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장공주의 부름 (2)
어화원(禦花園).
정자의 네 귀퉁이에는 찬바람을 막아 주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달궈진 숯불 덕에 따뜻한 열기로 가득했다.
도포를 입은 원경제와 청의를 입은 위연이 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원경제는 황제지만 용포(龍袍)를 즐겨 입지는 않았다.
다른 한 명은 백관을 감찰하는 권신(權臣)이었으나, 늘 청의를 입고 있었다.
자신의 신념이 투철한 두 늙다리에 비하면, 청년 태자 전하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차려입고 원경제 곁에 공손하게 서 있었다.
“어제 국사가 금단(金丹)을 제련했으니, 짐이 잠시 후에 사람을 시켜 자네에게 한 알 보내겠노라.”
원경제가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보더니, 마치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흑 돌 세 개를 집어가고선 웃으며 말했다.
“금단 한 개와 바둑알 세 개를 맞바꾸는 건 적당하지 않느냐.”
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지 않습니다.”
몇 수를 더 두던 위연이 원경제의 흰 돌 여섯 알을 집어간 후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진영이 좀 어지러운 듯하여 소신이 대신해 깨끗이 정리해드렸습니다.”
원경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요 몇 년간 짐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건, 역시나 위연 자네일세. 만약 자네가 그해 궁에 들어오지 않고 과거에 합격하여 임관했다면, 제국에 바느질 장인이 한 명 더 늘었을 테고, 짐도 이런 자질구레한 일로 정신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하네.”
위연의 표정은 잠시 굳었다 이내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가 조금 웃으며 말했다.
“소신 지금도 폐하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건 같지 않습니까?”
태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바둑판을 응시했다.
아바마마와 위 공의 불꽃 튀는 바둑 대결이 대단하고 치열해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음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개 속에서 보이는 꽃처럼, 알아챌 듯 말 듯 한 느낌이었다.
정자에 앉아 있는 이 두 사람 중 한 명은, 이십 년 동안 마음을 집중하여 도를 닦아 여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왕의 마음 씀씀이는 불같이 순결했다.
한 사람은 환관 출신으로 야경꾼 관아를 장악하고 문무를 겸비하여, 무수한 지식인들을 부끄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반드시 음미해야 해. 깊이 음미해야 해.’
태자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쯤, 또다시 원경제의 말이 들려왔다.
“상백 사건 조사는 어떻게 돼가고 있느냐? 부아와 형부에서 제출한 권종은 뒤죽박죽이더구나. 짐의 기억에 야경꾼 관아의 수석 수사관이 죄를 지은 동라, 허씨가 맞는가?”
“허칠안!”
위연이 정확하고 또렷하게 발음한 뒤, 표정을 바로 고쳤다.
원경제는 일개 동라의 이름이 무엇인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위연을 쳐다봤다. 이 대환관이 이렇게 정중한 어조로 일개 동라의 이름을 말한다는 게 좀 의외였다.
“키워볼 만한 인재입니다. 기관과 주적웅의 사건도 그자가 밝혀낸 것이고, 화약의 출처 역시 그자가 밝힌 것입니다.”
원경제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바라봤고, 대국을 시작하며 말했다.
“이렇게 오랜 시일이 지났는데, 그쪽에 어떠한 진척이 있는지 유 공공에게 들었다. 그놈이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와 기록하는 환관이 그놈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
“정말 뭔가를 발견하긴 했습니다.”
위연은 이 화제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태강현의 조 현령이 어제 새벽에 부아의 지하 감옥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원경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 부윤이 이미 그 일을 아뢰었네.”
위연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인은 자연사입니다. 외상도 없고, 약물에 중독된 것도 아니며 더욱이 질식 등의 다른 외적인 수단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문의 음신이거나 동북의 주술사 짓입니다.”
투둑……. 원경제 손가락 끝의 흰 돌이 힘없이 바둑판에 떨어졌다.
