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121화 (121/712)

121화. 두려움

탁탁…….

영룡은 방대한 몸뚱이로 뭍에 올라와 개잎갈나무, 측백나무를 들이받아 두 동강을 냈다. 발광하며 제멋대로 활개를 쳤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땅에 깔린 푸른 벽돌을 마구 긁어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아바마마!”

“폐하.”

태자와 위연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원경제는 손짓으로, 자신은 괜찮다고 알렸다.

“아바마마, 영룡이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태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영룡이 이렇게 통제가 안 된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룡은 본래 성격이 온순했다. 자신과 친밀한 황실의 몇몇 형제자매를 대할 때도 아주 온화했고, 지금껏 폭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영룡이 도망치는구나!”

원경제가 침울한 얼굴을 하더니 침착한 말투로 답했다.

‘영룡이 도망치고 있다고? 어째서 아바마마께서는 도망이라는 두 글자로 형용하는 거지? 영룡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뭐 때문에 겁을 먹는 건데? 하지만 황실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을까?’

태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원경제는 그에게 물어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저 시위에게 말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 영룡이 도망친 방향으로 추격해갔다.

영룡은 황실 정통의 상징으로서, 상서로운 기운을 탄토(呑吐)하며 도를 닦는 영수였다. 잃어버리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 * *

원경제는 영룡의 발톱 자국을 따라 추적했다. 시위들은 그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까 봐 양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경제는 화살탑에 있는 영룡을 보았다. 영룡은 날카롭고 단단한 발톱으로 탑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발톱은 벽돌 사이에 깊이 박혔다.

영룡은 목덜미 근육을 팽창시키며 처절하게 포효했고, 내려오라고 위협하며 자신을 가로막으려는 궁정 고수를 꼬리로 후려쳐 공격했다.

쌍방은 대치 상태에 접어들었다. 영룡의 비늘은 아주 단단하여 검으로는 상처를 내기 어려웠고, 발광하기 시작하면 그 힘이 만만치 않았다. 시위대는 영룡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됐으나 맨손으로 제압하긴 어려워 격추전을 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들이 영룡을 속박할 수 있는 법기를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쿵쾅쾅……. 화살탑이 용 꼬리의 후려침으로 계속해서 갈라지더니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십여 명의 시위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장면을 본 원경제는 한시름 놓았고, 황실의 영수를 다치게 하지 말라고 일깨울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영룡이 힘차게 일어나더니 반항하는 것이 보였다. 몸 위에 있던 시위들을 떨군 영룡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어떤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원경제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됐다.

그는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딸을 보았다. 그가 가장 총애하는 임안공주였다!

그리고 이 순간 임안 곁에는 궁녀 둘과 야경꾼 차복을 입은 동라 하나가 보였다.

“임안을 보호해라!”

원경제가 다급히 소리쳤다.

* * *

‘저 미친놈 성격이 어디가 온순하다는 거야?’

허칠안은 이런 일을 맞닥뜨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와 둘째 공주는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허칠안은 전생에 갈고닦은 대화 기술과 처세술 그리고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말로 둘째 공주를 웃겨주어 친밀함을 쌓아갔다.

그녀를 영룡이 있는 호수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그녀와 한바탕 놀다가 자신은 다시 돌아가 사건을 처리할 심산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 일에 휘말리게 됐다니…….’

허칠안은 방금 “공주마마 이곳은 위험하오니, 소직이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 영룡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달려든 것이었다.

이 영수는 힘이 매우 셌다. 실력으로는 절대 육품 무사에 뒤지지 않았다. 허칠안은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돌려 둘째 공주를 보았다. 둘째 공주는 놀라서 굳은 상태였다.

동글반반하고 어여쁜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눈빛은 굳었으며, 놀란 나머지 사고력을 잃어버린 듯했다.

허칠안이 곁눈질로 한 바퀴 훑어보았다. 날아드는 궁정 고수들, 말을 채찍질하며 광분한 상태로 오고 있는 원경제와, 영룡의 흑단추 같은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 영룡의 눈빛에서는 시야를 자극하는 특이한 광채가 보였다.

마치 두려움에 떨던 아이가 부모를 만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 아빠 품에 뛰어드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응? 이놈이 내가 온 걸 감지하고 일부러 나한테 돌진한 건 아니겠지?’

