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임안공주를 소견하다
허칠안은 머릿속에서 모든 단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만약 위연이 내 목표를 배후의 검은손에 한정 지은 거라면, 초대 감정의 일은 내가 개입할 필요가 없지만 피할 수가 없다. 사건의 핵심 열쇠를 제대로 파악해야만 계속해서 추적 조사할 수 있을 거다.
지금까지 봤을 때 상백의 맥락은 이러하다. 무종 황제가 그해 황위 찬탈에 성공하고, 초대 감정을 상백에 봉인했다. 기운을 억누르는 신검을 이용하고, 법진을 입혀 봉인한 것이다. 이 비밀은 원경제 한 사람만이 알고 있겠지.
북방 요족이 조정 내부의 어떤 개자식과 손을 잡고 상백의 봉인을 폭발시켜 초대 감정을 풀어주었고, 대봉 경성이 혼란에 빠지길 기다리고 있는 거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기회를 이용해 북방에서 난을 일으켰다.
만약 이 생각의 흐름대로라면, 나의 조사 대상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전(前) 황실의 사람이고, 둘째는 황위를 찬탈하려 했던 사람.
음, 황실 종친? 전(前) 황실은 이미 오백 년 전의 역사이니 첫 번째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렇다면 황위를 찬탈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음, 이 가설은 비교적 합리적이지만 증거가 부족한데.
북방 요족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건 황실 종친 아닌가……. 잠깐, 진북왕?!’
허칠안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경악한 기색을 내비쳤다.
“뭘 발견한 것이냐?”
장공주가 즉시 물었다.
‘……네 삼촌이 너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데, 증거가 없네.’
허칠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공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추리를 이어나갔다.
‘이 얘기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까지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돼. 친왕 모독은 죽을죄니까!’
추리는 마치 수학 문제 같아서 어떠한 단서라도 연결 짓고 긁어모아야 했다. 하지만 무릇 한 가지 의혹이 입증되지 않으면, 답안은 아마 저 멀리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따라서 현재 나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첫째, 상백 밑에 봉인된 것이 감정인지 확인해야 해. 이것이 내 모든 추측의 핵심이다. 이 일을 확인하려면, 반드시 불문이 이 사건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확실히 해야 하고.
둘째로 조 현령을 죽여 멸구한 자가 도문의 인종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도문은 이 사건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진북왕과 결탁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이 결탁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야 한다.
이 문제의 해법은 반드시 일주일 내에 완성되어야 해. 그렇게 해야 설령 잘못 짚었다고 해도, 내게 처음부터 다시 해볼 기회가 생기니까. 만약 열흘 동안 여전히 사건에 별다른 진척이 없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위(魏) 아빠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울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거다.’
<삼호는 폐기하고, 다시 하나 지어주세요.>
허칠안은 고민하는 동안 내일의 임무를 재차 되짚었다.
‘각 수련 체계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조 현령 사망의 진상을 확인한다. 청룡사를 방문해 그해의 비밀에 대해 알아본다. 진북왕부를 방문해 경성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왕비를 만나본다.’
마음을 굳힌 허칠안이 말했다.
“소직 갈피가 좀 잡혔으나 결과가 아직 나오기 전이라 감히 공주마마께 함부로 아뢰기가 어렵습니다.”
장공주는 총명했다.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 공주는 좀 피곤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금사남목 마차는 문연각에서 멀어져가며 제 갈 길로 향했다.
허칠안은 안장에 두 다리를 끼웠고, 이내 말을 타고 달렸다.
그런데 그가 동화문에 도착했을 때, 시위대에게 저지당했다.
“임안공주마마께서 너를 만나고자 하신다!”
시위장이 말했다.
‘임안공주? 그녀는 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잖아. 몸에 장공주의 표찰이 붙어있으니 아마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다. 만나지 않겠어!’
허칠안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황명을 받아 사건 조사를 책임지고 있네. 임안공주마마께는 다른 날에 찾아뵙겠다고 아뢰시게.”
그는 말하면서 금패를 꺼냈다.
그러나 시위장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도리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임안공주마마는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공주마마이시네. 네 그 금패는 여기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
‘연회석 상에서의 관찰에 따르면 클럽 여왕……. 아, 아니, 임안공주는 교활하고 제멋대로다. 비록 동생 영월처럼 꿀밤 한 대에 한참 동안 훌쩍댈 것 같지는 않지만, 물에 빠지면 억울하다는 듯 엉엉 울 테지. 꿍꿍이가 많은 인간은 아니야.
아마도 못살게 굴기는 하겠다만 무슨 홍문연(*鴻門宴: 초청객을 음해할 목적으로 차린 연회)까지는 아니겠지. 좀 조심하면 될 거다. 아, 내가 배짱이 이렇게 두둑했던가…….’
허칠안은 탁한 공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안내하시게.”
* * *
둘째 공주는 ‘소음궁(韶音宮)’에서 지냈다. 넓고 운치 있는 별장이었다.
시위장이 이끄는 대로 높은 문턱을 넘고 담벼락을 돌았더니, 소녀의 천진난만한 색채가 물씬 풍기는 뜨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포도 덩굴대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었고, 담벼락 모퉁이에는 형태가 희미한 점토 인형이 쌓인 채였다. 동쪽 정자에는 마구 쌓여 있는 괴상한 물건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서쪽 화단 가장자리에서 둘째 공주 임안이 여종 몇몇을 데리고 수구(綉球)를 차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에, 때때로 임안공주의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전하, 허칠안을 데려왔습니다.”
시위장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읍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둘째 공주는 수구를 밟더니 돌아보았다. 그녀는 허칠안을 몇 초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치켜세우더니, 수구를 힘껏 차서 날려버렸다.