검은 머리카락이 무성하고 눈가에 잔주름 정도만 있는 원경제는, 소리 없이 수 초를 침묵했다. 그는 이내 웃으면서 떨어진 바둑알을 주웠고, 바둑알 통에 찔러 넣으며 말했다.
“이렇게 여러 해를 두었어도, 한 번도 이길 수 있던 적이 없구려. 재미가 없어.”
위연이 몸을 일으켜 읍했다.
원경제는 이제야 고개를 돌려 태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듣자 하니 전날, 영룡이 갑자기 발광해 임안을 호수에 빠뜨렸다고?”
태자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당시 임안이 영룡에 올라타 물에서 놀고 있었는데, 회경이 휘파람을 불어 영룡을 놀라게 해 임안을 물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태자와 임안공주는 한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온 아이였다. 회경 공주가 농간을 부려 임안을 괴롭히니 그가 적형(嫡兄)으로서 이렇게 말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사실 그대로지만, 임안을 두둔하려는 마음이 좀 컸다. 아바마마의 눈에 이건 일종의 ‘단순함’이었다.
이어 태자는 덧붙였다.
“소신이 시종일관 신경 쓰였으나, 납득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사옵니다.”
원경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룡의 반응이 지나치게 격앙됐지.”
‘영룡은 천자인 나를 제외하고, 태자를 포함한 황자와 황녀들은 거의 동일시하는데 말이야.’
태자도 그렇고 황자도 그랬다. 제왕의 존귀한 옥좌(玉座)에 오르지 않는 이상 본질적으로 같았다.
“아바마마, 그뿐만이 아닙니다.”
태자가 말했다.
“영룡이 임안을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매우 흥분한 상태로 회경에게 헤엄쳐 가더니 심지어는 머리를 둔치에 부딪친 후 물가에 엎드려 회경이 올라타기를 기다렸습니다.”
원경제의 동공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태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회경이 올라탔느냐?”
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건 회경이 올라타려고 했을 때, 영룡이 강렬하게 저항하여 회경을 물리쳤다는 겁니다.”
이 설명을 들은 후 원경제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차를 대령하거라, 짐이 영룡을 좀 보러 가야겠다.”
원경제는 용련(*龍輦: 황제가 타는 마차)을 타고 영룡에게로 향했다.
* * *
태자와 위연이 따라나섰다. 가마를 들이기 전, 위연이 지나는 말로 물었다.
“전하, 그때 회경 공주마마를 제외하고 주위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곁에 있던 환관이 가마 발을 젖혔으나, 태자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위 공 수하에 있는 그 동라도 함께 있었네.”
‘허칠안……?’
위연은 제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태자의 말에 의하면 일개 동라는 딱히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것이야. 그를 기억하는 건 순전히 그 반쪽짜리 시 때문일 테지. 그렇지 않고선 회경의 심복이 그렇게나 많은데, 태자가 대수롭지 않은 졸개들을 기억할 리가 없다.’
위연의 생각은 여기까지 이르렀다. 태자는 발을 젖히다가, 위연이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위 공, 가지 않을 텐가?”
위연이 그제서야 반응하더니 그를 따라 가마에 들어갔다.
태자가 발을 치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허나 그 동라도 확실히 흥미로워. 본인은 보잘것없는 일개 동라가 시를 짓는 재능이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우리가 호숫가에서 연회를 베풀던 그날, 그가 곤경에 처한 회경을 구해주기 위해 현장에서 시를 지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는 태자가 내 수하의 그 동라가, 이미 회경 공주마마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연은 그다지 개의치 않고 웃었다. 도리어 가장 마지막 말이 그의 흥미를 자극했기에, 그는 발을 젖히며 말했다.
“그가 또 무슨 시를 썼습니까?”
‘막수전로무지기, 천하수인불식군’, ‘소영횡사수청천, 암향부동월황혼’ 모두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많이 읽은 위연이 보기에는 뛰어난 걸작이었다.
