가 되면 사전에 미리 관상(觀想)을 배워 원신을 끌어올려야 하네. 이렇게 하면, 자네 수련의 진도가 동일한 경계에 있는 무사들에 비해 적어도 삼분의 일 정도 빨라질 것이야.”
‘이것이 바로 큰 조직을 등에 업고, 권력가에게 빌붙는 이유구나. 내가 만약 혼자서 수련에 성공하려면, 숙부처럼 필사적으로 연기경에 머물러 있어야겠지…….’
다행히 그날 허칠안은 스스로 가장 옳은 선택을 했다.
구호와 육호가 마피아 게임을 하는 걸 알아차렸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하지 않고 묵묵히 위연을 찾아가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았던 것이다.
만약 이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빨리 위연의 총애와 신임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위연의 신임을 얻지 못한 채 총애만 받았다면, 그는 아마 공로를 쌓기 위해 개고생했어야 했을 테고, 지금처럼 금단을 선물 받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위 공, 연신경의 다음 품계가 동피철골인데, 이는 어떻게 수련해야 합니까?”
허칠안은 마음을 다해 가르침을 청했다.
“자네가 연신경 전봉(煉神境 巓峰)에 이르면, 기혈과 원신이 한데 어우러질 것이네. 이때 신체와 정신은 환골탈태를 할 한 번의 기회를 맞이할 것이야. 환골탈태 기간에는 마치 대장장이가 쇠를 단련하는 것처럼, 곤봉으로 신체의 모든 부위를 두드려 불순물을 내보내고, 강하게 단련시켜야 하네.”
‘신체의 모든 부위를 두드린다고?’
허칠안은 머릿속에 온통 의구심과 근심을 가득 채운 채 어리둥절해했다. 위연이 허허 웃으며 덧붙였다.
“그건 고법(古法)이긴 하네. 시대가 변했지. 현재는 무사가 신체를 단련할 때 약욕(藥浴)을 사용하지.”
허칠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선, 계속해서 가르침을 청했다.
“소직 자료를 열람할 때 5품 화경경에 관한 묘사를 봤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이러했습니다. 신체의 모든 부위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을 팔처럼 혹사시켜 다시 초연하게 홀로 선다.”
‘이 묘사는 허튼소리다. 신체는 그 하나가 온전한 것이며 그 자체에 생명이 있다. 모든 부위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말은 어디서 온 건데?’
허칠안은 황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위연은 그를 관찰하다가 허칠안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감지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구체적인 수련 방법은 자네가 경계에 이르면 얘기해주겠네. 지금은 아는 것이 많을수록 딴생각을 하기가 더 쉽지. 공연히 걱정하지 마시게.
자, 자네가 여기서 단약(丹葯)을 복용하면 이 금단이 자네를 도와 중단전을 가득 채울 수 있는지 없는지, 내가 한번 보겠네. 결코 모든 자가 이런 효능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네. 나는 자네의 자질에 근거하여 판단한 것이나 성공 여부는 봐야 알 수 있겠지.”
위연은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는 듯했다.
허칠안은 비단함을 열어 금단을 복용했다.
그는 힘껏 단환을 씹어 배 속으로 삼켰다. 몇 초 후, 위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불을 지피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화염이 위를 뜨겁게 달구었고,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슬슬 넘어서고 있었다.
감히 태만할 수 없었기에 허칠안은 가부좌를 틀고 토납했다. 온 하늘이 빙빙 돌았고, 열에너지를 체내에서 순환시키고 있었다.
후후…….
널찍한 다실 내에 길고 힘찬 호흡이 울려 퍼지는 것이, 마치 커다란 짐승의 호흡 같았다.
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칠안을 조용히 관찰했다.
한 시간 뒤, 허칠안은 위의 열에너지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에 기기가 충만하여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최고의 몸 상태에 다다른 듯했다.
‘설령 상대가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법기가 있다 해도, 지금의 나는 단칼에 연신경의 동라를 벨 수 있다…….’
허칠안이 자신의 변화에 기쁨을 느꼈다.
“좋아. 역시 자네는 보기 드문 무사 천재야.”
위연이 칭찬하며 말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미리 준비한 얇은 책자 한 권과 두루마리 그림 한 장을 서재에서 꺼내, 허칠안에게 건네주었다.
“책자에는 관상할 때의 법문(法門)이 기록되어 있으니 따라 하며 익히게. 이 두루마리 그림은 바로 자네가 관상해야 할 물건일세.”
허칠안이 곧장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보았다. 그림에는 머리로 하늘을 이고, 발로 땅을 밟고 있는 거인이 그려져 있었고, 그 거인의 표정과 자태, 근육결의 미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놀란 부분은 하늘을 찌를 듯하며, 발로 지옥을 디디고 있는 사납고 포악한 그 기세였다. 마치 그 무엇도 거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