펑!
수구를 차느라 원형으로 부풀어진 임안공주의 치맛자락은 마치 꽃이 핀 꽃 한 송이 같았다.
만나자마자 기선 제압당한 허칠안은 순간 무서운 마음에 피하려고 했으나, 꾹 참았다. 그 수구는 다행히 빗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먼 곳으로 튕겨 나갔다.
“……한 번은 봐주마.”
둘째 공주는 ‘자존심 되찾기’를 강행했다.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바깥 대청으로 향하며 말했다.
“허칠안, 너는 본 공주를 따라 들어오고 다른 자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바깥 대청은 화려하고 기품 있었다. 둘째 공주는 의자에 단정하게 앉았고, 허칠안은 대청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살펴보았다.
둘째 공주는 황녀의 신분을 내세워 눈빛만으로 허칠안을 복종하게 만들려 했다.
그녀는 회경이 어렸을 때, 한동안 매를 길들이곤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매의 눈은 날카로워서 흡사 칼과 같았다. 보통 사람들은 매와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지 못하기 때문에, 매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반드시 더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으로 제압해야 했다.
매를 길들이는 자가 눈을 피하면 매의 주인이 될 자격을 잃는 것과 다름없었다.
회경이 매를 길들이는 목적은, 날카로운 눈빛을 단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둘째 공주는 지금까지도 회경과 눈을 오래 마주칠 엄두를 내지 못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이 촉촉하고 맑은 도화안에서 살상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을 때도, 도리어 말을 하려다 마는 듯한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허칠안은 둘째 공주를 관찰했다. 그녀의 얼굴은 동글반반하여 저채미의 얼굴형과 비슷했다. 그러나 저채미의 이차원적인 큰 눈에는 달콤함이 감춰져 있는 반면, 둘째 공주는 성숙한 미인에 도화안을 지녀, 그 어느 누구를 봐도 애정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칠안, 듣자 하니 네가 회경의 충견이라지.”
둘째 공주는 험상궂게 주시해봤자 허칠안을 굴복시키지 못할 듯해 보이자, 언어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팔공(*八公: 일본의 충견 하치코)이라 불러주십시오.”
허칠안이 간곡히 말했다.
“팔공이 무엇이냐?”
“충견이란 의미입니다.”
“지금 본 공주를 놀리는 게냐?”
임안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자, 허칠안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임안공주가 응석 부리듯 말했다.
“본 공주가 네게 기회를 주겠다. 지금 즉시 나와 손을 잡고, 회경 그 여인에게서 벗어나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한테 들러붙으라고? 내가 이미 장공주의 다리와 위연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는데, 또 너한테 들러붙는다면……. 이건 그야말로 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거잖아.’
허칠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소직 이미 장공주마마를 위해 소처럼 일하고,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기로 맹세했습니다.”
둘째 공주는 즉시 말했다.
“나도 네가 나를 위해 소처럼 일하길 원한다.”
‘그럼 네가 나한테 풀이라도 먹여줄 거니?’
허칠안은 상황 파악을 완료했다. 둘째 공주는 장공주의 총애를 받으며 곁에서 그녀를 보좌하는 자신을 꼼꼼하게 살펴본 듯했다. 잘생기기도 했고, 시를 지을 줄도 알며, 말도 듣기 좋게 하니, 이에 질투심이 나 그를 장공주의 곁에서 뺏어가고 싶은 것이다.
“둘째 공주마마, 억지로 강요하지 마십시오.”
허칠안은 독하게 거절했다. 사람은 사회 계약 정신을 가져야 했다. 기왕 장공주를 위해 일하기로 했으니 더는 다른 자와 손을 잡지 않아야 했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둘째 공주는 눈을 부릅뜨고 냉소를 머금으며 위협했다.
“지금 즉시 큰 소리로 추태를 부릴 것이야. 시위에게 네가 본 공주를 놀리고 조롱하려 했다고 이르겠다.”
“소생, 둘째 공주마마를 위해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겠나이다.”
허칠안이 애원하며 말했다.
둘째 공주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식시무자위준걸(*識時務者爲俊杰: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아는 자가 걸출한 인물이다), 너는 인재다. 음, 앞으로 매일 오시가 지나면 이곳으로 본 공주를 만나러 오거라. 본 공주에게 파견되는 것이다.”
“전하, 소직 수행하고 있는 임무가 있사옵니다. 상백 사건을 조사해야 합니다.”
허칠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임안공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하긴. 이해했으니 되었다. 본 공주가 너를 부리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오거라.”
허칠안은 알아차렸다. 이 여인은 괜히 트집을 잡는 듯했다. 정말 그에게 임무를 맡기려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장공주에게 딴지 걸고 싶은 것이다.
방금 한 위협도 별다른 살상력이 없었다.
‘떳떳한 공주의 명성을 일개 동라의 하찮은 목숨과 바꾸다니, 좀 딸리는군!’
그는 이를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에 태도를 바꿔 둘째 공주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었다. 꼬마 친구랑 노는 셈 치고 대충 얼버무린 것이다.
“나가보거라.”
일이 순조롭게 풀리자 둘째 공주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네.”
“잠깐.”
둘째 공주가 그를 불러세워 허리춤의 옥패를 떼더니 말했다.
“이건 본 공주의 증표다. 이걸 가지고 궁에 들어오면 시위들이 막아서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 본 공주한테 올 때만 쓸 수 있다. 다른 곳은 가지 못해.”
‘……이렇게 시원시원하다고? 너 나한테 안 좋게 보일까 봐 그렇지?’
허칠안은 눈을 반짝이며 옥패를 품속에 넣었다.
“소직, 허칠안! 앞으로 전심전력으로 마마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