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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119화 (119/712)

119화. 나와 임안 중에 한 명만 선택할 수 있다

회경 공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고, 대청은 침묵에 잠겼다. 이 적막을 깨며,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양은 예왕(譽王)의 적녀(嫡女)이자 본 공주의 사촌 동생이기도 해. 아마 내 셋째 오라버니를 본 적이 있을 거다. 그는 여태까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며, 황실의 다른 자손들과는 자신이 다르다고 여겼어. 셋째 오라버니의 계몽 은사가 예왕숙(譽王叔)이다.

예왕숙은 박학다식한 지식인으로, 일찍이 장진 대유에게 학문을 전수 받고, 병법에 정통하여 병부 상서까지 관직에 올랐지.

심지어는 그가 장차 내각에 들어가 재상(*宰相: 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을 놓고 각축전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지.”

‘이는 불가능해…….’

허칠안은 믿지 않았다.

‘내각이 지식인이라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란 말인가? 게다가 재상의 권력은 위연보다도 큰데, 원경제가 마음 놓고 친왕에게 재상 자리를 맡겼을까.’

하지만 허칠안은 자신의 역사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조당의 정세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지라 그 자리에서 반박하지는 못했다.

“예왕숙 배후에는 훈귀 집단이 있어. 예전에도 훈귀의 신분으로 내각을 장악하는 것과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 게다가 한 번뿐이 아니었네.”

회경 공주는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설명했다.

“대봉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위를 이어오는 건, 훈귀가 점차 조당의 변두리로 밀려나 재상의 자리를 놓고 각축할 능력이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예왕이 훈귀 집단에서 내세우는 앞잡이라는 건가? 배후에 문관 집단과 훈귀 집단의 투쟁이 연관됐단 말인가?’

허칠안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회경 공주는 계속해서 말했다.

“예왕비는 재주가 아주 많은 재녀였지만, 안타깝게도 미인박명했고, 예왕숙에게 딸 하나만을 남겼어. 예왕숙은 정이 깊은 사람이라 지금까지도 왕비를 따로 들이지 않고, 죽은 처가 남긴 아이를 보물처럼 대했지.

그런데 일 년도 더 전에 평양이 갑자기 실종된 거다. 당시 아바마마께서는 금군을 출동시켜 온 성을 뒤져 찾았고, 사천감의 술사도 절반 이상이 출동했지만 평양을 찾지 못했다.

이 일은 예왕에게 큰 충격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에 눕게 됐지. 우울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 병이 된 거야. 마음의 병은 고치기가 어려운지라 사천감의 술사들도 속수무책이었어.”

허칠안은 과일을 먹으며, 애써 이 충격적인 소식을 소화하고 있었다.

‘금군이 온 성을 뒤지고, 사천감 술사가 협력했음에도 여전히 평양군주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니……. 그래서 기운을 감출 그 법기가 필요했던 거구나. 그렇지 않으면 평양군주를 데리고 경성 관내를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테니. 어쩐지, 항혜가 법기를 훔치려 했던 게 이러한 연유였구나.’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각자 생각했다. 한참 뒤에, 회경 공주가 탄식했다.

“너는 계속 조사하도록 해라. 만약 성가신 일이나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장애물을 만나거든 얼마든지 나를 찾아오고.”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듣자 하니 어제 임안이 너를 찾았다던데?”

허칠안은 공주마마의 눈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말은 마치 “어제 전 여친이 찾아왔다며?”처럼 들렸다.

허칠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임안공주마마께서 제게 한사코 그녀와 손을 잡고 자신을 위해 일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게 요패도 하사하셨지요.”

공주마마는 무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녀를 거절하지 않았느냐?”

허칠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임안공주마마께서 제가 응하지 않으면, 제가 자신을 조롱한다고 소리 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이유라면 충분하지? 너희 황실 자매 사이의 갈등이잖아. 나는 미미한 인간일 뿐인데, 나한테 무슨 방법이 있겠니.’

허칠안은 장공주가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너그럽고 자상하며 성숙한 여자인 줄 알았다. 이런 작은 일로 자신을 노려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결론은…….

장공주는 인정사정없이 쏘아붙였다.

“네 총명함으로는, 그런 위협은 허세만 가득하고 실속이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이 여인의 성격, 외모만이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는 게 아니라 속은 포악스럽기 그지없구나…….’

허칠안은 의아한 눈으로 장공주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소직 이해했습니다. 소직이 지금 바로 임안공주마마께 옥패를 돌려드리고 왕래를 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마마께만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오늘부로 여우와 인연을 끊고, 너를 위해서만 일한다고 맹세할게!’

장공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떠들썩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둘째 공주마마, 공주마마께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꺼져!”

날카롭게 빽빽거리는 소리와 잡아끄는 소리 속에, 화사한 붉은 치마를 입고 있는 형체가 대청으로 뛰어들었다. 들어온 임안공주가 대청 안을 훑어보니, 역시나 자신의 충견이 구태의연하게 전 주인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갑자기 분노가 차오른 그녀는 미간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천한 개새끼가 감히 본 공주를 배반하다니. 네가 누군지 잊은 게냐?”

허칠안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장공주를 바라보며 그녀가 자신을 대신해 일을 해결해주기를 바랐다.