이 순간 허칠안은 영룡의 눈빛을 읽었다. 그놈은 지혜로운 영수였다.

영룡의 눈에는 기쁨 외에 두려움도 아직 남아 있었는데, 시간은 그가 깊은 생각을 하게끔 허락해주지 않았다.

지면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영룡은 눈 깜짝할 사이 허칠안에게 돌진하려 했다.

허칠안은 즉시 판단을 내렸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한 발자국 옮겼고, 임안공주의 앞을 가로막아 그녀에게 듬직한 뒷모습을 보였다.

허칠안은 한 손으로 칼자루를 누르고는 두 무릎을 약간 구부렸다. 모든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시 힘을 비축한 뒤에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쨍……! 칼집에서 칼을 빼는 맑은 소리와 함께 짙은 금색의 한 줄기 실금이 번쩍이더니, 몸 앞쪽에 세로로 3장(약 9m) 길이에 너비는 두 손가락 정도인 깊은 칼자국이 났다.

그러자 충격적인 장면이 나타났다. 미쳐 날뛰던 영룡이 홀연히 몸을 가누더니, 발톱 네 개를 구부려 지면을 마구 갈아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뜻밖에도, 정말 칼자국 앞에서 멈춰선 채였다.

‘감히 저 경계로 넘어오지 못하는 건가?’

이 장면은 임안공주의 마음속에 아주 깊게 각인됐고, 원경제와 위연 그리고 태자의 눈에도 들었다.

영룡은 땅에 엎드리더니, 조금은 애틋하게 소리를 질렀다.

허칠안은 가뿐하게 영룡의 기분을 읽어냈다. 영룡은 도망치라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같이 도망치자고 하는 중이었다.

‘영룡은 마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처럼 초조해하고, 두려워한다……. 내 앞에서 많이 침착해지고 안정을 찾았지만, 공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보고 자기를 데리고 같이 도망치거나 자기가 나를 데리고 도망치겠다고 하다니.’

허칠안은 속으로 계속 추측해나가다 작게 중얼거렸다.

“겁내지 마, 내가 있잖아.”

둘째 공주는 허칠안이 자신에게 말한 줄 알고 순식간에 마음에 안정을 찾았다.

허칠안의 말을 들은 영룡은 역시나 더는 초조해하지 않았고 의기소침하게 울부짖었다.

이때, 시위 한 무리가 드디어 도착했고, 힘을 합쳐 어두운 금색의 큰 그물을 쳤다.

솩!

큰 그물이 펼쳐지면서, 몸길이가 3미터에 달하는 기이한 짐승을 덮쳤다.

다그닥다그닥……. 원경제가 말을 타고 와 임안공주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아끼는 둘째 공주가 확실히 별 탈이 없는 걸 알고는 한숨 돌렸다.

“아바마마…….”

임안공주가 작은 입을 오므리며, 말 곁으로 뛰어가 원경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원경제에게는 이 수법이 가장 잘 먹혔다. 그는 그녀에게 온화하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어서, 오십이 넘었어도 여전히 흑발인 황제가 허칠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소직, 폐하를 뵌 적이 있사옵니다.”

허칠안은 몸을 굽히고 읍했다.

대봉 왕조에는 장점이 있었다. 특수한 장소를 제외하고선 평소에 황제와 마주치면 인사를 올리기만 하면 될 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할 필요는 없었다.

원경제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잘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폐하께 아룁니다. 소직 허칠안이라 합니다.”

원경제는 잠시 멍해졌다. 재차 살펴보니 의외였다.

“네가 바로 허칠안인가?”

“그렇습니다!”

허칠안은 대답한 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원경제를 향해 설명했다.

“소직 사건을 조사할 때, 몇 가지 난제에 봉착하여 장공주마마께 가르침을 청하러 특별히 입궁했습니다.”

원경제는 캐묻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허칠안이 손에 쥔 검에 햇빛이 내리쬐었다.

“검을 짐에게 보여주거라.”

허칠안은 흑금장도를 두 손으로 받쳤다.

시위가 앞으로 나서 받아 원경제에게 전했다. 원경제는 자세히 살펴보더니 찬탄했다.