200년 동안, 대봉의 지식인들 마음속에는 재주가 남다른 시인이 하나씩 살고 있었다.
태자가 맑고 우렁찬 소리로 읊었다.
“취후불지천재수(*醉后不知天在水: 술에 취하면 하늘이 물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네), 만선청몽압성하(*滿船淸夢壓星河: 조용한 꿈에 가득 찬 배가 은하수로 인도하네)!”
‘명시다!!’
위연의 눈이 반짝거렸고, 이 두 구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자가 잠시 묵묵히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에서 위연이 채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머지는요?”
태자가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없네.”
‘없다니…….’
위연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맞은편에서 오랫동안 말이 없자, 태자는 별안간 기분이 유쾌해졌다.
* * *
허칠안이 궁성에 들어서자, 장공주의 아원(雅苑)에 황장녀(皇長女)가 보였다. 그녀는 흰색 바탕에 붉은 매화가 송이송이 피어난 아름다운 궁의를 입고 있었다.
당대 가장 유행하는 땋은 머리를 한 채, 화려한 장신구를 꽂아 청아하고 수려한 모습이 더욱 도드라졌다.
회경 공주는 궁녀에게 차를 지켜보라고 한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건이 어떻게 돼가고 있느냐?”
‘아마도 청룡사의 조사 결과를 묻는 거겠지…….’
허칠안이 말했다.
“확실히 단서를 좀 얻었습니다.”
바로 어제 그들이 문연각에서 함께 노력해 보탑사의 흥망성쇠와 오늘날의 계승에 대해 조사해냈으니, 장공주는 청룡사와 관련된 정보를 묻는 것이 틀림없었다.
허칠안의 말을 들은 회경 공주는, 기대에 찬 눈으로 허칠안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이 동라는 그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일 처리 능력이 일품이었고, 후각이 예민했다.
애당초 야경꾼 관아에 그를 추천할 때부터 장공주는,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부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예상했던 절차는 관찰하고, 암시한 후, 은혜를 베풀어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뜻밖에 이 허칠안이라는 자가 민첩하고 세상 물정에 밝아, 마지막 한 걸음을 앞당겨 뗄 줄 어찌 알았겠는가.
“기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소직이 일찍이 망기술을 시전하는 주적웅을 관찰한 적이 있사온데, 당시에는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특수한 법기로 망기술을 차단했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소신 사천감과 궁내의 법기를 제외하고 다방면으로 조사한 결과 청룡사에 기운을 감출 수 있는 법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만, 물론 현재는 주적웅의 법기가 반드시 청룡사의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장공주가 캐물었다.
“청룡사의 그 법기가 현재 아직도 존재하느냐?”
허칠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잃은 지 오래입니다. 소직이 마침 공주마마께 이 일을 아뢰려 합니다. 약 1년 전에 청룡사에 항혜라는 승려가 속념(俗念)이 동하여 참배자와 눈이 맞아 경성을 달아나면서 그 법기도 훔쳐 갔다고 합니다.”
장공주가 즉시 물었다.
“둘이 도피할 거면 도피하지, 법기는 왜 훔쳐 간 거지?”
‘이 여인은 역시 똑똑하다. 말 한 마디에 문제의 핵심을 짚어낸다.’
허칠안이 말했다.
“이 일은 조사하여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장공주마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
그녀가 정교한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좀 의외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전하께서는 평양군주를 아십니까?”
허칠안의 한 마디로, 장공주의 머릿속은 폭풍이 치는 듯 요란해졌다. 옥 조각같이 도도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격한 감정 동요가 일었다.
“이 일이, 사실인가?”
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허칠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는 청룡사의 반수 주지가 소직에게 일러준 것인데,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조사해봐야 알 듯싶습니다.”
대담하게 가정하고 조심스럽게 증거를 모아야 했다. 증거가 있기 전까지 그는 단언하지 않을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