한데, 장공주의 뱃속에 이런 사악함이 있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 그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은 마치 “한 명만 선택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허칠안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둘째 공주의 옥패를 받을 때, 언젠가 이런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긴 했다. 단지 이렇게 빨리 업보를 치르게 될지는 생각지도 못했을 뿐이었다.

만약 전생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기껏해야 한 마디 하면 됐다.

“객관식은 어린 애나 푸는 거지!”

많아봤자 싸대기 두 대만 맞으면 그만이었다.

‘이 고대에 와서는 그릇만큼 큰 크기의 흉터와 맞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소직 상백 사건과 관련하여 장공주마마께 가르침을 청할 일이 있어 온 것입니다.”

허칠안은 몸을 돌려 둘째 공주를 향해 읍하며, 자신에게 공적인 일이 있음을 넌지시 알렸다.

하지만 그는 둘째 공주를 과대평가했거나 혹은 그녀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허리에 대고 냉랭하게 말했다.

“나한테 가르침을 청할 줄은 모르는 것이냐!”

회경 공주는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코웃음을 쳤다.

“임안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감이지.”

바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반어법이었다.

‘장공주가 나를 대신해 화력을 이어받았군…….’

허칠안은 한시름 놓았다.

‘너희 둘이 싸워. 나는 투명인간 취급해 주면 좋겠어.’

둘째 공주와 장공주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어릴 적 싸움부터 지금의 암투극까지, 모든 면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곤 했다.

“회경, 허칠안은 내 사람이야. 그는 내 요패를 받았고 나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둘째 공주는 여기까지 말하더니 차갑게 웃었다.

“양금택목(*良禽擇木: 훌륭한 사람은 좋은 군주를 가려서 섬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누가 사람들을 인색하게 만드는 거야? 말이 빨리 달리길 바라면서, 말에게 풀을 주지 않잖아. 내가 훨씬 통이 크다고.”

장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허칠안의 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으로 허칠안을 매섭게 노려본 뒤, 이어서 주권을 선포했다.

“네가 내 사람을 쓰고 싶다면, 가능은 해, 내가 먼저 허락해야겠지만. 오늘은 본 공주의 기분이 좋지 않으니 네가 내 사람을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회경 공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빙그레 웃으며 침묵했다. 자신감이 충만한 모습이었다.

둘째 공주는 그녀의 이런 태도를 가장 혐오했다. 둘째 공주는 흑백이 분명한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쳐다본 뒤 허칠안에게 말했다.

“이래도 본 공주와 가지 않을 게냐!”

허칠안은 움직이지 않았고, 둘째 공주도 장공주도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두 분 전하, 소직은 야경꾼으로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 몸입니다.”

“닥쳐!”

두 공주가 동시에 소리쳤다.

“……”

허칠안은 두 황녀 간의 갈등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방적인 게 아니라 얄미운 둘째 공주는 시비 거는 걸 즐겼고, 강하고 독한 장공주는 모든 도전을 환영했다.

그는 단지 중간에 낀 비천한 딸랑이였다.

이는 흡사 두 아기씨가 장난감을 빼앗아, 장난감한테 누구와 함께 할 건지 선택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허칠안은 두 공주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임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공주마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소직 장공주마마와 서로 논의해야 할 공무가 있사옵니다.”

아주 완곡한 어조로 얘기했지만, 사실 그는 이미 태도를 비친 것이었다. 그는 장공주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었다.

둘째 공주는 갑자기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머금더니 허칠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떠났다.

그녀는 또 패배하고 말았다. 또 한 번 회경 앞에서 체면을 깎인 것이다. 상대는 목을 빳빳이 세우고 앉아서, 일개 동라가 자신의 체면을 깎는 것을 지켜본 꼴이었다.

자존심이 세고 지기 싫어하는 임안공주는 여태껏 이렇게 억울했던 적이 없었고, 또 이렇게 좌절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가버렸다.

허칠안은 둘째 공주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했고, 차분한 어조로 장공주와 몇 마디 나누다가 문득 가슴을 어루만지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옥패를 둘째 공주마마께 돌려드리지 못했네요. 그럼 소직 먼저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장공주는 기분이 좋아, 고운 목소리로 그러라고 답했다.

* * *

허칠안은 침착하게 아원에서 나와, 문 앞의 시위를 붙들고 말했다.

“둘째 공주마마는 어디로 가셨나?”

시위는 그에게 방향을 알려주었다.

허칠안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다.

몇 분 후, 그는 둘째 공주의 타는 듯이 붉은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궁녀 두 명을 거느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가녀린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둘째 공주마마, 멈춰주십시오!”

허칠안이 쫓아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임안공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더 빠르게 걸었다.

허칠안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임안공주의 앞을 막아섰으나 입을 떼지는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마마 우십니까?”

‘일을 벌이고 감당 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거 아니야……?’

임안공주는 즉시 고개를 돌려, 아리따운 옆얼굴을 보이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 천한 놈! 네가 본 공주를 따라와서 뭘 할 것이냐? 감히 반역이라도 도모하고 싶으신가?”

그녀의 눈가는 붓고 빨개진 채였고 새하얀 볼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방금까지 억울해서 울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도화안이 두드러져 보여 더욱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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