“좋은 검이구나!”

위연이 걸어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감정이 선물한 것입니다.”

‘감정?’

원경제는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아마도 감정이 이 보검(寶劍)을 일개 동라에게 선물한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 듯했다.

“폐하, 허칠안은 연금술에 정통하여 사천감의 술사와도 친분이 두텁습니다. 소신이 한 번은, 그가 연금술사에게 수업을 하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위연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허칠안은 원경제의 눈가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원경제는 그 기색을 빠르게 거두고는 나이 든 황제의 웃음을 보였다.

“생각났네. 세은 사건 때 자네가 연금술을 보인 적이 있지.”

원경제는 검을 시위에게 전달해 허칠안에게 돌려주게 했다.

‘위연이 나를 도와 유능한 신하 이미지를 구축해 내 중요성을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무슨 위연이야, 위연 아버지!’

허칠안의 가슴이 좀 뭉클해졌다.

임안공주는 황제의 소매를 흔들며 살갑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마마, 허칠안이 저를 구했으니 그에게 상을 내리셔야지요.”

“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원경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허칠안을 응시하며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야경꾼 허칠안, 임안공주를 구한 공을 높이 사 황금 천 냥과 비단 오백 필을 하사하겠노라.”

“아바마마!”

임안공주는 그런 상을 원치 않았고, 허칠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방금 소녀의 생명을 구했으니 소녀, 그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따라서 소녀 임안, 그의 죽을죄를 사해주시길 청하는 바이옵니다.”

원경제는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허칠안을 바라봤다. 눈썹을 낮게 드리우고 눈을 내리깐 온순한 모습의 그를 본 원경제는 날카로움을 좀 거두고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짐이 이미 그에게 공을 세우면 죄를 면하기로 허락하지 않았느냐. 상백 사건을 해결하면 자연스레 죽을죄를 면할 것이다. 천자의 말을 어찌 중도에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임안은 굴하지 않고, 큰소리를 치며 말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죽으러 갈 일만 남는 것이 아니옵니까? 아바마마, 그에게 황금 천 냥을 하사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원경제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때가 되면 짐이 알아서 상황을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다.”

그는 본래 허칠안의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믿는 구석이 생겨 사건 조사를 지체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덧붙여 말했다.

“기한은 여전히 보름이다. 네가 만약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면, 짐이 당연히 네 죄를 사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설령 임안이 사정하여 짐이 너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변방으로 유배를 보낼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감사합니다, 폐하!”

허칠안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임안공주가 자신을 향해 익살스럽게 눈을 찡긋하는 걸 보고는 보조개를 꽃처럼 피우며 웃었다.

‘이 투자 대박이다. 설령 마지막에 상백 사건 배후의 주모자를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내가 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유배당하는 거 아닌가. 하, 유배쯤이야 뭐. 위연, 임안, 회경 세 사람의 노예가 되니 근심 걱정이 싹 사라지는구나.’

원경제는 분수에 만족하며 자기 본분을 지키는, 믿는 구석이 있어 두려움을 모르는 영룡을 쳐다보더니,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외쳤다.

“이 짐승을 호수로 되돌려 보내거라.”

영룡이 원경제를 쳐다보더니 발톱으로 몸을 받치고 원경제를 향해 매섭게 킁킁거렸다.

“알겠다. 네 스스로 꺼지거라.”

원경제는 욕을 했다.

시위들은 큰 그물을 치웠고 역시나 영룡은 혼자 유유히 돌아갔다.

원경제는 둘째 공주를 살뜰히 위로한 뒤 말을 타고 영룡의 뒤를 따라갔다.

허칠안은 말없이 원경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임안공주가 나를 위해 사정할 때,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어……. 내가 임안을 유혹해 꾀어냈다고 생각하는 건가?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 원경제는 확실히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야. 하긴, 장수를 갈망하는 황제라면 권력에도 강렬한 갈망을 지니고 있겠지.

정말 피곤하다 이렇게 권모술수가 능한 자 앞에서는 아예 수작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아. 아마 눈빛 한 번, 표정 변화 한 번에 내 속셈이 무엇인지 들킬 거야……. 음, 내 연기가 그래도 괜찮았나 보군. 황송해하는 표정 연기가 나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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